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62)
로판 속 공무원 862화(863/945)
이 저택에서 없어도 되는 인물을 굳이 하나 꼽자면, 아무리 생각해도 저택의 주인인 나라는 결론이 나온다.
딱히 저택의 유지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청소나 요리에 힘을 보태는 것도 아니고, 저택에 비축 중인 물자를 파악 중인 것도 아니다. 그냥 저택에 얹혀서 살아가는 평범하고 평범한 가장. 그게 저택에서의 내 입지다.
얼마나 입지가 가냘프고 미천하면 사고를 칠 때마다 부인들에게 쫓겨나겠나. 사실 지분이 막강해도 쫓겨날만한 사유여서 쫓겨난 거기는 하지만, 아무튼 내 존재감은 아이들과 티티보다도 아래다. 더 구체적으로는 성수들과는 좋은 승부를 낼 수 있는 수준─ 딱 그 정도.
“매트는 전부 들어내는 게 좋을까요? 귀한 분들이 오시는 건데 이렇게 맞이하는 건 좀…”
“아니, 이대로 두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저택을 아이들에게 맞추고 있다는 뜻이잖니.현재의 크라시우스는 과거의 크라시우스와 다르다는 증거란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그 생각은 어머니와 마르의 대화를 보며 점점 짙어졌다.
크라시우스 칠남매의 재회 연회는 어머니의 주도로 진행 중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현 크라시우스 안주인인 마르와 논의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르도 지금만큼은 안주인이 아닌 며느리로서 어머니를 보필하고 있다. 연회 준비를 위해 철저히 어머니에게 협조 중이니, 아들로서 보기 기꺼운 광경이다.
하지만 저택에 깔린 매트들. 저거 내가 기획하고 실행한 내 역작인데… 아이들을 위해 저택을 하나의 놀이터로 만든 걸작인데…
‘나한테도 물어봐 주지.’
아주 조금 서운했다. 가주 겸 저택의 주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나한테 물어보는 게 맞지 않나?
물론 어머니와 마르의 합의라면 매트를 들어내는 방안도, 유지하는 방안도 기꺼이 따를 생각이다. 매트를 들어내는 방안은 잠깐만 몸을 쓰면 그만이니까. 이대로 유지하는 방안은 어머니 말씀처럼 현재의 크라시우스가 평화롭고 온순하다는 증거니까.
그저 저택에서 얄팍한 존재감이라도 뽐내고 싶은 이 아들에게 관심을 주었으면 한다. 나도 숙부들과 고모들을 열심히 맞이할 각오가 되어있으─
“칼 생각은 어때요? 이 매트는 칼이 직접 깐 거잖아요.”
“나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처음 온 손님들한테는 특이한 광경이지만, 어머니 말씀처럼 아이들을 위해 저택 전체가 맞춰준 거잖아?”
마르의 질문에 아주 미약하게 서운했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 성급한 놈.’
동시에 속으로 자책했다. 어머니와 마르는 나를 패싱한 게 아니었다. 아직 질문을 건네지 않은 것에 불과했어.
그런데도 혼자 서운하다느니 뭐니 생각하다니. 한심하기 그지없고 못나기 짝이 없는 마음가짐이다. 이러니까 내가 저택 최약체 나부랭이인 거겠지.
“게다가 처음 보는 손님들이 오면 애들이 좋아할 텐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넘어지면 곤란하지. 매트는 그냥 두는 게 좋겠어.”
민망하고도 머쓱한 마음에 괜히 즉흥적인 명분도 내뱉었다.
허나 즉흥적으로 만든 명분이라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평소에도 저택 이곳저곳을 우다다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이지 않나. 그런 아이들 앞에 난생처음 보는 작은할아버지, 고모할머니들이 나타난다? 눈을 반짝거리며 그분들에게 달라붙을 미래가 뻔히 보인다.
그리고 한 손으로 셀 수 없는 아이들이 갑작스레 달려들면 어른이라도 당황하기 마련. 심지어 그 아이들이 처음 보는 조카손주들, 남보다 어색할 조카손주들의 습격이라면 너무 화려한 신고식이다. 신고식에 움찔한 숙부들, 고모들이 몸을 피하기라도 하면 그대로 넘어지는 거지.
‘안 돼.’
상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매트 없는 맨바닥에 넘어지면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고, 숙부와 고모들은 가시방석에 앉는 꼴이야.
“참, 아이들도 생각해야죠.”
나 홀로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는 사이. 내 설명에 마르는 작게 손뼉을 치더니,
“어머니. 혹시 자식분들이나 손주분들도 같이 오나요?”
‘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손님들도 언급했다.
그러네. 전부 기혼인 분들이니 당연히 내 사촌뻘인 자식들이 있을 테고, 제때 결혼을 했다면 그 사촌들도 자식을 낳았을 거다. 근 20년 만에 가족이 모이는 거니 사촌들, 오촌들이 올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아니. 이번에는 다들 부부끼리만 올 거란다. 처음부터 많은 걸 바랄 수는 없잖니.”
“그런가요…”
“물론 언젠가는 자식들도, 손주들도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 올 거란다. 분명 그런 날이 올 거야.”
확신이 가득한 목소리에 나도, 마르도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다.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칠남매 집결조차 20년 만에 이루어졌잖아. 다행히 숙부들과 고모들은 살 날이 길고, 사촌들과 오촌들은 더욱 길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으니 언젠가는 크라시우스 전원이 모일 수 있을 거다.
‘…그럼 대체 몇 명이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당장 나랑 에리히만 합쳐도 손주 세대가 11명이다. 칠남매 중 하나인 아버지 슬하에만 11명의 손주가 있는 거다.
그렇다면 칠남매 아래의 자식 세대, 또 그 아래의 손주 세대를 합하면 대체 몇 명일까. 일단 50명은 넘지 않을까 싶은데.
‘증손주까지 태어나면 볼만하겠어.’
귀족들이 괜히 혈육을 중시하는 게 아니었다. 작정하고 혈육을 늘리면 이런 어마어마한 집단의 힘이 발휘돼서 그런 거였어.
정작 우리 가문은 조부 되는 분 덕에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지냈지만.
***
처음 타일글레헨 백작위를 물려받았을 때. 제국백으로서 처음 제국의회에 발을 들였을 때. 처음 작위 귀족으로서 상황 폐하를 뵈었을 때. 제국의 방패이자 검으로서 전쟁에 나섰을 때.
나를 긴장케 한 일들은 약 반백에 이르는 세월 동안 많고도 많았으나, 작위를 내려놓은 이후로 이보다 떨린 적은 처음이다. 그나마 비교하자면 테레사가 태어났을 때지만, 그조차 부인의 순산 덕에 긴장할 새도 없었지.
‘벌써 내일인가.’
심호흡을 하며 요동치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내일, 내일이다. 내일이면 칼의 저택에 동생들이 모인다. 거의 20년 동안 보지 못했던, 그저 잘 지낸다는 소식만 들었던 동생들과 재회한다.
“큰 오라버니.”
“아, 엘린.”
연신 심호흡을 하다가 엘린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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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맙게도 칼의 저택이 아닌 타일글레헨 백작성으로 와준 막내. 연회는 내일이지만, 나 혼자 준비하다가는 잘못될 것 같으니 하루 먼저 찾아와 준 막내.
“역시 오기를 잘 했습니다. 아무리 큰 새언니께서 연회를 준비 중이어도, 남매들의 취향을 아는 건 큰 오라버니뿐이지 않습니까. 그런 큰 오라버니가 이러고 계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미안하구나. 최대한 진정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
내 솔직한 고백에 엘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막내 매부는 같이 안 왔느냐?”
“그 사람은 내일 곧장 저택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차마 타일글레헨 백작령으로 올 염치가 없다더군요.”
무슨 심정인지 알 것 같기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린의 남편인 발터 나르젠 오브 밀키언. 얼마 전까지는 나르젠 백작가의 소가주였으나, 근래 있었던 사법계 감찰로 인해 가주가 되어버린 인물.
안타깝게도 가주였던 부친이 비리에 휘말리면서 그 자리를 계승하였고, 막내 매부마저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니 차마 타일글레헨 백작령으로 올 수 없었겠지.
정작 정말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은 칼의 저택이겠지만, 아내가 20년 만에 남매들을 보러 간다니 불참할 수도 없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바보 같은 사람. 그러게 왜 욕심을 부려서.”
엘린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한숨 섞인 중얼거림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받으십시오. 저 나름대로 준비해 봤습니다.”
그러고는 곱게 포장된 상자를 여섯 개 건넸다.
“이건 무엇이냐?”
“오라버니들, 언니들에게 줄 선물입니다. 타일글레헨에 있을 적에 그나마 즐겨 먹던 것들을 준비했습니다.”
실로 적절한 선물이었다. 귀족 사이에 오고 가는 선물은 대개 크고 화려한 법이나,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는 어색한 가족이다. 시작부터 화려하게 가는 것보다는 소소하게 가까워지는 것이 옳다.
“그런데 왜 여섯이나…”
무심코 내뱉은 말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여섯 개일 수밖에 없다. 엘린을 제외하면 나까지 여섯 명이니, 그에 맞춰서 준비한 거겠지. 그 당연한 걸 인지조차 못 한 채 입을 열고 말았다.
‘제정신이 아니긴 하군.’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내일을 준비했다면, 엘린 없이 나 홀로 동생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면 무슨 참사가 터졌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보다 조금 걱정입니다.”
다행히 엘린은 내 실언을 못 들은 척 넘어가 줬다.
고마운 일이다. 엘린이 내 상태를 걱정하거나 지적했다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을 텐데.
“걱정이라. 무엇이 말이냐?”
그렇기에 자연스레 엘린의 말에 화답하였다. 내 실언을 눈감아주었으니, 나도 적극적으로 엘린과 손발을 맞추는 것이 도리다.
“기억을 되짚어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만, 워낙 오래전의 기억이라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저도 큰 오라버니도 기억 일부가 왜곡되지 않았습니까.”
“으음…”
허나 겨우 발휘한 도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는 걱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엘린의 말이 맞다. 나도 엘린도 과거의 기억이 흐릿해진 상태였다. 나는 둘째 여동생이 좋아하던 치즈 케이크를 엘린이 좋아한다 착각했고, 엘린은 아우구스트가 좋아하던 코냑을 내가 좋아한다고 착각했었다.
“엘린아.”
“예, 큰 오라버니.”
“누군가 좋아하기는 했으니, 차라리 개개인에게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식탁 위에 펼쳐두는 건 어떻겠느냐?”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가 착각한 건 ‘누가’ 좋아했냐지 ‘무엇을’ 좋아했냐가 아니었다. 비록 사람이 바뀌었지만 우리 남매 중에 누군가 좋아한 음식은 맞았다.
그렇다면 개개인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지 말고, 식탁 위에 여섯─ 아니, 엘린 것까지 일곱 음식을 펼쳐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각자 좋아하는 걸 먹을 테니.
‘이런.’
하지만 이마를 짚는 엘린의 반응을 보니 전혀 좋지 않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미안하구나. 큰 오라비라는 인간이 이런 말이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