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63)
로판 속 공무원 863화(864/945)
마침내 이날이 왔다.
거의 20년 만에 우리 남매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 크라시우스라는 성을 버렸던 내가 다시금 크라시우스로서 활동해야 하는 날이 왔다.
‘그나마 타일글레헨에 모이는 건 아니라 다행인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타일글레헨은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이제 아버지도 계시지 않은 땅이고, 현 타일글레헨의 영주는 형님도 아닌 내 조카다. 더 이상 타일글레헨에 가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헌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특이하다. 머리로는 괜찮다고 외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다. 비록 안 좋은 기억이 있다지만 내 고향인 곳을, 아버지가 아닌 조카가 다스리는 땅을 두려워하고 있어.
‘부끄러운 일이지.’
더 가차 없이 평가를 내리자면 부끄러운 수준을 넘어 꼴사나운 수준이다. 이제는 아버지의 그림자에 짓눌린 시간보다 부인, 자식들에게 안긴 시간이 더 길거늘. 어찌하여 이러고 있는 걸까.
심지어 나는 부인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이 되기 위하여 노력했다. 비록 사랑으로 이어진 결혼은 아니었으나, 아무것도 없었기에 도리어 사랑으로 채울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비가 되기 위하여 노력했다. 누구보다 명확한 반면교사를 알기에 의외로 좋은 아비가 되는 건 쉬웠으니까.
그런 주제에 정작 믿음직한 동생, 형, 오빠가 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가족은 우애롭게 지내야 한다고 말했으면서 정작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제 변해야지.’
애석하게도 두려움은 여전히 벗어내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남매들이 모이기로 한 조카의 저택으로 향하면서도 이겨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아갈 것이다. 두려워할지언정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초대장을 받고 떨고 있었을 때, 내 손을 다독여주던 부인을 생각해서라도.
“여보. 이제 좀 괜찮아요?”
“예. 당신하고 있으니 한결 괜찮아졌습니다.”
지금도 내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는 부인을 생각해서라도.
“잘 다녀오세요.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어색했던 거지, 숙부님들이나 고모님들과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니었잖아요. 막상 만나고 나면 쉽게 친해질 수도 있어요!”
“꼭 친해지고 오십쇼. 제 사촌 중에 감찰성 장관이 있는데, 어디 가서 자랑도 못 하고 다녔습니다.”
“하, 감찰성 장관이 사촌이라니.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출세하겠네.”
이 아비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제각각의 방식으로 격려를 보냈던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셋 중 둘은 약간의 사심도 섞였던 것 같지만, 그 정도 사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혈기 넘치는 녀석들이니 혈육 중에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 있다면 괜히 으스대고 싶고, 은근히 덕을 봐서 출세하고 싶지 않겠나.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게 될 생각이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생각만 가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문제가 없다. 우리 아이들은 자신들의 사촌이 감찰성 장관이라며, 전쟁 영웅이 친척이라며 떠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혈육의 덕을 보려고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아비를 위해 꺼낸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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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네, 여보.”
“…조카의 머리에 데아스트라는 이름이 짙게 남으면, 우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내 말에 부인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짙게 남기지는 말아요. 전 우리 아이들이 뒷배 없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는 건 싫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올라간 자리는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내 조카, 감찰성 장관도 혈육을 무조건 감싸 안는 성격이 아니다. 엘린의 시가인 나르젠 백작가가 대규모 감찰에 휘말렸던 걸 생각하면 혈육조차 공평하게 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간다. 단순히 혈육이라 우대하는 사람이라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윗사람처럼 모시게 된다. 비위를 맞추면 온갖 것을 퍼주니, 더 이상 수평적 혈육이 아닌 수직적 군신 관계처럼 변질되고 만다.
반면 혈육도 공평하게 대한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삼촌과 조카의 관계로 만나면 된다. 내 능력대로만 하면 조카도 있는 그대로 봐줄 터이니. 나에게 무언가 기대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터이니.
그렇게 생각하며 연회 장소인 조카의 저택으로 향했고,
“압빠! 더빨리! 빨리!”
“웅! 더빨리!”
“얘들아… 이것보다 빠르면 떨어질 수도 있어…”
저택 정원에서 수레를 끌고 있는 조카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아이들을 수레에 태운 채 놀고 있다고?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다섯이 넘는 아이들을?
저게 과연 정상적인 상황인가? 아무리 체력이 좋은 기사라도 저렇게 많은 아이들을 태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즐거움을 향한 끝없는 탐욕과 체력을 지닌 아이들을 수레에 태우는 건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카가 아니라 사용인인가?’
이윽고 그럴듯한 가설을 떠올렸다. 저 청년은 조카가 아니라 우연히 흑발흑안인 사용인이라고.
상식적으로 대영주이자 제국백, 행정부의 장관이자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인 사람이 손수 수레를 끌며 정원을 활보할 리가 없다. 아무리 자식을 아끼더라도 귀족의 체면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 혹시 아우구스트 숙부님이십니까?”
순식간에 가설이 무너졌다.
막 정문을 통과한 나와 부인을 목격한 청년의 말. 나를 손님이 아닌 숙부라고 부르는 말에 청년의 정체가 확실해졌다.
‘조카가 맞구나.’
얼떨떨한 심정으로 슬쩍 옆에 있던 부인을 돌아보자, 부인도 이 광경이 믿기지 않는지 눈을 멍하니 깜빡이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수레를 끄는 귀족.’
우리 조카님은 크라시우스의 피를 어떻게 물려받았길래, 혼자 무슨 피를 받았길래 저런 아비가 된 걸까.
“우웅? 숙뿌님?”
“숙뿌? 압빠 숙뿌?”
“근대 숙뿌가 모야?”
“아빠 가족이라는 뜻이야. 우리 프리드리히한테도 가족이지.”
“우아!”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
둘째 숙부, 숙모와의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아니, 최악까지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정상적인 첫 만남은 아니었다.
“민망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사용인들이 수레로 짐을 옮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수레에 타고 싶다지 뭡니까. 숙부님과 숙모님도 아시겠지만, 아이들이 하나에 꽂히면 절대 말릴 수가 없지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최대한 웃음을 머금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저택 정원에서 수레를 끌던 건 결코 고의가 아니었다고.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이들이 원해서 그런 거라고. 저 나이대의 아이들이 고집을 부리면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건 잘 알지 않느냐고.
솔직히 추하고 절박한 변명이었지만 진짜다.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20년 만의 칠남매 재회 날에 이딴 기행을 벌이겠나.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난생처음 숙부들과 고모들, 숙모들과 고모부를 맞이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런 날에 기행을 벌인다면 다 이유가 있는 거지.
‘망했네 이거.’
덕분에 절박한 심정으로 혓바닥을 놀렸으나, 이미 숙부님과 숙모님 마음속 나는 크레이지-수레맨이 된 것 같다. 무슨 말을 해도 얼떨떨한 표정이 변치 않아.
…사실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기는 해. 오랜만에 이산가족처럼 지내던 남매들과 재회하고, 이미 작고한 부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역사적인 날이다. 그런 날 처음 본 것이 조카손주들을 수레에 태운 채 돌아다니는 조카. 여러 의미로 전설적이다.
“확실히 어린아이들은 1시간 전이 다르고, 1시간 후가 다른 법이지요. 아이들의 변덕은 어른이 다스릴 수 없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내 처절한 변명에 동정심이 들었는지, 둘째 숙부가 겨우 내 말에 동의를 표해줬다.
그 와중에 조카를 상대로 존대를 쓰신다는 게 마음 아팠다. 저게 크라시우스를 향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크레이지-수레맨 때문인지 모르겠다.
“…특이한 저택이로군요. 방 일부가 아니라 복도 전체에 매트가 깔려있다니.”
“아, 예. 신께서 보우하심인지 아이들이 워낙 많아서 말입니다. 한 명 한 명 보살피기가 힘드니, 다치지 않을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다치지 않을 환경. 과연, 백작께서는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시는군요.”
숙모의 감탄 섞인 말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래, 원래 계획은 이거였다. 저택 전체에 깔린 매트를 보고 놀라는 숙부와 고모들. 저택의 미관을 포기하고 매트를 택한 이유를 말하면, 철저히 아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문의 상태를 알고 감탄하는 어른들.
동시에 오늘날 크라시우스 가문은 과거의 크라시우스와 확연히 다르다는 걸 느끼고, 그 뒤에는 어머니가 정성스레 준비한 연회를 즐기는 것. 그 연회 속에서 아버지의 진심 어린 환대를 받는 것. 이게 본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놈의 수레 때문에…
“헌데 조카님. 저희가 조카님을 뵌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어찌 한 번에 알아보셨군요.”
“아버지에게 숙부님들, 고모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중 아우구스트 숙부님은 아버지처럼 건장하시나, 동시에 아버지에게 없는 현명함을 갖추었다고 하시더군요. 딱 봤을 때 도서관에서 책 좀 읽었을 것 같은 사람이 아우구스트 숙부님이라 하셨습니다.”
“푸흣.”
과장이나 왜곡 하나 없는 순도 100%의 진실을 말하자, 복도를 둘러보던 숙모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허어. 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예. 크라시우스가 아닌 다른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능히 행정부나 사법 쪽에서 이름을 날리셨을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자 숙부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형님이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제가 아버지 몰래 목검 대신 책을 잡을 때마다, 아버지는 저를 혼내는 것 이상으로 형을 압박했습니다. 맏이라는 놈이 엉망이니 그 아래도 엉망이라고 말이지요.”
‘아니 뭔.’
자식을 상대로 한 내리 갈굼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자식을 도구처럼 봤어도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그래서 형님도 제가 책을 읽는 걸 싫어할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한테 없는 현명함을 갖추었다라…”
“아버지는 거짓말을 하실 분은 아닙니다.”
“예, 잘 압니다. 그래도 20년 가까이 한 집에서 지낸 사이기에 알지요.”
그렇게 말한 숙부님은 아까보다 밝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다이나믹한 첫 만남이었지만, 다행히 어느 정도 플러스로 수습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