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6)
제국 행정부서 중 당당히 서열 1위를 차지하는 것은 궁내성이다. 다른 것도 아닌 황실의 업무를 담당하고 비서 노릇을 하는 부서인데 1위가 아니면 그게 더 이상하지.
오히려 황제가 다른 부서를 1위로 올린다고 하면 다 같이 황궁으로 몰려가 제발 황명을 거두어 달라고 대가리를 박아야 한다. 궁내성의 위상은 곧 황실의 권위와도 직결된 문제이니 충성심 테스트를 위한 쇼니까.
그리고 그런 위상과 권한을 자랑하는 궁내성이기에 궁내성 소속이 아닌 사람은 궁내성 청사에 가는 걸 몹시 꺼려한다. 황제는 좋은 일이 있으면 친히 치하하나, 나쁜 일이라면 궁내성을 통해 신명나게 패는 타입이라.
‘와버렸네.’
하지만 그 궁내성에 오고 말았다. 물론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두들겨 맞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건 다행이지만, 딱 최악만 피한 상황이다. 난 이제 황제 아래의 만인지상들에게 조리돌림 당할 예정이다.
슬쩍 청사 주변을 둘러보니 휘황찬란한 마차들이 여럿 있었다. 각 부서의 장관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 그런데 숫자가 심상치 않은데. 설마 내가 제일 늦은 건가?
‘망할.’
엉덩이 무거운 양반들이지만 황태자가 엮인 문제라 그런지 빠르게 움직였다. 그래도 회의 시간까지 30분은 더 남았는데 벌써 모일 줄은 몰랐지.
급하게 청사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 하나가 붙었다.
“모시겠습니다.”
“전부 모이셨나?”
“황태자 전하께선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황태자보다 늦은 신하보다는 장관보다 늦은 부장이라 낙인 찍히는 게 낫다.
“이곳입니다.”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대회의실이었다. 고작 10명 조금 넘는 인원이 모이는 장소치고는 거대한 공간.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이는 한 명 한 명의 직함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대회의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제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최약체로 전락한다.
-똑똑
“감찰부장입니다.”
“들어오게.”
궁내성 장관의 대답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꽂히는 아홉 쌍의 시선.
평범하게 반기는 눈빛, 아무 감흥도 없는 눈빛, 언짢은 눈빛, 피곤에 찌든 눈빛. 가지각색의 눈빛으로 반기는 높으신 분들 덕에 벌써부터 정신이 아찔하다.
“감찰부장 왔는가.”
주름이 가득한 백발의 노인이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제도 아우스엔의 시장직을 맡은 제국 정계의 원로.
“파견 중이라 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오기는 왔군.”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어찌 빠지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오지 않기에 불참인 줄 알았네.”
작게 코웃음을 친 시장의 눈에는 언짢음이 가득했다. 평생을 황실의 수족으로 정계에서 구르다가 말년을 편하게 보내라는 의미로 시장직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자리에 끌려 나왔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겠지.
“하하, 감찰부장이 가장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까? 감찰부장 나름대로 서둘러서 온 것일 겁니다.”
외무성 장관의 옹호에 시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도 그저 언짢음에 싫은 소리를 낸 정도지 정말 탓하려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내 그걸 생각지 못했군. 실례했소, 감찰부장.”
“괜찮습니다.”
시장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자는 건가? 죄송합니다 어르신.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이런 자리에 오게 만들고.
“서있지 말고 앉게나.”
“아, 예.”
원로의 투정을 가만히 보던 궁내성 장관의 손짓에 가장 끝자리에 착석했다. 옆에 앉은 국토성 장관에게 인사를 하자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다.
“그래, 감찰부장. 아카데미 생활은 어땠나.”
회의 시작까지 약 30분. 황태자는 칼같이 시간을 맞춰 올 테니 열 명이나 되는 인원이 말없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 어색함을 깨기 위함인지, 아니면 외부 인사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함인지 외무성 장관이 침묵을 깼다.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흥미로운 말이로군.”
“미취학이던 놈이잖습니까. 보지 못한 걸 봤을 테니 잊을 수 없었겠지요.”
“푸흐으─”
시큰둥하게 말하는 장관의 말에 내무성 장관이 웃음을 터뜨렸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본인은 아닌 척 하지만 분명 그 목소리는 내무성 장관이었다.
“이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가볍게 웃음을 짓는 외무성 장관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아팠다. 그렇게 생각하기는 뭘 그렇게 생각해.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래도 두 장관에게 제동을 거는 아름다운 양심도 있었다.
“배움이 짧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아니네. 더 개새끼였네.
사법성 장관의 말에 내무성 장관은 어깨까지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회의가 열린 것에 내 지분이 적지 않기에 조용히 입만 다물고 있었다. 책임은 물을 수 없지만 아무튼 내가 회의의 계기는 맞으니까.
‘개새끼들.’
그렇지 않아도 늘 업무에 치이며 재미없고 힘겨운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합법적으로 누군가를 놀리며 조리돌림 할 수 있는 기회를 귀신같이 놓치지 않고 활용하는 게 놀라울 정도다.
그리고 30분 후, 대회의실의 문이 열리자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인원이 전부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누가 들어왔는지는 뻔하니까.
“괜찮으니 전부 앉게.”
장관들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손을 휘저으며 상석에 앉은 황태자. 인사를 스킵한 황태자의 모습에 장관들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다들 업무로 바쁠 텐데 이리 불러서 미안하네. 예상 못 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이 역시 제국을 위한 일인데 어찌 바쁨을 논하겠습니까.”
“궁내성 장관의 충정에는 언제나 흡족할 따름일세.”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가 무언가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셋이라고 했나?”
“예. 류티스 로벤스 왕자, 라테르 오스티아 왕자, 타니안 에네스입니다.”
“아인테르가 훌륭한 친구들을 사귀었군.”
황태자가 웃음을 흘리며 한 말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 앉았다. 그 아인테르의 동복형을 지워버린 사람이 입에 담기에는 소름 끼치는 말이니까.
“감찰부장.”
“예, 전하.”
“아인테르는 잘 지내는가?”
“학업에는 충실하나 몸을 움직이는 것은 꺼려해 우려스럽습니다.”
“저런. 평소에 움직이지 않으면 둔해질 텐데.”
그 말이면 충분했다. ‘네가 황궁에 두고 감시하던 때와 같이 이상한 짓은 안 한다.’ 라는 의미의 대답에 황태자는 만족한 듯 대화를 끝냈다. 사실 아인테르는 이번 사태에 대해 결백하고, 나보다 더한 피해자다.
애초에 제도에 사는 녀석이라 방학이 되면 당연히 제도에 가는 입장인데 갑자기 타국 왕자인 것들도 제도로 온다네? 다른 지역으로 놀러 가는 정도는 동아리 활동이라고 우길 수 있지, 다 같이 제도로 가는 건 황태자에게 썩시딩 유 브라더를 시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덕분에 요즘 아인테르의 말이 급격하게 줄었다. 그렇다고 제도 여행을 반대하려면 황태자의 용작두 상태를 말해야 하는데, 황실의 치부를 외부인에게 말할 수도 없고. 안타까운 일이다.
“자네들을 앞에 두고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했군. 실례했네.”
“전하께옵서 보이신 3황자 전하를 향한 애정이 뭇 백성들에게도 향함을 아는데 어찌 실례라 하십니까.”
‘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 정도 혓바닥은 가져야 궁내성에서 장관 노릇 하는구나.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저런 말이 나오지. 역시 행정부와 황실을 잇는 사람이라 그런지 언변이 범상치 않다.
“잡담이 길었군. 자, 시작하지.”
덕분에 황태자도 흡족한지 개회를 선언했다.
대략적인 틀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세세한 사안은 장관들이 부서로 돌아가 실무진에게 던져주면 될 일. 장관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터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자리에서는 각 부서에서 맡아야 하는 업무와 대략적인 규모를 조정했다. 호위군과 군악대가 제도에 진입해야 하는데 제도 도로가 먹통이면 곤란하고, 부원들이 오는 길을 꾸미려는데 예산이 부족해도 문제니까. 이럴 때 서로 합을 맞춰야 그런 귀찮은 일이 없다.
“저희 부서 업무가 아닌 것 같군요.”
“그건 제가 아니라 내무성 장관이 알 겁니다.”
“이건 전쟁성이 할 일 아닙니까?”
지금도 듣기만 해도 귀찮아지는 말이 오고 가지 않나.
아무튼 각 부서의 장관, 제도 시장이 머리를 맞대며 황태자에게 보고하는 동안 내가 하는 일은 딱 하나였다.
‘여기서 다시 갈라지네.’
테이블 무늬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니, 뭐. 내가 장관도 아니고 일개 부장인데 무슨 발언권이 있겠나. 애초에 내 직속 상관이 직접 다른 장관들과 예산을 둔 아가리 파이팅을 하고 있는데.
게다가 외부 인사 의전에 감찰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없다. 이 자리에 내가 끌려온 것도 회의 때 의견을 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발점이니 자리나 지키라는 의미였으니.
‘아이 엠 그루트…’
나는 그저 위에서 오라고 하니까 달려온 공무원에 불과하다.
“헌데 계속 아카데미에 머무는 겁니까?”
계속 테이블 무늬를 보다가 아카데미라는 단어가 들리자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내무성 장관이 골치 아프다는 듯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방학이라 필연적으로 호위 병력이 줄 텐데, 아카데미에 머물게 하는 것이 맞나 싶군요.”
“그도 그렇군요. 그만큼 지켜야 할 인원도 줄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내무성 장관의 우려를 전쟁성 장관이 받았다. 당연히 귀국할 줄 알았던 인사들이 아카데미에 남아버리면서 방학 기간 동안 아카데미를 호위할 전력을 다시 손 봐야 하는 상황이다. 전쟁성 장관 입장에서는 귀찮으면서도 불안한 일이겠지.
“아카데미에 머물 필요는 없지.”
전쟁성 장관이 호위 전력 개편을 주제로 꺼내려 하자 황태자가 다른 말을 꺼냈다.
“어차피 제도로 온다면 방학 중에는 제도에 머무는 것이 낫지 않겠나?”
난데없는 제도 발언에 안경 너머로 보이는 시장의 동공이 잠시 떨렸다.
“치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동할 때도 제도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쓰는 게 편할 테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시장의 눈치를 보던 궁내성 장관이 결국 황태자의 의견을 지지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방학 시즌이라 호위 전력이 준 아카데미 기숙사보다는 제도에 머무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외국 놈들의 명분인 제국 여행 측면에서도 텔레포트 마법진 없는 아카데미보다 어지간한 대도시와 전부 연결된 제도가 훨씬 편하고.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귀빈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네. 제도에 올 때야 주인 된 입장에서 맞이해야 하지만, 여행을 즐긴다는 손님을 깊은 곳에 두는 건 서로 번거로운 일이지.”
황궁에는 귀빈을 맞이하는 방도 존재한다. 그 중 몇 개를 마련하겠다는 궁내성 장관의 말에 황태자는 고개를 젓더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찰부장. 자네가 귀빈들이 속한 동아리의 고문이었지.”
“예, 예. 그렇습니다.”
뭔데, 무슨 말을 하려고.
“내 기억으로는 제도에 크라시우스 백작가의 저택뿐만 아니라 감찰부장 개인 저택도 있는 걸로 아는데.”
“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무래도 귀빈들 입장에서도 황궁보다는 친근한 감찰부장의 저택이 낫지 않겠나.”
지랄은 거기까지다 황태자.
아니 진짜 무슨 개소리야. 아무리 로판이 원작인 세계여도 이건 선 넘었지. 왕족을 왜 내 집에다가 둬?
“과연 명안이십니다.”
궁내성 장관의 말에 치가 떨렸다. 뭐가 명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