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53)
로판 속 공무원 853화(854/945)
황제의 연락 이후로 고심에 빠졌다.
일단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점은 황제의 부탁이 상황의 명령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황이 직접적으로 ‘티티와 새끼들을 보고 싶다.’ 라고 했으면 눈물을 머금고 움직여야겠지만, 황제의 부탁은 황제가 상황의 마음을 짐작한 것에 불과하니까.
그렇기에 부탁을 불이행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황제도 난해한 부탁이라고 했으니 내가 사양해도 아쉬워할 뿐, 서운함까지 느끼지는 않을 터.
다만 상황은 제국을 위해 약 30년이나 고생하고, 이제야 느긋한 은퇴 생활을 보내는 노인이다. 그런 노인이 소일거리 삼아 동물들을 기르고 있는데, 한때 기르던 동물이 새끼를 봤다? 이건 말로 표현하지만 않은 거지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도의적으로 보여주기는 해야 한다.’
30년 헌신의 대가가 개 하나 마음대로 보지 못하는 뒷방 늙은이 취급이면 너무하잖아. 그러니 후임 황제와 현직 제국백이 상황을 위해 작은 배려를 하는 것.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상황도 흡족해할 것이다.
사실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은 상황이 직접 루치아노의 저택으로 행차하는 거기는 하다. 그러면 티티도 상황을 반길 테고, 상황은 새끼들을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 방법을 택하면 루치아노는 확실하게 죽는다. 아마 선 채로 죽을 거야.
‘결국 어떻게든 통신구로 해결해야 하는데.’
통신구를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황제에게는 생각 좀 해보겠다는 대답을 한 후, 몇 시간이나 멀뚱히 서서 티티를 살폈다.
아이들의 손길에는 그저 해맑게 웃으며 꼬리를 흔들던 티티. 아이들이 인절미들을 만지작거리면, 자기 새끼들 귀엽지 않냐고 묻는 것처럼 온화하게 짖던 티티.
멀리서 보면 희극도 그런 희극이 없다. 우리 아이들이라면 절대 자기 새끼들을 해하지 않을 거라는 굳은 믿음 덕분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이다.
‘내가 거기 끼지 못하는 게 문제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희극은 비극으로 돌변한다. 해맑은 티티는 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할 테고, 새끼들을 자랑하며 내보이는 게 아니라 몸으로 숨겨 지키려고 할 것이다.
물론 똑똑하고 착한 티티니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봐줄 수도 있으나, 적어도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 부탁할 일은 아니다. 아빠가 티티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아이들이 얼마나 어색해할까. 괜히 아이들의 흥을 깨버리는 꼴이다.
심지어 사과를 한다고 바로 용서해 준다는 보장도 없다. 막 태어난 새끼들과 이산가족이 될 뻔한 원한. 그런 원한이 어찌 금방 풀리겠나.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티티에게 원만히 접근할 수 있고, 상황의 은근한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을 쓴다.’
상황을 어렵게 여기는 내가 아닌, 티티에게 경계 대상 1호로 지목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투입한다.
뭔가 남한테 짬 때리는 기분이지만 어쩌겠어. 시도조차 못 하는 것보다는 남한테 맡기는 것이 낫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역-짬을 때려버리는 기적의 광경이 펼쳐졌다.
“할부지! 바바! 얘가 띠띠 새끼야!”
아무리 대부라지만 일개 귀족이 황태녀─ 차기 황제에게 자신의 일을 떠넘긴 상황. 황제가 보면 실소를 흘릴 일이지만 이게 내 최선이었다. 이게 상황과 티티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야.
“엄쳥 기엽찌! 아직 눈도 못떠! 때부가 그러는대, 열밤은 더 자야 뜰꺼래!”
그리고 황태녀도 대부의 하극상스러운 역짬에 기꺼이 동참해 주지 않았나.
다행히 황태녀와 상황의 관계는 그럭저럭 양호한 편이다. 황태녀가 기억하는 상황은 철혈의 군주가 아니라 조용한 할아버지고, 상황 입장에서도 황태녀는 리브노만과 크펠로펜의 굳건함을 상징하듯 태어난 보물이니까. 게다가 상황은 더 이상 제국과 황실의 주인이 아니니, 황태녀를 차기 계승자가 아니라 평범한 손녀처럼 여길 것이다.
덕분에 황태녀는 활기찬 목소리로 중계를 이어나갔다. 애교 많은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재롱을 부리는 것처럼.
“우웅? 때부는 어딧냐구? 몰라! 어재도 안보엿서! 바쁜가바!”
‘아.’
그 와중에 황태녀의 해맑은 대답에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거리가 멀어서 상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황태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잘 들리기에 대충 대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상황은 황태녀만 두고 사라진 대부의 행방에 의문을 가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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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당한 의문이지만 착잡할 따름이다. 이제 상황의 머릿속에서 나는 직무를 유기한 대부로 기억되겠지.
“그래두 핼랜이랑 뻬디랑 동생들 잔뜩 잇스니 갠차나! 때부도 친구랑 놀고잇껬찌! …으에? 때부는 친구업서…?”
‘뭣.’
황태녀의 말에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뭔데. 대체 상황이 무슨 말을 했길래 친구 없냐는 말이 황태녀 입에서 나온 건데.
“아빠랑 할부지도 친구 업서…?”
그 말까지 들었을 때는 어느새 내 발이 황태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 난입을 눈치챈 티티가 기겁을 하며 새끼들 앞에 섰지만, 지금은 티티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조차 없었다.
“저, 전하!”
“아, 때부!”
“소신에게 주십시오! 소신이 상황 폐하를 모시겠습니다!”
“웅! 여기!”
통신구 너머의 상대에게 모신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는지 의문이나,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상황 폐하 만세!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의 단원! 타일글레헨과 위리디아의 백작이며, 그 외 무수히 많은 영지의 관리를 허락받은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 상황 폐하를 뵙나이다!”
– 오랜만에 보는군, 백작.
내 다급한 인사에 통신구 너머의 상황은 덤덤히 입을 열었다.
– 황태녀는 백작이 자리를 비웠다고 했으나, 역시 황태녀의 곁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군. 백작 덕분에 황태녀가 황궁을 떠나 있음에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백작에게는 늘 고마울 따름이다.
“실로 황송한 말씀이옵니다, 폐하.”
– 또한 백작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분에 그 작았던 개가 새끼까지 보게 되었다. 백작을 믿고 맡긴 보람이 있어 흡족할 뿐이다.
“그 또한 소신에게는 과분한 말씀이옵니다…”
상황의 말에 연신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안도했다.
황태녀의 ‘할부지 친구 없어?’ 발언에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으니까. 실제로 상황과 황제에게는 친구라고 부를 존재가 없겠다만, 손녀에게 팩트로 두들겨 맞는 건 썩 좋은 경험이 아니겠지.
– 끼이잉…
아무튼 내가 통신구를 붙잡고 쩔쩔매자, 경계 태세에 돌입했던 티티가 자세를 풀고 내 바지를 살며시 물었다.
마치 힘내라고 위로하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고맙다…’
자식을 빼돌리려던 못난 주인조차 걱정해주다니. 어디서 이런 순하고 착한 녀석이 태어났을까.
상황의 거처에서 티티와 마주친 것은 인생의 몇 안 되는 행운이었다. 지금의 가족들을 만난 것 바로 다음가는 행운이었어.
***
황태녀와 시작했던 대화는 백작과 마무리하게 되었다.
예정에 없던 대화였지만 상관없다. 그저 황태녀의 조부로서 황태녀의 대부인 백작에게 정중한 덕담과 감사를 표하면 그만이었으니. 나는 더 이상 백작을 다루어야 할 군주가 아니니.
‘새끼라.’
그렇게 통신구를 탁자에 내려놓은 후, 슬쩍 수염을 매만졌다.
내가 황궁 한구석에서 가축을 기른다고 하니 전대 로드께서 보낸 강아지 다섯 마리. 그중 백작에게 큰 관심을 보여서 백작에게 맡긴 한 마리. 그 한 마리가 어느덧 무럭무럭 자라더니 자신의 짝을 찾고, 14마리나 되는 새끼들을 보게 됐다.
조금 복잡하고도 미묘한 기분이다. 언젠가 다시 셀레덴을 보게 되면 평민 부부로서 평온하게 살아가자고, 그것을 위해 농사나 축산에 대해 익혀두자고 다짐한 것이 엊그제 같았다.
헌데 그 다짐과 함께 돌보기 시작했던 강아지들이 건장한 성견으로 성장하고, 그중 하나는 새끼까지 보았다. 나 홀로 한 다짐도 어느덧 몇 년 전의 일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이야.’
닭들이 모이를 쪼고 있는, 오리가 지나가는, 백담비들이 산책을 하는 마당을 바라봤다.
사실 내 명은 진즉에 끝나야 했다. 황제로 군림한 30년의 생활 동안 내 모든 걸 불태웠고, 진즉에 사라졌어야 할 혼을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
그저 이대로 쓰러질 수 없다는 고집 때문에. 기껏 부흥한 제국이 다시 무너지는 걸 볼 수 없다는 집념 때문에 버티고 버텼다. 몸이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서도 황태녀─ 아니, 황태손의 탄생과 황태자에게 양위하는 그 순간까지 버텼다.
그 이후로는 모든 긴장이 풀렸다. 셀레덴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새로운 첫인사를 하러 갈 것이라 생각했다. 정작 결과는 이렇게 되었지만.
‘오히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가.’
모든 짐을 내려놓았기에 비명을 지르던 육체가 스멀스멀 회복된 것일 수도 있다.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기에 정신이 맑아진 것일 수 있다.
이러면 황제라는 자리가 사람을 죽이는 자리처럼 느껴지나, 지금의 황제와 미래의 황제는 괜찮을 것이다. 그 둘은 나처럼 피눈물을 흘리며… 아니, 피눈물조차 숨겨가며 나아갈 필요가 없으니. 강대한 제국과 충성스러운 신민, 고개 숙인 대륙의 열국들이 있으니.
“아빠랑 할부지도 친구 업서…?”
그러다 문득 황태녀의 말이 떠올랐다.
친구, 친구라. 나에게 친구라고 할 존재가 있을까.
‘그나마 하나 있기는 하지.’
정확히는 친구가 아니라 형과 동생의 관계였으나, 약간의 나이 차이는 친구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겠나.
그래, 오랜만에 친구나 보자. 궁내성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유유자적 지내고 있다고 하니, 이곳으로 초대해서 술잔이나 기울이자.
그리고 이왕 안트라흐 남작을 부르는 것이라면 아우스엔 시장도 부르자. 그 둘은 내가 막 황제가 되었을 때부터 나를 지지해 준 소중한 충신들이었으니.
‘백작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백작이 내가 보낸 개를, 티티라고 이름 붙은 녀석을 잘 돌봐준 덕에 새끼를 보았다. 그 덕에 황태녀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던 친구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로 인해 안트라흐 남작, 아우스엔 시장과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으니 고마워해야겠지. 이 일이 아니었다면 언제 만났을지 장담할 수 없다.
***
“우리 티티 닮아서 귀엽네.”
– 멍!
“잘 보니까 제니도 닮은 것 같다.”
– 멍멍!
내 말에 헥헥거리며 기뻐하는 티티. 그런 티티를 쓰다듬어주며 인절미들을 바라봤다.
성공했다. 마침내 티티와 화해를 하게 됐다. 상황에게 연신 굽신거리던 주인의 모습이 티티의 동정심을 자극한 모양이다.
고맙습니다, 상황. 당분간 하루 세 번 황궁 방향으로 절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