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49)
로판 속 공무원 849화(850/945)
황제와의 대면이 끝난 후, 저택으로 돌아와 멍하니 정원을 바라봤다.
검묘에서 하늘 베기. 범부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안건이라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다. 역시 제국 황제와 대륙 2위 국가의 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이런 미친 안건을 잘도 체결하다니.
‘이게 맞는 건가.’
차를 연신 들이키며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을 다독였다. 차에는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던데, 내 인생에 차가 없었으면 몇 번이나 심장마비로 죽었을까.
아무튼 식도를 타고 흐르는 차의 온기를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와 아르메인 국왕의 농간으로 인해, 나는 아르메인 역사에 길이 남을 미치광이가 되게 생겼다. 어쩌면 아르메인의 뒤를 이을 미래의 국가도 기억할 미치광이가.
검묘에서 하늘을 베는 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메카의 검은 돌에서, 국립묘지에서, 일국의 왕궁이나 의회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늘을 베기는커녕 검자루에 손만 얹어도 현행범으로 체포될 만행이다.
“너무 염려하지는 말게. 짐이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니고 아르메인이 먼저 청한 것이니까. 당사자들이 원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나?”
정작 황제는 이 중요한 안건을 깜빡한 것에 민망해하면서도 걱정할 것 없다며 열심히 혓바닥을 놀렸다.
그때는 순간적으로 ‘그럼 황궁에서 먼저 하늘 베도 됩니까?’ 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아마 황실 인원이 황제만 있었으면 묻지도 않고 베었을 거다. 황후와 황태녀, 황자, 황녀, 상황까지. 황궁에 거주 중인 무고한 피해자들이 많아서 넘어간 거지.
“게다가 이전에도 말했듯, 아르메인 국왕 입장에서는 트리카의 셉터를 사실상 무상으로 넘기는 조약에 체결한 것일세. 그 조약에 대한 호의로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조약 체결 대가로 호의를 줬다면 무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는 게 어떻겠나. 안 그래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에 보주가 발견돼서 억울하다네. 어차피 발견될 보주라면 진즉에 나올 것이지. 그럼 셉터와 보주를 맞교환하는 형식으로 무난하게 진행했을 텐데.”
그리고 황제도 검묘에서 하늘 베기라는 빅-이벤트를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기색을 보였다.
이번 참사만큼은 황제가 주동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것. 철저히 국익에 따라 군주로서 결단을 내렸다는 것. 저 새끼 인성치고는 드물게 미안한 기색을 보인다는 것. 이 셋 중 하나만 빠졌어도 들이받았을 텐데, 삼위일체를 이루어서 봐주기로 했다.
“그보다 백작. 어차피 백작이 타국에서 하늘을 벤 게 처음도 아니지 않나.”
“아니, 그건─”
“발크로스에서 하늘을 벨 때였나? 백작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외무성이 급히 발크로스 외교부와 협의를 거쳤었지. 짐도 그때 발크로스 국왕과 대화를 나누며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어.”
사실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황제의 말처럼 내가 타국에서 하늘을 벤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도 열심히 글을 쓰고 있을 알렌을 위해, 리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알렌을 위해 냅다 하늘을 가르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때 일은 국익이 아닌 사익을 위한 행동이었다. 휴가 중인 제국 귀족이 타국에서 소란을 일으켰고, 외무성은 난데없이 고생을 했던 사건. 귀족의 개인적인 용건 때문에 제국 외무성이 타국 외교부와 협의를 봐야 했던 사건.
‘내가 먼저 선공을 날린 거였나.’
진실을 깨닫고 나니 씁쓸하다. 적어도 하늘 베기와 관련된 일로는 내가 황제에게 먼저 선공을 날린 거였다. 황제는 나한테 선공을 맞았고, 거의 1년 가까이 지난 후에야 반격을 한 거지.
그 반격조차 자의적 반격이 아닌 타의적 반격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만. 하여간 검에 미친 이웃이 옆에 있어서 그런가, 이런 기이한 일이 다 생기네.
‘이번에는 잠자코 따라야겠다.’
이미 황제에게 항의 아닌 항의를 한 순간부터 ‘잠자코’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머나, 그래도 아르메인에 가서는 군말 없이 검이나 휘두르자.
그래, 이건 나라의 일이다. 제국과 황제의 권위를 위한 셉터 수거. 그에 대한 연장선이나 마찬가지인 일이다. 내 사익을 위해서도 하늘을 베었는데 국익이라면 더더욱 베어야겠지.
‘망할.’
앞으로는 국경 밖에서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게 해도 되는 일인지 최소 세 번은 검토한 다음에 해야겠다.
휴가 중인 공무원은 공인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온 여행객. 그 무적의 책임 회피 방패 때문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친 짓을 저질렀어.
잊지 말자. 아무리 개인 자격이라도 결국 내가 짊어져야 할 업보라는 것을. 공무원 칼과 개인 칼은 결국 다를 바 없는 칼이라는 것을.
…
‘아니 그래도 시발.’
마음을 가라앉히려다 실패했다.
황제에 대한 분노는 이제 의미가 없으니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아르메인의 만행은 도저히 용납할 수도, 이해할 수 없다.
검에 환장한 국가니 하늘 베기를 보고 싶은 것? 그건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내가 아르메인에 갔는데 하늘 베기를 요청하지 않으면 그게 더 낯설었을 거다. 심지어하늘 베기를 류티스의 결혼식 때 해달라고 요구했더라도 납득했을 거다.
하지만 검묘라는 구체적 장소 요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국가적 성지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한때 잠재적 적국이었던 나라의 무인이 검을 휘두르다니…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제5제국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이제야 제5제국이 어쩌다 탄생한 건지 알 것 같았다.
대체 그런 미친 강성 매파가 왜 튀어나온 건가 했는데, 그냥 아르메인이라는 토양 자체가 호전적이고 또라이들이라 그런 거였어. 토양이 그 모양이니 씨앗 100개 중 하나만 이상하게 발아해도 그 모양이겠지.
‘제국인이라 다행이다.’
만약 크라시우스 가문이 제국이 아니라 아르메인의 귀족가였다면 둘 중 하나였을 거다.
내가 외눈박이들의 세상에서 돌아버리거나, 아니면 아르메인화가 완료돼서 다른 의미로 돌아버렸거나.
어느 쪽이든 끔찍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아.’
그렇게 씁쓸히 정원을 보다가 익숙한 형태가 보여 걸음을 옮겼다.
황태녀와 앙리에타, 헬렌. 우리 아이들의 누나이자 언니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세 자매가 왔다.
‘딱 좋게 왔네.’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착잡해지던 마음이 급속도로 평온해졌다. 역시 어른들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은 아이들로 치유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신분을 초월한 세 자매가 한자리에 모이면 우당탕탕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소란이 벌어지나,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
부왕께서 왕족들을 검묘로 부르셨다.
매년 건국일마다 왕실이 검묘로 모여 초대 국왕과 공신들, 그 뒤를 이은 영웅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나, 꼭 건국일이 아니더라도 검묘에 왕족이 모이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이 검묘는 아르메인의 자긍심이자 로벤스 왕가의 상징이기에. 왕족이라면 누구나 사랑해야 하고 익숙해야 할 장소이기에.
“다들 어서 오거라. 바쁠 텐데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검묘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잠시 숨 좀 돌릴 겸 오기에는 딱이지요.”
부왕의 말씀에 큰형님이 작게 웃으며 답하셨다.
하긴. 큰형님이나 둘째 형님은 부왕 전하의 부름이 없어도 종종 검묘에 와 산책을 하다가 돌아간다. 부왕께서 갑작스레 부르셨어도 별지장이 없을 터.
“전하. 하온데 어인 일로 저희를 찾으신 겁니까? 그것도 검묘에서요.”
누님의 말에 어머니와 남매들의 시선이 부왕 전하께 향했다.
그 침묵 어린 주목 속에서 나 홀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미 부왕께 사정을 들었으니까.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말해주고자 이리 불렀다. 왕실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지.”
“호오, 그거 참 황송한 말씀입니다.”
“류티스의 결혼식이 코앞인 상황에서 기쁜 소식이라. 경사가 연이어 찾아오는군요.”
큰형님과 둘째 형님의 반응에 부왕 전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나에게 시선을 돌리셨다.
“류티스의 결혼식과 관련된 일이다. 너희도 알겠지만 류티스는 제국 아카데미에서 타일글레헨 백작과 연을 쌓았지.”
“타일글레헨 백작하고만 쌓았습니까? 여기저기 많이 쌓았지요. 소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류티스는 외교부에 보내야 합니다.”
“류티스의 장래는 다음에 논하도록 하지. 아무튼 그 연으로 인해 타일글레헨 백작도 류티스의 결혼을 축하하러 올 예정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에게 가족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렇게 보면 조금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기는. 입이 귀에 걸렸다.”
큰형님의 지적에 머쓱히 입꼬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타일글레헨 백작이 아르메인에 입국하면, 검묘에서 하늘을 벨 예정이다.”
물론 부왕 전하께서 도로 주목을 끄셨기에 의미 없는 짓이었지만.
“…예?”
“예?”
“부, 부왕 전하. 지금 뭐라고─”
“이 검묘에서 하늘을 벨 예정이다.”
부왕 전하의 선언에 침묵이 맴돌았다.
이해한다. 나도 부왕 전하께 처음 저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기뻐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으니까.
“전하.”
“말하거라.”
길고 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큰형님이었다.
“타일글레헨 백작이… 대륙 제일 검이 검묘에서 하늘을 벤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류티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요?”
“순전히 축하만을 위한 건 아니다. 너도 알다시피 근래 제국과 작은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느냐. 그 대가로 얻은 것 중 하나다.”
“아.”
부왕 전하의 설명에 큰형님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활짝 웃으며 이 경사를 반겼다.
“선조들과 영웅들의 혼이 잠든 이곳에서 하늘을 베다니요! 아르메인의 후예로서 선조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의 아니겠습니까! 분명 이곳에 잠든 영혼들도 무의 끝을 보는 것에 기뻐할 겁니다!”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후예들이 직접 베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나, 그래도 대륙 제일 검을 초청한 것이라면 선조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있습니다!”
“역시 너희라면 바로 이해할 줄 알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라 다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큰형님과 둘째 형님의 말이 맞다. 기사왕국 아르메인의 무인으로서, 아르메인의 왕족으로서 검묘에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 그것은 무의 끝을 영혼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아니, 말도 안 되는 말씀 하지 마세요.”
누님이 다급히 입을 여셨지만 부왕 전하도, 큰형님도, 둘째 형님도 듣지 못한 듯 반응이 없으셨다.
“하늘을 베는 건 상관없어요! 그래도 검묘는 아닙니다! 어찌 아르메인의 심장과도 같은 곳에서 타국의 무인이 무력시위를─ 사람이 말하면 좀 들으세요!”
누님의 외침을 뒤로하고 검묘에 있는 검들 중 유독 깨끗한 검을 바라봤다.
고문 선생이 나에게 선물로 보내준 대검. 대륙 제일 검의 서명과 가르침이 담긴 귀중한 보물.
[ 예를 알기에 검을 메고, 의를 품었기에 검을 뽑으며, 충을 새기기 위해 검을 휘두르리라.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 ]대검에 적힌 글귀를 읽은 후, 살포시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고문 선생을 직접 본다고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