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47)
로판 속 공무원 847화(848/945)
에리히가 형의 명치에 죽창을 꽂아 넣었어도 약속은 약속. 심지어 에리히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제수들, 조카들을 위한 약속이라면 더더욱 물릴 수 없다.
“여기야.”
그렇기에 에리히와 ‘성수 파견 협약’을 체결한 다음 날, 약속대로 성수 한 마리와 함께 에리히의 저택을 재방문했다.
열한 마리의 성수 중 가장 작고 아담한 겸손과 함께.
“이곳이 주인의 동생이 머무는 곳인가?”
“맞아. 그래도 우리 가문 명의의 저택이라 주인은 나니까, 어지럽히지 말고.”
“이 덩치로 어지럽혀봤자 얼마나 어지럽히겠나. 걱정하지 마라.”
내 손바닥 위에 올라타 있던 겸손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이 이 정도로 자신 있게 대답한 적이 있었던가.우리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어서 마냥 좋은 모양이다.
조금 복잡 미묘한 기분이다. 주기적으로 타일글레헨 백작령으로 파견도 보내주고, 2마리씩 짝도 지어서 제도 산책도 보내주는데 외출이라면 그저 좋아하다니. 누가 보면 내가 이 녀석들을 학대하는 줄 알겠어.
“이제 막 기어다니는 애 하나, 아직 요람에만 누워있는 애가 하나야. 여기서 지내는 게 편하지는 않을걸?”
그래서 괜히 겸손에게 위협적인 말을 내뱉었다.
한 명만 돌보면 됐던 타일글레헨 백작령과 달리 여기서는 둘이나 돌봐야 한다고.
“요람에 있는 애는 한창때 테레사 생각하면 될 거야.”
특히 둘 중 동생 쪽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고.
“주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허나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겸손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코웃음을 쳤다.
“테레사 같은 아이가 한 명 더 있을 리 없다. 그런 아이는 50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존재야. 어찌 제2의 테레사가 벌써 태어나겠나.”
‘이 새끼가.’
남의 여동생을 역병이나 재앙 취급하는 말이라 울컥했지만, 더욱 열받는 건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었다.
왜 말을 못 하니. 우리 여동생은 착하고 순한 아이라고, 네가 그렇게 취급해도 될 존재가 아니라고 왜 말을 못 해.
“…일단 인사부터 하러 가자. 당분간 자주 올 텐데 첫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첫인사는 무─ 아, 알았다 주인! 손에 힘 주지 마라! 주인이 힘 주면 아무리 나라도 무섭다!”
나도 모르게 겸손의 몸을 가볍게 쥐었다.
건방진 놈. 이 주인이 화제를 돌리려고 하면 순순히 따를 것이지, 비겁하게 팩트를 입에 담고 있어.
‘그동안 너무 편하게 대해줬나?’
내가 이 녀석들에게 혜택을 과도하게 준 것 같다. 게다가 성수들을 냅다 입에 물거나 쥐어짜듯 주물 거리던 우리 아이들도 조금씩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아주 어릴 때와 비교하면 나름 상냥하게 성수들과 놀고 있잖아.
그래, 분명 몸이 편해져서 정신이 나태해진 거다.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기강이 좀 잡혀야 할 텐데.’
에리히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는 에두아르트. 부디 우리 둘째 조카가 성수들의 느슨해진 기강에 강력한 긴장감을 줬으면 좋겠다.
아니, 좋겠다가 아니라 분명 그럴 거다. 나는 우리 조카를 믿는다. 나름 무인의 피를 이은 에리히를, 긴급 투입된 제노비아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조카의 저력을 믿어.
‘마침 이 녀석들도 하나씩 오기로 했지.’
만약 성수가 한 번에 여럿이 왔다? 그럼 여럿이서 조카 둘을 상대하는 것이다. 조금 힘들지라도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지.
그러나 한 번에 한 마리만 온다면 홀로 조카 둘을 감당해야 한다. 형인 로베르트가 얌전한 편이라도, 혼자서 3인분 이상의 저력을 선보이는 에두아르트를 감안하면 압도적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주인. 갑자기 왜 그렇게 보는 건가…?”
“아니, 그냥. 조카들하고 잘 놀아달라고.”
“무, 물론이다. 주인의 조카면 주인의 자식이나 마찬가지고, 주인의 자식이면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지.”
전직 악신, 현직 성수로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는지, 겸손은 갑자기 충성 맹세나 다름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눈치가 빠른 대처였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겸손을 비롯한 성수들의 운명은 내가 아니라 에두아르트 손에 달렸으니까.
***
에두아르트를 낳은 이후로 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마치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거동도 불편할 정도로 허약했던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다. 혹시 무엇보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보물을 얻은 대가로 다른 것을 내어준 게 아닐까 하고. 기껏 정상 수준으로 돌아간 육체가 도로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하고.
“몸이 약해지신 건 맞지만, 큰 고통을 겪어서 생긴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회복에 몰두하시면 다시 기력을 되찾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에두아르트가 건강하다고 진단한 의료진들은 내 회복도 확신했다.
그렇다면 안심할 수 있다. 우리 에두아르트를 완벽하게 진단한 유능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믿지 않는 건 에두아루트의 건강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니, 당연히 믿을 수밖에.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너도, 아이도 무사하니 얼마나 다행이니…!”
그리고 그건 나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나와 에두아르트가 무사하다는 진단에 어머니는 펑펑 눈물을 흘리셨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나를 걱정해 주신 시어머니도. 트리마라 가문에서 찾아온 가신들과 사용인들도.
그나마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지만, 딱 눈물만 보이지 않으셨다. 그게 귀족으로서 아버지가 지닌 마지막 자존심이었겠지.
“고마워, 세라. 정말 고생 많았어.”
물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에리히의 포옹이었다.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강하게 안지는 못했으나,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강렬했던 포옹이었지. 아직도 그 감촉을 잊을 수 없어.
“으에에엥…”
“에두아르트도 엄마한테 고맙─”
“으에에에에에에에엥!”
“좀 많이 고맙대.”
아니, 어쩌면 방이 떠나가라 울었던 에두아르트가 가장 인상적이지 않았을까? 정말 누구를 닮았는지, 성인이 되면 강인한 기사님이 될 것 같은 울음소리였으니까.
그렇게 에두아르트의 탄생을 모두가 축하하며, 내가 큰 탈 없이 출산을 마친 것에 모두가 안도하며 하루하루가 흘렀고,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직 찌뿌둥하기는 하지만 많이 괜찮아졌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주버님.”
에리히의 부탁을 받은 아주버님이 저택에 찾아오셨다.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홀로 에두아르트를 돌보는 에리히. 감사하게도 에두아르트는 너무 건강해서 에리히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로베르트를 돌봐야 하는 제노비아 언니까지 나서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 덕에 에리히는 아주버님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바로 시조카들을 상대로 그 능력을 확실하게 뽐낸 동물들. 그 동물들을 우리 저택에 보내 달라는 절박한 요청을.
“그, 아주버님. 그 아이가 에리히 부탁으로 온 건가요?”
아주버님 손에 올라간 병아리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비록 작고 아담한 크기지만, 에리히가 간절히 원하던 그 아이. 작지만 누구보다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할 아이.
“그래. 내가 온 거다.”
아주버님 대신 답한 병아리의 모습에 무심코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당연하지만 답답함이 아닌 안도의 한숨이었다. 이 아이가 왔으니 에리히와 제노비아 언니가 조금은 여유로워질 거라는 안도감이 솟구쳤으니까.
내가 멀쩡히 움직일 수 있으면 둘이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비록 외부의 도움이지만 그 공백을 채울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은 얘가 왔지만 매일매일 다른 애가 올 거야. 그래도 작은 애들부터 차례대로 보낼 테니 걱정하지는 말고.”
“작은 애들부터요?”
“로베르트도 이제 막 기어다니기 시작했잖아. 그런 애들 앞에 곰이나 말을 가져다주기는 좀.”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로베르트와 에두아르트에게 다짜고짜 커다란 동물들을 보여주는 건 곤란하지.
물론 시조카들은 그 커다란 동물들과 한 집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때는 성수들의 크기가 더 작았잖아.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는 건 옳지 않아.
“뭐, 크다고 해도 성체에 비하면 아직 작은 수준이기는 하지. 작은 애들에게 익숙해지면 큰 애들도 부담 없이 받아들일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주버님 저택에 갈 때마다 그 아이들이 시조카들이랑 얼마나 잘 놀아주는지 봤으니까요. 그런 애들이 우리 아이들을 돌봐주면 그보다 든든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말과 함께 아주버님 손 위에 있는 병아리를 쓰다듬었다.
이름이 겸손, 이라고 했었나? 이름부터 아이들과 함께 놀기에 딱인 이름이다. 뭔가 아이들에게 겸손의 미덕을 가르쳐 줄 것 같잖아.
“앞으로 잘 부탁해. 에두아르트가 조금 활발하기는 하지만, 전문가니까 잘 놀아줄 수 있지?”
“물론이다. 막 태어난 아기가 활발해봤자 거기서 거기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되는 아이들과 놀아줬다고 생각하는 건가.”
고개를 꼿꼿하게 치켜들고 날개를 활짝 펼치는 겸손.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엄청 거만했을 것 같은 모습에 쿡쿡 웃음이 나왔다.
“얘가 제 역할을 못 하는 것 같으면 바로 얘기해. 다른 애로 교체할 테니까.”
“네. 꼭 그럴게요.”
아주버님의 당부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겸손이 아무 말 없이 숨만 쉬고 있어도 로베르트랑 에두아르트는 좋아할 거다. 작은 병아리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데 어떻게 싫어하겠어.
“참, 그런데 에리히는?”
“에두아르트랑 같이 있어요.”
“거기부터 갔어야 했나.”
씁쓸함이 깃든 아주버님의 목소리에 민망함이 몰려왔다.
제발 내 몸이 빨리 회복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에두아르트를 돌보고, 에리히가 아주버님을 상대할 테니까.
***
부왕 전하의 호출을 받고 부왕 전하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 오거라, 류티스.”
“부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반겨주는 부왕 전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은 왕가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지라,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그때 하시는 부왕 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 중에 부르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긴히 할 말이 있어 불렀다. 괜히 결혼 준비로 바쁜 너를 귀찮게 한 건 아닌가 모르겠구나.”
“바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시종들과 시녀들의 노고지요.”
“그건 그렇다만.”
작게 웃으며 수염을 매만지신 부왕 전하께서는 나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셨다.
“셉터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으니 잘 알겠지. 읽어보거라.”
그 말씀에 빠르게 서류를 읽었다.
셉터. 우리 아르메인의 영역에서 발견된 트리카 제국의 셉터. 그 물건 때문에 부왕 전하께서 얼마나 골치를─
‘음?’
서류를 보자마자 눈을 의심했다.
[ 아르메인과 크펠로펜 간의 유물 양도 조약 ]제목부터 상당히 흥미로운 건 둘째 치고,
[ 아르메인이 해당 조약에 동의하여 트리카 제국의 셉터를 크펠로펜에 인계하는 대가로, 타일글레헨 백작은 아르메인의 요청에 따라 검묘에서 하늘을 가르기로 한다. ] [ 또한 그 외에도─ ]‘허어.’
고문 선생이 검묘에서 하늘을 가른다는, 상당히 매력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류티스.”
“예, 부왕 전하.”
“네 결혼식 날에 일어날 일이다. 이 아비의 선물이라 생각하거라.”
너무도 큰 선물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