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61)
로판 속 공무원 861화(862/945)
아버지의 호출에 이어 어머니의 방문이 이어졌다.
“할무니!”
“할머니이이이~”
“다들 잘 지냈니? 자, 초콜릿도 몇 개 사 왔으니 나눠 먹고 있으렴.”
“우아! 할무니 채고!”
할머니가 등장하자 우르르 달려가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아주며 인사하는 어머니.
덕분에 저택 정문은 순식간에 만남의 광장이 되었고,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어머니는 주머니에 있던 초콜릿을 하나씩 분배하셨다.
분명 방금 전에 나눠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나. 직접 분배를 하실 거면 나눠 먹으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얘들아. 할머니 귀찮게 하지 말고 방에서 놀자.”
“우웅… 할머니도 가치 놀면 안대?”
“할머니는 이따 갈 테니 먼저 놀고 있으렴.”
“웅!”
아무튼 북적거리던 만남의 광장은 마르의 중재 덕에 조용해졌고, 아이들이 새끼 오리처럼 아장아장 마르를 따라가자 정문에는 나와 어머니, 막 루치아노의 저택에서 복귀한 티티만이 남았다.
“언제 봐도 기운차구나. 역시 크라시우스의 아이들이야.”
“크라시우스의 피가 짙기는 한 모양입니다. 에두아르트도 테레사가 생각날 정도로 건강하니, 축복받은 핏줄이지요.”
“후후, 그래. 정말로 축복받은 핏줄이야.”
작게 웃음을 흘리신 어머니는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초콜릿이 나오던 주머니와는 다른 주머니를 건네셨다.
“어머니, 이건…?”
“찻잎이란다. 손주들이 먹을 걸 가져왔으니 아들과 며느리들 먹을 것도 가져와야지. 라우라가 추천한 거니 괜찮을 거야.”
“유모 추천이면 믿을만하죠.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새로운 차를 마셔볼까 고민 중이었는데,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 분이 새로운 차와 함께 오셨다. 이게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이라는 거겠지.
“다행이구나. 사실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거라 꼭 마음에 들었으면 했거든.”
“이런, 청탁이었습니까? 감찰 관료한테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거절해도 상관없단다.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 괜찮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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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문제없죠.”
묘하게 불속성 느낌이 나는 농담이었으나 그런 농담만으로도 나와 어머니는 웃을 수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우리 가족이 많이 가까워지기는 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농담은커녕 평범한 일상 대화조차 힘들었는데 말이야.
‘부모, 자식이 가까워졌으니 남매가 가까워질 차례기는 하지.’
그리고 어머니의 방문 목적, 부탁할 사안을 대충 알 것 같기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숙부,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어머니도 방문하신다? 이건 크라시우스 가문의 대부인으로서 과거 크라시우스였던 분들을, 전대 가주의 혈육들을 돌보겠다는 강한 의지 아닌가. 현 크라시우스 가문의 안주인인 마르가 아니라, 어머니가 직접 나서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현이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뜻에 따르는 것이 옳다. 이번 일은 크라시우스 가문의 일이라고 보는 것보다, 인간 빌헬름과 그 부인 유세니아의 일이라 보는 게 맞으니까. 크라시우스 가주인 나도 이번 일에 한해서는 빌헬름과 유세니아의 아들이니까.
‘어머니가 원하는 건 전부 들어달라고 해야겠어.’
가문의 인력이나 물자 등은 안주인, 그중에서도 1부인인 마르가 주로 관리한다. 어머니도 작은 예산 정도는 자유롭게 사용 가능하시나, 거의 20년 만에 칠남매가 모이는 자리니 작은 예산은 부족하겠지.
몇 년 전, 아직 아버지가 가주셨을 때는 마르가 어머니를 모시며 안주인 업무를 배웠었다. 잠시만 그때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하면 마르도 거절하지는 않을─
“칼. 혹시 이 저택을 빌릴 수 있겠니?”
“네?”
이건 좀 의외인 부탁이라 절로 반문이 나왔다.
기껏해야 창고 개방일 줄 알았는데 저택 대여일 줄이야.
– 멍?
티티도 어머니의 부탁이 의외인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게 짖었다.
우리 티티는 이 저택에서 적지 않은 지분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 그런 만큼 티티도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사유가 존재해야 한다.
“그, 일단 방으로 가시죠. 서서 얘기하기에는 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그러자꾸나.”
그러기 위해서는 멀뚱히 서있는 것보다는 방에서 편히 앉고, 이런저런 다과를 먹으며 얘기하는 게 좋을 터.
‘저택 대여라.’
어머니와 함께 걸음을 옮기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타일글레헨 백작성이라는 좋은 터전이 있는데, 왜 굳이 여기를 빌리려는 거지? 두 분 입장에서도 아들, 며느리, 손주들이 있는 저택보다는 성이 편하지 않나?
길어질 거라 생각한 대화는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렸다.
“타일글레헨 백작령은 네 숙부들과 고모들에게 있어 악몽이 가득한 장소란다. 비록 태어나고 자란 곳이지만, 좋은 추억이라고 할만한 건 없지. 오죽하면 네 조부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타일글레헨에는 시선도 두지 않을 정도겠니.”
“아.”
귀족이자 영주, 신하로서는 뛰어났지만, 애석하게도 가장으로서는 좋지 못했던 내 조부 되시는 분. 그분의 맹활약으로 인해 내 숙부들, 고모들은 좋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예전에 아버지에게 직접 들은 얘기니 새삼스러운 정보도 아니다.
다만 타일글레헨에 모이는 것 자체도 조심스러울 만큼 트라우마가 심했구나. 그건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 타일글레헨의 영주는 자기들의 조카니, 모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럼 어쩔 수 없죠. 수십 년 만의 재회니 웃으면서 만나야 할 텐데, 장소가 안 좋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내 대답에 어머니는 안도감이 깃든 미소를 지으셨다.
사실 타일글레헨 백작성이 불가능하다면 제도에 있는 크라시우스 저택에 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곳은 현재 에리히가 서식 중이다. 게다가 완치를 향해 나아간다지만 아직 조심해야 할 세라, 제2의 테레사로 각성 준비 중인 에두아르트가 있다. 손님을 초대하기에는 좀 그렇지.
그렇기에 가장 무난한 곳이 내 저택이다. 제도에 있어서 칠남매가 모이기도 쉽고, 한때 후작가의 저택이어서 연회를 준비하기에도 부족함이 없고, 아이들이 여럿이기는 하나 성수들과 사용인들이 있어 충분히 제어가 가능하다.
‘…트릭시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굳이 변수가 있다면 현직 공작인 트릭시의 존재.
그러나 트릭시가 내 부인 중 한 명인 이상, 숙부들과 고모들도 트릭시에게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트릭시를 그저 공작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조카의 부인 중 하나로 봐야 한다.
그것이 크라시우스의 숙명이니까. 다시금 칠남매가 크라시우스로서 만나기 시작하면, 트릭시는 그분들에게 아랫사람이 되니까.
‘가장 높을 때 봐야 편하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나, 내년이 되면 트릭시는 공작위에서 물러난다. 숙부들, 고모들 입장에서는 공작이었던 조카며느리가 야인으로 변하는 상황. 공작을 조카며느리로 대하는 걸 각오했다가 야인을 대하는 걸로 바뀌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겠나.
극강의 매운맛을 보면 그 아래 매운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극강의 단맛을 보면 초코우유도 맹물처럼 느껴진다.
이럴 때 쓰는 비유는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그, 이곳에서 준비를 해야 해서 말인데…”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셔도 괜찮습니다. 부인들도 좋아할 거예요.”
조심스레 눈치를 보는 어머니에게 덤덤히 말했다.
연회 최고 책임자가 연회 장소가 될 곳에 상주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부인들도 어머니를 불편해하지는 않으니, 연회가 열릴 동안만 같이 지내는 건 별문제 없겠지.
“대신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떼를 쓸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오히려 기쁜 일이지. 걱정하지 말렴.”
활짝 웃는 어머니의 모습에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틀이나 사흘 정도는 어머니도 좋을 거다. 작고 귀여운 손주들이 할머니, 할머니 거리며 달라붙는데 어떤 할머니가 싫어할까.
하지만 사흘을 넘어 닷새, 일주일, 열흘에 이르기 시작하면 어머니도 생각이 달라지실 수밖에 없다. 아홉에 이르는 손주들을 같은 장소에서 돌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
‘테레사도 돌보고 계시니 괜찮겠지.’
그래도 애써 위안을 가지자면, 어머니는 테레사를 직접 돌보는 역전의 용사시다. 비록 손주들의 숫자가 많다지만 이곳에는 성수들도 있고, 아이들 하나하나의 활발함도 테레사보다는 못하다.
그러니 분명 괜찮을 거다. 분명 그럴 거야.
– 멍!
“후후, 반겨주는 거니? 고맙구나.”
그 와중에 티티는 어머니의 무릎에 앞발을 올리며 어머니의 임시 숙박을 격렬하게 반겼다.
기분 탓인가. 어째 저 반김이 어머니에 대한 호의 반, 아이들과 놀아줄 인력이 늘었다는 기쁨 반으로 보인다.
***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받은 이름인 아우구스트. 내가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변치 않을 나의 이름.
그러나 내 성은 이름과 달리 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죽기는커녕 젊고도 젊은 나이에 변한 가벼운 존재였다.
크라시우스에서 데아스트로. 제국백 가문인 크라시우스 백작가에서 제국 동부의 명문 무가인 데아스트 백작가로.
‘이제는 데아스트라고 불린 시간이 더 길다.’
결혼을 한 이후로 데아스트로 지냈으니, 크라시우스로 지낸 기간을 가뿐히 돌파했다. 누군가 내 정체성을 묻는다면 과거에는 악에 받혀 데아스트라고 했겠으나, 이제는 진심으로 데아스트라 할 수 있다.
심지어 내 부인이 이 데아스트의 가주다. 그렇다면 내가 크라시우스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데아스트의 부군이자 일원으로 지내는 것이 맞다.
그렇게 아우구스트 데아스트로 살아왔다. 내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으니 내 부인은, 내 아이들은 좋은 가정을 얻기를 원했다. 비록 정략으로 이어진 인연이나 진심을 다하여 부인을 대하였다.
덕분에 그럭저럭 만족스럽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거늘.
‘초대, 장.’
서신에 찍힌 익숙한 문장. 서선에 적힌 초대장이라는 제목.
손이 떨렸다. 머리가 새하얘지고 숨이 가빠졌다.
사실, 조금은 각오했던 일이다. 우리의 악몽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형님은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었다. 현재의 크라시우스 가문은 우리가 아는 크라시우스와 거리가 멀 거다.
그래서 갑작스레 엘린이 연락을 걸었을 때부터, 사관학교 교사 제의를 받은 것을 엘린에게 알려줬을 때부터… 이런 순간이 올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흐으…’
허나 각오한 것이 무색하게 크라시우스의 문장을 보니 본능적인 공포심이 솟구쳤다.
이상한 일이다. 이제, 이제 나를 옭아매던 악몽은 없는데. 이건 같이 악몽을 버텨낸 사람들끼리 모이자는 따뜻한 초대인데.
어째서, 어째서 나는 아직도 이러는 것인가.
“여보.”
‘아.’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부인의 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떨림이 멈추고, 호흡이 돌아왔다.
“…미안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내 사과에 부인은 말없이 손을 토닥여줬다.
어떠한 말보다 그 토닥임이 기껍게 느껴졌다.
‘가야지.’
이렇게 떨지 말고 가야지.
이렇게 평생을 그림자에 갇혀있을 바에는, 남매들과 조카들을 만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