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43)
로판 속 공무원 843화(844/945)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게 눈에 보였다.
첫날에도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손님들이 연회장을 배회했지만, 하루가 지나기 무섭게 그 배가 되는 인원들이 연회장에 나타났다.
‘효과 확실하네.’
그리고 손님 증폭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세 인물을 바라봤다.
제국 서부의 맹주인 현명공. 제국 중부의 맹주이자 대마법사인 트릭시. 제국 동부 맹주의 여동생이자 바렌티의 보물인 마르. 이 셋이 연회장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퍼지자, 중도 참여하는 귀족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예상한 상황이기는 하다. 현명공이야 제국 서부 명문가의 경사니 당연히 참석한 것이라고 쳐도, 외부 활동이 극히 적은 트릭시가 남의 가문 연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새롭게 등극한 공작의 여동생도 같이 나타났다. 귀족들 입장에서는 군침이 싹 도는 라인업이지.
‘연회 명분도 딱 좋고.’
마침 다른 이유도 아닌, 대부인의 90세 생신을 기념하는 연회다? 어르신의 장수는 남녀노소, 거주지, 작위의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축하할 수 있는 일. 덕분에 귀족들은 아무런 눈치를 보지 않고 자연스레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대부인의 지혜와 성품은 제국의 귀족들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이상입니다. 제가 아직 한 사람의 역할도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대부인의 드높은 이름과 업적을 들으며 귀족의 마음가짐을 배웠지요. 제 영웅이나 다름없는 분께서 여전히 건장하시니 실로 기쁠 따름입니다.”
그리고 귀족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상식과 예절을 기본적으로 갖춘 존재인지라, 연회 주인공인 조모님에게 열렬한 덕담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현명공과 트릭시, 마르 때문에 온 것이라도 90세 어르신을 무시하는 건 못 배워 처먹은 행동이니까. 만약 그런 만행을 저지르면 그 귀족은 바로 사교계에서 매장되는 거다.
“영웅은 무슨. 젊은 것들에게 밀려서 방구석에만 있는 늙은이인데. 그래도 듣기는 좋구먼.”
조모님은 그런 귀족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존재감을 과시하셨다. 이 연회에 세 공작가가 관여했어도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것처럼.
노익장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모습이지만 조금 걱정된다. 미친 듯이 몰리는 손님들을 상대하는 건 젊은 사람도 힘든데, 조모님은 연세도 상당하시잖아. 저러다가 체력 문제로 쓰러지시지는 않을까 우려될 수밖에 없다.
“인사를 멈출 수도 없고.”
착잡한 심정에 한숨 섞인 투정을 내뱉고 말았다.
무난하게 이어지던 인사를 갑자기 멈추게 된다면 인사를 나눈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뉘게 된다. 다 같이 조모님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해 온 사람이지만, 알게 모르게 서열이 나뉘게 된다. 귀족들은 이런 사소한 걸로도 예민하니까.
게다가 생신 연회에서 체력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건 난감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90세 노인이라면 당연히 체력이 부족하겠지만, 괜히 인사를 멈추면 ‘아무래도 대부인께서도 많이 힘드신 모양이다.’ 같은 뒷얘기가 나올 터. 그러면 조모님 임종 임박설이 떠도는 건 순식간이다.
“칼.”
“응?”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중,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트릭시가 톡톡 어깨를 건드렸다.
“사람들을 물릴 수는 없으니 대부인께 작은 마법이라도 걸어드리려고 하는데. 괜찮겠니?”
‘아.’
트릭시의 말에 눈이 번뜩 뜨이는 기분이었다. 마치 안갯속에서 빛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러네. 마법으로는 체력도 강화할 수 있고, 내 옆에는 대륙 제일의 마법사가 있다. 왜 조모님 체력 같은 걸 걱정한 거지?
물론 마살로 가문은 제국에서 손 꼽히는 명문가기에 거느린 마법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거다. 이미 조모님에게 여러 마법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상태일 수도 있다.
‘마법은 다다익선이지.’
허나 마살로 가문의 마법사를 전부 합한 것보다 트릭시 한 명이 더 뛰어나지 않겠나. 조모님에게 강화 마법이 걸려 있다면 더 많고, 더 강한 강화 마법을 걸면 그만이다.
마법으로도 체력이 부족하다면 마법이 부족한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을 가져야 한다.
“부탁할게. 그래도 대부인께서 부담스러워하실 수도 있으니, 몰래 해줄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말렴. 그 정도는 간단해.”
추가 요구 사항에도 트릭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여전히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조모님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거렸다.
“됐단다.”
“어?”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저 정도면 바람이 흔들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약한 움직임.
허나 그 움직임만으로도 마법이 발동됐다고 한다. 트릭시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구박했겠지.
‘와.’
얼떨떨한 심정으로 조모님을 보니, 실제로 조모님의 안색이 아까보다 밝아졌다. 움직임은 보다 가벼워진 게 느껴졌고.
대단하다. 발동부터 효과 증명까지 1초도 걸리지 않는 신속함. 이게 대마법사의 위용인가.
“눈치채신 것 같구나.”
“그러게.”
다만 아무리 은밀하게 발동한 마법이라도 당사자는 모를 수가 없는 법. 비록 트릭시는 아무 표시도 나지 않게 강화 마법을 걸었으나, 갑자기 컨디션이 좋아진 조모님은 나와 트릭시를 바라봤다.
이윽고 조모님은 자세히 봐야 알 정도로 살며시 고개를 숙이셨다. 트릭시의 마법이라는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넘쳐나니까. 공작 겸 연장자의 배려에 감사를 표─
“공작이라는 직함이 이럴 때는 불편하구나. 대부인께서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분인데, 그런 분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시다니. 편하게 아랫사람처럼 여기셔도 되는데.”
그 말에 무심코 눈을 내리깔았다. 트릭시의 남편인 나조차 차마 긍정할 수 없는 발언이었으니.
이 세상 어떤 귀족이 공작을 아랫사람처럼 생각하겠냐고. 그것도 자기보다 30살은 연상인 사람을.
‘연상은 아니지 참.’
머리를 좀먹는 불경스러운 생각에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트릭시가 비록 엘프 나이로는 120이 넘지면, 인간 나이로는 창창한 20대다. 조모님보다 약 60살은 어린 사람에게 30살 연상이라니. 이 무슨 실례되는 생각인가.
반성하자. 트릭시의 나이는 엘프 나이의 20%다. 이건 에넨과 영원한 푸른 하늘, 콘스탄티나도 인정할 세상의 진리다.
어느덧 연회 마지막 날.
“내년 생일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올해 생일보다 즐거운 생일은 오지 않을 것 같구나.”
손님들의 인사 세례가 잠잠해진 틈을 타, 가족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조모님이 덤덤히 입을 여셨다.
“너무 성급하신 말씀입니다. 100세 생신은 올해보다 더 성대하게 준비할 예정이라서요.”
조모님의 말씀에 장인어른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100세 생신 기념 연회라. 확실히 90세 연회도 이 정도인데, 100세라면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할까.
‘황제한테 황궁이라도 빌려달라고 부탁할까?’
황궁은 어차피 신년하례식 정도가 아니면 공간이 남아도는 곳이다. 게다가 후작가 어르신의 100세 생신이면 제국이 나서서 축하하는 게 도리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제국 역사의 산증인이잖아. 제국 300년 역사의 약 30%를 함께한 증인.
“단순히 성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든든한 가족들을 본 건 올해가 처음이니, 올해의 기쁨을 어찌 뛰어넘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신 조모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부인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고개를 숙이셨다.
“고맙네. 우리 에리에게 좋은 가족이 돼줘서.”
“대부인. 그런 말씀 마세요. 저희가 에리 언니에게 좋은 가족이 되어준 게 아니라, 언니가 저희에게 다가와 준 거예요.”
“어쩜 말하는 것도 이리 고운지.”
마르가 고개를 저으며 답하자 조모님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하지만 내 손녀니 자네들보다는 내가 더 잘 알게야. 에리는 자네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내 아픈 손가락으로 지냈겠지. 장담할 수 있어.”
“할머니. 그런 건 장담 안 해도 되는데…”
난데없이 디스를 당한 에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건 에리의 마지막 양심인 것 같다. 본인이 생각해도 자기가 가족들에게 많은 걱정을 끼쳤다는 거지.
“내가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짝은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 홀로 남을 에리는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걱정했네.”
“대부인…”
“그러니 이 늙은이의 한을 풀어준 자네들을. 아픈 손가락이었던 손녀가 귀여운 외증손자를 데리고 온 이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어느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분명 훈훈하고 감동적인 분위기여야 정상인데, 조모님이 토해내는 감정이 너무 절절해서 감동을 느끼기 어려웠다.
에리가 조금만 덜 아픈손가락이었다면 감동적이었을 텐데 말이야. 과하게 아픈 손가락이어서 그만.
“하지만 10년이 넘게 한을 품으며 살아왔으니, 더 욕심을 내도 괜찮겠는가?”
“물론입니다. 편히 말씀하시지요.”
나에게 시선을 돌리신 조모님을 향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모님이라면 욕심을 낼 자격이 충분한 분이다. 어떤 요구를 하셔도 얼마든지 들어드릴 각오가 되어있다.
“이 늙은이가 몇 년이나 살지는 오직 신만이 알겠지만, 매년 내 생일 때만큼은 자네들을 봤으면 좋겠어.”
“그건 곤란합니다. 생일이 아니라 다른 날에도 와야지요.”
“이거 욕심은 젊은 사람이 더하구먼.”
그 말에 숙연했던 분위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연회의 마지막은 웃으면서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황제 이 새끼가 웃으면서 끝낼 기회를 망쳐버렸다.
“황제 폐하께옵선 마살로 가문의 기둥이요, 제국의 원로인 빅토리아 마살로의 90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하셨으며, 이는 마살로의 경사가 아닌 제국의 홍복이라 하셨습니다.”
하필 연회 마지막 날에 찾아온 황제의 사절. 그 사절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조모님에게 황제의 축사를 전달했다.
“제국의 빛과 어둠, 영광과 절규를 동시에 겪은 영웅에게 황실은 마땅히 경의를 표할지니. 이 셉터는 빅토리아 마살로 님을 위한 폐하의 선물입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셉터를 양손으로 바쳤다.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셉터를. 조모님의 백발과 대조되지만, 그렇기에 아름답고 웅장한 셉터를.
‘미친놈…’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무리 국가 원로의 90세 생일이라지만, 셉터를 선물로 주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미친 황제…’
이 새끼의 정신세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