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68)
로판 속 공무원 868화(869/945)
제국과 아르메인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본래 국경이 서로 붙어 있는 국가들은 사이가 좋은 경우가 드문 법이며, 그 국가들이 나란히 대륙 1위, 2위의 국력을 자랑한다면 더더욱 관계가 험악할 수밖에 없다. 제국은 대륙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기 위해 바로 옆에 있는 2위를 억눌러야 하고, 아르메인은 제국에게 고개 숙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으니 당연한 일.
‘자존심이라고 하니 좀 없어 보이네.’
그러나 국가 운영 측면에서 자존심은 중대 사항이다.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아르메인은 큰소리를 떵떵 칠 수 있는 수준의 국가고, 막강한 기사 전력을 자랑하여 기사왕국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얻은 국가지 않나. 그렇다면 아르메인 백성들은 조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왕실과 국가를 지탱하게 된다.
즉, 아르메인이 추한 모습을 보여 자부심이 무너진다면 로벤스 왕가와 아르메인이라는 국가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뜻. 그렇기에 아르메인은 국체 보존을 위해서라도 제국과 대립해야 했다.
게다가 아르메인 정도의 체급이면 대륙 어디를 가도 깡패 노릇을 할 수 있는데, 하필 제국 바로 옆이라 그러지도 못하잖아.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겠어. 그러니 순순히 숙이는 건 죽어도 싫었겠지.
‘역대 황제들도 아르메인에 유화적인 편은 아니었고.’
제국과 아르메인의 국경이 맞닿은 이후로, 제국의 황제들은 아르메인과의 외교에서 강경한 태도를 일관하였다.
1위를 차지한 사람은 3위나 4위, 저 멀리 꼴등과는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권좌를 위협하는 2위와는 절대 웃으며 손을 잡을 수 없다. 자신이 삐끗하면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할 승냥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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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인 같은 2위 또한 1위와는 웃을 수 없다. 차라리 권좌가 멀리 있으면 포기라도 할 텐데, 눈앞에서 아른거리면 1위를 몰아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 그래서 제국과 아르메인은 사실상 적대국으로서 지내왔으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과거와 달리 현재는 제국과 아르메인이 적대 관계를 풀고 공존을 택한 시기다.동부 왕국들이 제국을 노렸을 때, 아르메인도 숟가락을 얹으려 했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더더욱 놀라운 점은 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 중 하나가 류티스라는 것이다.
‘시대의 주역 류티스.’
내가 생각해도 기이한 표현이라 절로 웃음이 나왔으나, 웃음이 나오는 것과 별개로 저 표현은 틀린 말이 아니다.
첫째 장인어른이 동부 왕국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하여 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현 아르메인 국왕이 제국과의 대립보다는 내실 다지기를 추구하며, 제5제국이라는 자국 내 극렬 매파의 득세로 강경 외교에 학을 떼기 시작한 아르메인 왕국. 그런 상황에서 아르메인 왕자인 류티스가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생각 없이 찬 공이 골대로 들어갔지.’
아무리 생각해도 류티스 본인은 별생각 없이 입학한 게 맞다. 이건 내가 류티스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해도 부정할 수 없는 참혹한 진실이었다.
허나 류티스의 제국 유학 생활은 아르메인에게 ‘우리도 제국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건가?’ 라는 인식을 주었다. 솔직히 아르메인이라고 타국과의 대립을 백 년 단위로 이어 나가고 싶었겠냐고. 심지어 휘청거리나 싶던 제국이상황 즉위를 기점으로다시 굳건해졌잖아.
물론 카간한테 제국이 패전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여차저차 제국은 이겼다. 뒤이어 북방을 완전히 집어삼키기도 했지. 아르메인의 주류 여론이 ‘우리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쉬자.’ 라는 파워 게임 포기 선언으로 기울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스멀스멀 타오르던 평화의 불씨에 류티스가 기름을 끼얹은 꼴이다.
그러니 나와 피네가 아르메인에 입국하면 이런저런 귀족들이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난 새 시대의 주역인 류티스의 지인이니까. 나한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면 류티스에게 좋게 전달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백작 각하! 아르메인 왕국은 각하 내외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지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대륙 제일 검을 직접 뵙게 되어 둘도 없는 영광입니다!”
“국왕 전하께서도 각하의 방문을 축하하며, 부디 아르메인에서 즐거운 여행을 보내기를 기원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류티스 저하의 결혼 준비로 왕실이 바쁘니, 직접 마중 나오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며─”
예상을 뛰어넘는 격렬한 환영 인파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이게 뭐야.’
당혹스럽다. 텔레포트를 통해 편히 이동할 수 있었지만, 마침 제국과 육로로 이어진 아르메인이니 마차를 타고 아르메인까지 이동했다. 도로를 이동하여 국경을 넘는 일이니 아르메인 외교부에게 어느 루트를 이용하여 언제쯤 어느 도시에 입성한다─ 정도는 미리 일러두었다.
헌데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화려한 인파와 조우하고 말았다. 그것도 아르메인 외교부에서 달려온 인파를.
‘국경 도시부터 이렇게 환대한다고?’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제국의 대표적 권력자이자 대륙 제일 검이라 불리는 입장이니 환대가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다. 아르메인 왕자인 류티스와 사적인 연도 있기에 아르메인 공무원들이 격하게 반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아니면 그게 더 이상하다.
다만 아르메인의 수도에 도착해서야 반겨줄 거라 생각하지, 입국하자마자 이런 환영 인사가 쏟아질 줄 누가 알았겠어.
‘얘네 안 바쁘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 동네 외무성은 청사도 함부로 못 나갈 만큼 일에 치여 사는데, 이 동네 외교부는 수도를 떠날 여유까지 있어?
혹시 내 예상보다 아르메인 내 류티스의 위상이 높아졌나? 특히 외교부 입장에서는 류티스 덕에 제국과의 파워 게임이 끝난 거기도 하니, 외교부에서 눈물을 흘리며 추앙해도 납득할 수 있다.
“실로, 실로 영광입니다…! 은퇴 전에 각하를 뵙게 될 줄이야!”
“감사합니다, 각하! 이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외교부의 영웅! 우리들의 영웅!”
‘뭐지 시발.’
아니, 아니다. 이건 류티스의 위상이 높은 게 아니다.애써 부정하려고 해도 이건 류티스를 향한 존경, 류티스의 지인을 향한 배려가 아니야.
‘나잖아.’
이들의 존경과 환호는 오롯이 나를 향한 것이다. 단순히 귀한 손님이라 대접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떠받들고 있어.
“각하, 우선 가볍게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애석하게도 이곳은 아르메인 변방의 일개 도시라 성대한 대접은 불가능하나, 긴 마차 여행의 피로를 풀 정도는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마차의 상태도 잠깐 점검하셔야 할 테니, 그동안 쉬고 계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 음. 환대에 감사하오.”
“환대라니요! 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내 감사에 외교부에서 온 공무원들은 격렬하게 손과 고개를 내저었다.
진심으로 황송하다는 반응이라 착잡함이 몰려왔다.
티타임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저 외교부 무리들이 말한 것처럼 마차를 점검하고, 찌뿌둥한 몸을 풀 정도의 시간만 소모했다. 귀한 분들의 발걸음을 오래 잡으면 안 된다나?
고마운 배려지만 동시에 무서웠다. 이제는 귀한 분이라는 단어까지 직접적으로 입에 담다니. 그것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전부 의도된 연출이나 마찬가지인 외교부 공무원들이.
‘제일 검이라… 그런 건가.’
이윽고 이 기괴한 사태의 유력한 원인을 떠올렸다. 내가 대륙 제일 검이라 불리는 것. 아무래도 그게 가장 유력한 원인이다.
물론 단순히 ‘대륙 제일의 무인이니 존경하고 받들어야 한다!’ 같은 이유는 아니다. 그건 무인들의 행동 원인이 될지언정 관료들의 행동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외교부가 나를 지상에 강림한 신처럼 여기는 이유. 그건 내가 대륙 제일 검이라서, 아르메인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무인의 정점이라 그런 것이다.
제국에서 대륙 제일 검이 출현한 것은 제국이 아르메인을 상대로 명확한 우위를 점했다는 증거. 기사왕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아르메인 사람들조차 제국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징이다. 아마 류티스의 유학과 더불어 내 존재도 아르메인의 파워 게임 포기에 영향을 끼쳤을 터.
‘그러니까 저러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르메인 외교부 시야에서 보면 나는 자국이 대륙 최강국을 상대로 강경 외교를 펼치는 걸 막아준, 더 나아가 평화적인 관계를 체결하는 데 일조한 구세주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새 시대의 주역이었나.’
미치겠네. 류티스한테 붙은 웃음벨 칭호인 줄 알았더니, 나한테도 붙어 있는 칭호였잖아. 그것도 어떻게 보면 더 선명하고 거대한 칭호야.
“후우…”
“왜 그러십니까?”
재차 한숨을 내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피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이 여정은 류티스의 결혼식 참석보다 피네와의 신혼여행이라는 성격이 더 강하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피네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지, 아르메인 외교부의 속내를 짐작하는 게 아니다.
“미안해. 상상도 못 한 대우를 받으니까 좀 당황스러워서. 귀족들 사이에 대가 없는 호의 같은 건 없잖아.”
그렇기에 적절한 변명을 내뱉었다.
외교부의 열렬한 환대는 대가 없는 호의가 아니지만, 난 대가를 주어야 하는 입장이 아닌 이미 준 상태다. 그것도 외교부의 업무 해방과 평화 선사라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그러니 내가 이 환대에 한숨을 내쉴 필요는 없다. 더 줄 게 없으니 마음 편히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허나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아르메인에 평화를 선사해서 외교부가 날 떠받드는 중이야. 그게 좀 부담스러워.’ 라는 말을 해야 한다. 어지간히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입에 담기 어렵─
“이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입니다.”
“어?”
“대륙 제일 검이자 왕자의 고문이었고, 제국의 2인자가 왔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요. 저들이 진정으로 기사왕국의 일원이라면, 다른 것보다 대륙 제일 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고개 숙이는 게 옳습니다.”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피네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잊고 있었다. 피네가 내 추종자 1호라는 걸. 외교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