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57)
로판 속 공무원 857화(858/945)
길고 긴 세월 동안 황실과 제국, 군부를 위해 헌신했던 전승공의 마지막(이라고 본인만 생각하는) 프로젝트.
무려 새로운 교육 기관을, 그것도 기존의 종합 교육 기관이 아닌 군사 목적의 교육 기관을 만들겠다는 어마어마한 야망.
솔직히 전승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꿈꾸었다면 일단 말렸겠지만, 전승공이 열정을 가지고 추진한다면 가능성이 그럭저럭 보이기는 한다. 전승공이 가진 권위와 업적, 황제의 적극적 지지가 포함되면 최악의 경우에도 ‘제국 아카데미 군사학부’ 같은 건 생기겠지.
사관학교 개교에 비하면 아쉬운 결과이나 그것만으로도 전승공 입장에서는 그럭저럭 만족할 성과 아닐까 싶다. 첫술에 배가 부르면 좋겠지만, 그건 천운이 따라야 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전승공도 알 테니.
그러니 사관학교는 전승공과 교육성 장관, 전쟁성 장관이 알아서 만들게 두고, 나는 전승공의 은퇴를 만류할 명분을 생각 중이었는데─
“전승공 각하께서 교사가 될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시더구나.”
“예?”
아버지가 잠시 얼굴이나 보자고 해서 찾아간 호수.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낚시를 하던 중,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교사요?”
“그래. 군인을 육성하기 위한 아카데미를 만들 생각이니, 내가 교사를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하셨다.”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전승공이 사관학교에 진심인 건 알았지만, 설마 공사 부지도 정해지지 않은 판국에 교사진부터 꾸릴 줄은 몰랐다.
‘작정했구나.’
확실하다. 사관학교 건립이 대차게 꼬이면 하블렘 공작령에 작은 교육기관이 생길 거다. 아카데미나 사관학교라는 이름이 붙기는 어렵더라도, 제국 최초이자 유일한 군사 교육 기관이 화려하게 막을 열 것이다. 그것도 국립이 아닌 사립으로.
물론 아무리 공작이라도 일개 귀족이 교육 기관을, 그것도 군사 관련 기관을 운영하는 건 심각한 문제다. 전승공도 그걸 알기에 겉으로는 ‘군사학에 대해 논하는 열정적이고 충성심 넘치는 청년들의 모임’ 정도로 꾸미겠지.
다만 이게 전승공과 현 황제의 치세, 에발트 공자와 황태녀의 치세까지는 괜찮더라도 그 이후가 문제다. 가족도 대를 거듭하면 남이 되는 법이잖아. 혈연적으로 타인이 된 공작이 군사 교육 기관을 가지고 있다? 이거 황실 입장에서는 미치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우려하는 문제를 전승공이 모를 리가 없고, 전승공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미래를 팔아먹을 사람이 아닌데.
“아무래도 각하께서는 미래의 군인들에게 홍보도 할 겸, 지지를 호소하고 계신 것 같다.”
난해하기 짝이 없던 의문은 아버지가 풀어주셨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다만, 그래도 이 아비가 군부에서는 나름 입지를 다졌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퇴직자들에게도 연락을 하시는 것 같으니, 군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원로들이 교사가 되는 것이지.”
“각하께서 미래를 위해 큰 선물을 준비 중이시군요.”
“네 말대로다. 미래를 위하여 얼굴도 보기 힘들 원로들을 한자리에, 그것도 교육을 위해 모으시는 거다.”
군부 원로들의 집결. 군부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전쟁에 참전까지 하여 공훈도 쌓은 명장들의 교육.
그제야 전승공의 기행 아닌 기행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아버지 말씀처럼 홍보이자 지지 호소가 맞다.
“군부에 뜻이 있는 아이들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부모에게 부탁하여 어떻게든 군부 쪽 인맥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아니면 아카데미에서 뜻이 맞는 또래끼리 머리를 맞대거나. 어느 쪽이든 쉬운 방법은 아니지 않느냐.”
“그런 상황에서 인맥을 활용해야 겨우 얼굴이나 볼 원로의 가르침을 매일, 그것도 여럿에게서 받을 수 있다면…”
“누구보다 각하의 뜻을 지지하고 반길 터. 단순히 전승공 각하의 소망이 아니라 귀족들의 광범위한 지지도 포함된다면 일이 수월해질 수밖에 없다.”
명확한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인맥과 재력을 쏟아부어야 겨우 얼굴이나 볼 수 있는, 그것도 가르침 한두 번이나 받으면 기적인 인물들에게서 3년에서 4년 동안 지식을 전수받을 수 있다. 이런 군침 도는 환경을 사양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비유하자면 헨델,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을 음악 대학에서 보는 것이고, 폰 노이만이나 아인슈타인을 공대에서 보는 기분이겠지. 군인의 길에 조금이라도 뜻이 있다면 개처럼 달려가 사관학교의 문을 두드릴 게 뻔히 보인다.
“이거 참. 은퇴하신 것이 고작 몇 년 전 일인데, 이러다 교장 자리 맡으시는 거 아닙니까?”
“교장이라니. 나에게는 너무 과분한 자리다. 교사직을 제안받은 것으로도 부끄러울 따름이야.”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금 전에 ‘이 아비가 군부에서는 나름 입지를 다졌었다.’ 라고 말씀하셨으면서.
게다가 아버지는 단순히 추억 미화나 과장으로 입지를 언급하신 게 아니라, 실제로 군부에서 적지 않은 존재감을 풍기셨다. 명문 무가 크라시우스의 가주니 존재감이 더 약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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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크라시우스 가문의 직계라는 점에서 남들보다 유리한 시작이고, 군부에 있었을 당시 동료와 부하들에게 인망도 좋았으며, 두 차례 북방 전쟁에서 공도 세우셨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상사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은 내 조부되는 분의 전우였으니, 상사들에게 평가도 좋았다.
그야말로 모든 걸 갖춘 완전체. 아버지가 제국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기 위해 군부에서 나오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방면군 사령관이나 총사령부 핵심 참모직은 맡으셨을 거다. 상황이 아버지를 원수로 임명한 걸 보면 상황조차 인정한 명장이라는 말.
‘어쩌면 차기 부사령관 후보셨을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아버지는 부사령관, 장남은 장관, 차남은 제국의회 의원이라. 우리 가문이지만 적폐도 이런 적폐가 없어.
크라시우스 가문이 제국백 가문이라는 게, 아버지가 가주셨다는 게 이처럼 다행일 수가 없다.
“아무튼 교직이라는 형태로 다시 관료가 될 줄은 몰랐다만, 전승공 각하께서 미래를 위해 힘을 쓰시는 것 아니냐. 그분보다 젊은 내가 영지에서 놀고만 있을 수는 없지.”
“이미 아버지는 헌신과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거절하셔도 각하께서 납득하실 겁니다만.”
“만약 다른 사람이 부탁한 거라면 나도 거절했을 거다. 허나 반평생 군부를 위해 헌신하신 각하의 요청 아니더냐.”
전승공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 없다. 참으로 간단하고 명확한 이유라 바로 납득했다.
나도 다른 사람이 사관학교 개교를 운운했다면 말렸을 거라 생각한 것처럼, 아버지도 전승공의 권유에 차마 손을 내저을 수 없던 거다. 그것이 공작과 제국백의 격차 때문이든, 무인으로서 전승공을 향한 존경과 경외이든, 나와 전승공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든─ 어느 쪽이든 전승공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
“…그리고 테레사가 오빠들은 밖에 있는데, 아빠는 왜 집에만 있냐고 하더구나.”
“아.”
씁쓸함이 감도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물론 테레사는 자주 볼 수 없는 오빠들에 비해 아빠는 매일 볼 수 있어서 기쁘다는 뜻이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딸에게 백수라고 지적 당한 느낌이었지 않겠나.
그러니 아버지가 재취업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소중한 늦둥이 외동딸에게 ‘아빠 백수야?’ 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아빠는 없다.
‘내 미래인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조만간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서 ‘아빠는 왜 집에만 있어?’ 같은 말을 듣는 거 아닌가?
정말 그런 참사가 일어나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다. 너무 끔찍한 미래라 감히 대처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전승공의 두근두근 사관학교 개교 야망은 제국 전체의 핫-이슈가 되었다.
그 와중에 사관학교 개교가 전승공의 자칭 라스트 댄스라는 말은 쏙 빠져 있었다. 전승공이 자신의 퇴직 결심을 동네방네 퍼뜨리지 않은 것도 있으나, 황제가 이 악물고 통제 중이기도 하겠지. 괜히 전승공의 부사령관 퇴직이 공론화되면 골치 아파지니까.
‘퇴직 소식이 들리자마자 다시 싸울 게 뻔해.’
전승공이라는 억제기 덕분에 잠잠한 지휘관들과 참모들의 대립. 만약 전승공이 레임덕에 돌입하면 당연히 잠잠했던 대립도 고개를 들 거다. 그건 제국과 제국군을 위해서라도 안 될 일이다.
그렇기에 내 귀에 사관학교에 대한 추가적인 소식이 들려도, 간혹 통신구를 통해 다른 귀족들의 연락이 날아와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만 끄덕였다. 괜히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다가 ‘전승공이 퇴직을 염두에 두고 있더라.’ 라는 말이 나오면 제국이 불타오를 테니.
헌데 그 무념무상 메타가 잠깐 흔들리고 말았다.
“플로렌스가 교사 자리를 노리고 있다.”
오랜만에 점심시간을 틈타 우리 저택에 방문한 재무성 장관.
격렬하게 반겨주는 아이들을 한 번씩 쓰다듬어준 장관은 접견실에 들어가자마자 털썩 자리에 앉더니,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플로렌스?’
장관의 말에 잠시 머리를 굴렸다. 플로렌스, 플로렌스가 누구였더라.
‘아.’
허나 고민은 짧았다. 직책이 아니라 이름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나와 장관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 실제로 플로렌스는 내 기억에 있는 것을 넘어, 약 2년 동안 함께 지낸 사람이다.
중부 방면군 사령관 플로렌스 로티드 오브 헬론. 과거 대토벌 전쟁 당시에 카간에게 부상을 입혔던 영웅 중 하나이자, 그 공을 인정받아 방면군 사령관까지 승진한 참전 용사. 계승권과 거리가 먼 평범한 백작가의 귀족에서 계승 남작위(영지 첨부)까지 손에 넣은 인물.
그 인물이 교사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설마 제국 아카데미 교사를 말하는 건 아닐 테니, 당연히 사관학교를 말하는 것일 터.
“아니, 개교는커녕 공사 부지도 안 정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은퇴했다면 모를까, 현직 사령관이 무슨.”
“어차피 중부 방면군 사령관이면 승진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물러나고 싶다더군. 느긋하게 후학이나 가르치면서 말이야.”
“느긋이요?”
느긋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 아니었나?
“들리는 얘기로는 교사 자리를 노리는 것들이 제법 있다. 승진에 미련도 없고, 군인 생활도 질린 것들 위주다만… 원래 그런 것들이 제일 무서운 법이지.”
장관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인간들은 보통 고이고 고인 썩은물들이니까.
“아무튼 너와 전승공 각하의 관계가 각별한 건 군부에서 유명하니, 슬슬 너한테도 연락이 갈 거다. 미리 알아둬라.”
장관의 진심 가득한 경고에 쓴웃음을 지었다.
당분간 통신구에 불이 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