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46)
로판 속 공무원 846화(847/945)
황제가 분노의 보드카를 흡입하는 일이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놈이 보드카를 마시는 것은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황후가 주의를 주면 금주하는 시늉이라도 한 것 같은데, 집무실 바닥을 개조해서 보드카를 꺼내는 걸 보면 시늉조차 포기한 것 같더라.
아무튼 아르메인에서 발견된 트리카의 셉터, 소르덴에서 발견된 아르메인의 보주로 인해 황제는 골머리를 앓았고,
‘날씨 좋다.’
나는 황제와 별개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트리카의 셉터? 황제와 아르메인 국왕이 잽싸게 조약을 체결해서 며칠 후면 제국으로 넘어온다. 아르메인의 보주? 황제의 말로는 류티스의 결혼식까지 함구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르메인의 경사에 맞추어 보주를 넘기고, 아르메인이 기뻐하는 틈을 타 보주의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들어오는 셉터, 제국 외무성이 열심히 협상할 보주 안건.둘 다 나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이다.덕분에 황제가 보드카를 마시든 말든 나는 여유로울 수 있는 거지.
만약 황제가 ‘자네 어차피 아르메인에도 갈 예정이지? 그때 겸사겸사 협상도 해 줄 수 있나?’ 같은 소리를 했다면 눈이 뒤집혔을 거야. 에이만카 17세 치하 시즌 1호 하극상이 벌어지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우-”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창문 밖 경치를 구경하는 사이, 발치에서 천진난만한 옹알이가 들렸다.
“우리 로베르트. 이제 잘 돌아다니네?”
“우-!”
빙긋 미소를 지으며 발치에 있던 옹알이의 주인공, 내 조카 로베르트를 품에 안았다.
분명 얼마 전에 봤을 때는 에리히나 제노비아의 품에 안겨서 손가락만 빨던 아이였지. 그랬던 로베르트가 어느덧 혼자 힘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강인한 아이가 되었다.
큰아빠로서 흐뭇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원래 어린아이들은 하루 사이에 쑥쑥 크는 법이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기어다니는 조카를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왔다.
“큰아빠랑 같이 기어다닐까?”
“우-?”
내 말에 로베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큰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에리히 이놈. 설마 기어다니기 시작한 자식을 상대로 이족 보행을 한 건가? 사랑스러운 자식이 대견하게도 저택을 누비는데, 그걸 두 발로 서서 내려다본 거야?
‘건방진.’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 형은 자식들과 함께 저택을 기어다녔거늘. 그 사소한 노력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과 추억을 주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자, 큰아빠랑 놀자.”
“우!”
이렇게 된 이상 우리 조카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 초보 아빠가 제 역할을 못한다면 능숙한 큰아빠라도 열심히 해야지.
그렇기에 결연한 마음으로 로베르트를 도로 바닥에 내려놓은 뒤, 나 또한 바닥에 엎드려 사족 보행 준비를─
“아, 아주버님?”
‘아.’
엎드리기 무섭게 제노비아가 들어왔다.
민망하다. 나랑 로베르트만 있는 방이라 안심하고 엎드린 건데, 하필 이 타이밍에 들어올 줄이야.
“우리 조카가 많이 심심해 보이길래…”
어색하고도 추한 변명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민망한 것도 민망한 거지만, 난데없이 바닥에 엎드린 아주버님을 본 제노비아의 심정은 오죽할까.
“아, 네. 감사합니다…”
다행히 제노비아는 내 변명에 적당히 수긍하고 넘어가 줬다.
정말 고마워서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주버님의 추태를 자연스레 넘길 수 있어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대처. 제노비아의 배려에 고마울 따름이다.
“에리히랑 세라는?”
최대한 자연스레 이족 보행으로 복귀하며 화제를 돌렸다.
기껏 저택에 방문한 형을 자기 자식과 단둘이 두고 있던 에리히. 실로 건방지고 무책임한 행동이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너그럽게 이해하고 있었다.
에리히는 얼마 전에 태어난 둘째 조카를 돌보느라 바쁘니까. 안 그래도 건강한 편이 아닌 세라는 출산의 여파로 회복에 집중하고 있어서, 에리히가 둘째 조카에 집중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될 상황이니까.
“막 에두아르트를 재워서 세라 옆에 눕혔어요. 다시 깨지 않나 확인만 하고 금방 여기로 올 거예요.”
“그래? 다행이네.”
“그러게요. 어찌나 잘 울던지, 저랑 에리히가 달라붙어서 겨우 달랬어요.”
제노비아의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내 둘째 조카이자 에리히의 차남인 에두아르트. 풀네임은 세라의 성을 따서 에두아르트 트리마라.친모인 세라가 허약한 편이라 혹시 자식도 허약하게 태어나는 게 아닌가─ 라는 걱정을 받았으나, 그 걱정을 보란 듯이 깨부수고 튼튼하게 태어난 아이.
‘크라시우스의 피가 강하기는 해.’
세라의 뱃속에서 나타났지만 건강은 에리히를 닮았는지, 의료진에게 튼튼한 아이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세라와 유모가 얼마나 울었던가. 세라의 부친인 자이겔 남작도 애써 눈물을 참았었고.
다만 건강해도 너무 건강해서 에리히가 고생을 꽤나 하고 있다. 뭐가 그리 답답한지 수시로 울고, 배고프거나 볼 일을 보면 방이 떠나가라 울고, 별다른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도 울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지. 거의 전성기 테레사 수준이야.
‘세라가 회복된다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부모가 동시에 양육에 임한다면 아무리 건강한 아이라도 능히 돌볼 수 있지만, 세라는 현재 회복을 위하여 전력 외인 상태. 안타깝게도 에리히 홀로 전성기 테레사와 비슷하거나 살짝 아래인 아이를 돌봐야 했다.
그래서로베르트를 돌봐야 할 제노비아도 급히 에두아르트 전선에 투입되었다. 괜히 로베르트가 나랑 단둘이 있던 게 아니지.
“나 왔어…”
“어, 왔냐?”
제노비아가 자신을 향해 뽈뽈뽈 기어 온 로베르트를 안으려던 찰나, 초췌한 안색의 에리히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우- 아-!”
“우리 로베르트, 큰아빠랑 잘 있었지?”
“우우-!”
“그래. 잘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네.’
그 와중에 자신을 반겨주는 아들을 향해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애잔하고 기특한 모습이다. 네가 초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비는 아비구나. 에두아르트를 상대하느라 모든 기력이 빨렸을 텐데, 용케 로베르트를 상대하고 말이야.
“제노비아. 로베르트랑 같이 나가 있어줄래? 에리히랑 할 말이 있어서.”
“네. 필요한 게 있으면 통신구로 찾아주세요.”
내 부탁에 제노비아는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제노비아가 보기에도 에리히의 상태가 위태롭기는 한 모양이다.
“앉아서 좀 쉬고 있어라.”
“그래야지. 이러다 죽을 것 같아.”
그렇게 이 방이 아이 없는 노 키즈 존이 되자 에리히는 푹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사실 제노비아도 에두아르트를 달래고 온 길이라 힘들겠지만, 로베르트는 동생에 비하면 매우 온순한 성격이다. 사용인들과 함께 돌본다면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을 터.
“그래도 시끌벅적해야 아이 키우는 맛이 나지. 너무 조용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야.”
일단 골골거리는 에리히에게 구박 섞인 위로를 건넸다.
에두아르트를 돌보는 게 힘들다는 건 그만큼 에두아르트가 건강하다는 증거. 작고 아담한 아이가 허약해서, 병에 걸려서 조용한 것보다는 이 시끄러움이 더 즐겁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
실제로 내 말에 에리히의 입꼬리가 힘겹게 올라갔다.
에리히랑 세라도 말로 표현하지만 않았지 에두아르트를 상당히 걱정했었다. 그저 건강에 대한 얘기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 부정이 탈까 두려워, 남들이 걱정해도 부모인 자신들만큼은 침묵을 지켰었지.
그 걱정 끝에 건강하고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으니 얼마나 기쁠까. 이 정도 피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형.”
“어, 왜.”
“혹시 형이 기르는 성수들. 잠깐 빌려줄 수 있어?”
그 말에 측은한 심정으로 에리히를 바라봤다.
“많이 힘드냐?”
“아까 말했잖아. 죽을 것 같다고.”
진심이 가득 담긴 대답인지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수할 수 있는 것과 힘든 건 별개의 문제기는 하지.
“한 마리. 한 마리만 있으면 숨 좀 트일 것 같아.”
성수들이 아이 돌보기에 어마어마한 효과가 있다는 건 이미 증명된 진리다. 우리 저택 아이들도, 황태녀를 비롯한 황제의 아이들도, 타일글레헨에 있는 테레사도 성수들을 보면 환장하잖아. 로베르트와 에두아르트라고 다르겠나.
“한 번 보내면 계속 보내야 된다.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있다가 없어지면 난리 나잖아.”
“에두아르트가 기어다닐 때까지만 부탁할게. 그 뒤로는 내가 우리 애들 데리고 형 저택에 갈 테니까.”
출장 서비스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여차하면 자기 자신이 출장 서비스가 되겠다는 굳은 각오.
저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다. 어차피 타일글레헨 파견도 가고, 제도 산책도 하는 녀석들이니 에리히 저택 파견도 추가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좋아하려나?’
게다가 아무리 에두아르트가 활발해도 한 명이 내뿜는 활발함에 불과하다. 성수들 입장에서는 우리 저택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일부터 보내면 되냐?”
“너무 고맙지.”
활짝 웃는 에리히를 보며 조용히 찻잔을 잡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병아리부터 보내면 되겠지. 너무 큰 걸 보내면 조카들이 놀랄 수도 있으니까.
내일부터 구원 투수가 등판한다는 확답을 듣자, 에리히는 긴장이 풀렸는지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아, 형.”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부활했다.
“아르메인에 뭔 일 있었어?”
“뭐?”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최근에 안부나 물을 겸 류티스한테 연락을 걸었었는데, 평소보다 웃음이 과하더라고.”
“결혼이 코앞이니까 그런 거겠지.”
“그런 웃음이면 말을 안 하지. 무슨 일이 생겼는데 티를 내지 않으려고 감추는 웃음 같았어.”
상당히 날카로운 추리라 실소가 나올 뻔했다.
아르메인에서 트리카의 셉터가 발견된 것은 아직 극소수만 아는 일. 그 극소수에는 아르메인 왕자인 류티스도 포함되었을 테니, 류티스가 표정 관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에리히는 그 관리를 꿰뚫어 봤다. 왕자가 작정하고 숨기려던 감정을 알아챘다.
‘이제 진짜 전문가 수준인데?’
경이롭다. 제국의회에서 의원들과 투닥이고, 대륙 각지의 높으신 분들과도 우정을 유지 중이라 그런가? 점점 에리히의 능력이 수직 상승하는 게 느껴진다.
“네가 모르면 나도 모르지. 애초에 내가 타국 일을 어떻게 알아.”
허나 경이로운 것과 별개로 기밀 사항을 알려줄 수는 없다. 어차피 셉터가 황제 손에 들어오면 공식적으로 홍보할 테니, 그때 자연스럽게 알─
“형이 폐하랑 온갖 논의를 다 하는 건 대륙인 전부가 알잖아. 아르메인 일도 알 것 같았지.”
‘이 새끼가.’
목 끝까지 욕이 치솟았다. 휴가 중인 형을 상대로 ‘님 어차피 황제 AI 봇이나 마찬가지잖아요 ㅎ’ 같은 말을 한다고?
‘어떻게 알았지?’
애석하게도 에리히의 말이 맞다.
난 휴가 중임에도 황제한테 툭하면 불려가고, 온갖 일을 알게 되고, 아르메인에서 터진 소식까지 듣게 된 AI 봇이다.
‘빌어먹을.’
그런데 동생한테도 저런 말을 듣다니. 대체 내 이미지는 어떻게 망가진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