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7)
눈물이 덜덜 떨리고 손발이 나기 시작했다. 사악한 윗분들은 가련한 아랫놈을 무자비하게 물어뜯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여행을 목적으로 온 귀빈을 황궁에 머물게 하는 것은 과한 조치입니다. 황궁에 출입하는 절차를 생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매번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명안이라는 말로 황태자의 말을 지지한 궁내성 장관이 딱히 달갑지 않은 첨언으로 설득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먼저 황궁에 방을 마련하겠다고 말한 건 궁내성 장관 아니었나. 지금은 가차 없이 황궁을 선택지에서 제거하고 있다. 손바닥 뒤집는 솜씨가 예술이네.
물론 황궁이 어디 동네 여관도 아닌지라 어떻게 보면 과한 조치가 맞을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방문한 외교관도 온갖 절차를 거치고 출입할 수 있는 것이 황궁이고, 딱 정해진 범위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황궁이니까.
단순히 대접이라는 범위로만 본다면 황궁만큼 귀빈을 화려히 대접할 수 있는 곳은 없으나 여행객을 황궁에 잡아두는 것은 서로 귀찮고 어색한 일이다. 내 마음대로 나갈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숙소라니, 조금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아카데미 일정이 아니라지만 학생이라는 신분과 제과 동아리라는 소속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궁내성 장관의 말에 내무성 장관의 표정이 조금 꿈틀거렸다. 진지하게 왕자, 차기 성자를 맞이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 제과 동아리라는 아기자기한 단어가 튀어나와 웃음을 터뜨릴 뻔했나 보다.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이라.
“마침 감찰부장이 고문이지 않습니까? 고문이 부원들과 함께 지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다행히 감찰부장도 부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쌓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만? 내가 그것들하고? 도대체 원만의 기준이 뭐지?
“옳은 말씀입니다. 공식 방문이 아니니 행정부 인사가 나서기는 곤란하나, 감찰부장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렇지요. 감찰부장은 엄연히 아카데미부터 안면을 튼 인물이니까요.”
궁내성 장관의 열변에 사법성 장관과 외무성 장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례와 외교를 담당하는 두 장관이 지지한 순간, 아주 희미한 탈출로도 차단되고 말았다.
그래도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담아 시장을 쳐다봤다. 시장은 부원들이 제도에 머무는 것 자체를 꺼려할 인물이니까.
‘끝났다.’
하지만 시장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내 최후를 직감했다. 평생을 황실의 수족으로 살아온 저 충직한 노인은 황태자의 의견에 당혹감은 표해도 반대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 사실 시장이 고생을 할 가능성은 적지. 처음 제도에 들어오는 날에나 소란스러울 뿐이지,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부원들을 담당하는 건 나니까. 내가 버티면 시장이 귀찮아질 일은 없다.
“그래. 감찰부장만큼 귀빈들과 친밀한 사람도 없지.”
장관들의 동의, 혹은 침묵을 가장한 지지가 몰리자 황태자는 작게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아카데미에서 하던 일을 제도에서 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개같은 거, 지 일이 아니라고 말은 쉽게 하지.
치가 떨리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태자만이 아니라 다른 장관들도 이 결정에 이견이 없는 것 같으니까. 장관들 입장에서는 맞이하는 과정이 중요하지, 그 후에 부원들이 어디에 머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네가 고문이니 여행 온 부원들 책임지는 게 맞지 않음?’ 상태기에 내가 발작하면 서로 손잡고 나를 두들겨 팰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감찰부장이 귀빈들을 대접하는 것에 부족함이 있으면 곤란하지. 재무성 장관, 지원은 넉넉하게 해주게.”
“예, 전하.”
그나마 다른 지원은 확실한 것 같아 다행이다.
아무튼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속이 그나마 진정된다.
회의는 부장 하나의 눈물을 제외하면 무난하게 끝났다. 애초에 왕족의 제도 여행이라는 특이한 상황에 골치를 앓은 거지, 의전 정도야 딱히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 대륙의 중심인 제국에서 의전 하나 제대로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렇게 장관들과 시장이 물러난 대회의실.
“감찰부장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네.”
“황송한 말씀입니다.”
황태자와 나, 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원래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가려고 했는데, 이 새끼가 따로 할 말이 있다고 잡아버렸다.
“내 괜한 말을 꺼내 안 그래도 바쁜 감찰부장을 괴롭힌 것이 아닐까 걱정되는군.”
= 야, 삐졌냐?
“전하의 명에 따르는 것이 신하 된 자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 알면 닥쳐.
이미 신선한 엿을 입에 쑤셔 박았으면서 저런 말을 하는 것도 티배깅이나 다름없다. 황태자가 하는 티배깅이라니, 대체 어디 가서 하소연하나. 아무리 내가 동아리 고문이긴 하지만 내 저택을 제물로 바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아카데미가 아닌 제도에 머무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하길래 당연히 황궁에 방을 마련한다는 건 줄 알았다. 애초에 그 노련한 궁내성 장관마저 처음에는 황궁이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결국 나하고 붙여둘 거면 왜 제도까지 소환하는 건지.
“감찰부 업무로도 바쁜 감찰부장이 저택에서도 쉬지 못하다니, 안타깝군.”
그 의문은 황태자의 말을 듣고 바로 해소됐다. 내가 아카데미에 있으면 감찰부로 출근을 못하니 제도로 끌고 온 것. 애초에 목적은 부원들이 아니라 나였다. 시발, 너 사람 새끼 맞냐. 황제의 아들이니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노고를 덜 수 있게 힘쓸 테니 너무 염려하지는 말게.”
속으로 황태자에게 엿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이, 황태자가 넌지시 희망적인 말을 꺼냈다. 이번 일은 황태자의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의 시선으로 봐도 좀 너무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마침 특무성에 남는 손이 있다지 뭔가. 감찰부장을 도울 여유 정도는 충분하겠지.”
“과분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직설적으로 특무성의 지원을 보장하는 황태자의 말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특무성 장관이 이번 회의 동안 침묵을 지킨 것이 이상했는데, 이미 황태자와 어느 정도 입을 맞춘 상태였다. 회의 전부터 나에게 특무성 전력을 붙이기로 결정한 모양.
아카데미에 나 혼자 덜렁 갔던 것은 삼국과의 협의 때문이었지만, 제도는 아카데미가 아니다. 제도에 제국 전력이 돌아다니는 건 당연한 일. 그리고 그 제국 전력이 내 저택 근방에서 자주 보이는 것도 어디까지나 우연일 것이다.
나쁘지 않은 지원이다. 혼자 부원들을 보는 것보다는 유사시 개입할 눈과 손이 많은 게 좋으니까.
“그리고 정작 당사자인 감찰부장이 자주 자리를 비우면 곤란하지 않겠나?”
“옳은 말씀입니다.”
황태자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감찰부에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다. 괜히 매일 출근해서 늦게까지 감찰부에 묶이지 말고 평소에는 저택에 있다가 적당할 때 얼굴이나 비추라는 말.
이미 아카데미에서 비대면 결재를 하는 것도 각오한 상황이었다. 제도에서 출퇴근이 가능하면 굳이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무방하긴 하지. 아무리 출근을 듬성듬성 해도 비대면보다는 훨씬 효율적이다.
그런데 뭐지, 생각보다 조건이 괜찮다. 재무성에서 물자 지원도 와, 특무성에서 인력 지원도 와, 감찰부에 매일 출근 할 필요도 없어. 저택 하나 제물로 바친 대가로는 놀라울 정도로 괜찮은데?
‘왜 괜찮지?’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황태자가 픽 웃음을 흘렸다.
“제국을 대신하여 귀빈들을 맞이하는 일이 아닌가.”
즉 제국의 위신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니 신경 써주겠다는 말.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황태자는 먼저 자리를 떴다.
“전하께서 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태자의 비서가 다가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주머니를 열자 반짝반짝 빛나는 금화 열 닢이 보였다. 보야르의 카지노에서 바친 금액의 딱 두 배.
역시 황태자 전하께서는 신하의 노고를 외면치 않고 따뜻하게 감싸주시는 분이다. 실로 성군이 될 자질. 난 사실 예전부터 황태자를 믿고 있었다.
‘개새끼.’
생각보다 지원이 괜찮으니 이번만 넘어간다.
***
예정에 없던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로 복귀했다.
‘귀찮게.’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부황께서 노쇠하시며 내가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늘었는데, 갑자기 왕족이 제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체 뭔가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입을 막거나 무시하고 싶지만 그건 제국의 위신과 관련된 문제. 역천자에게 2년이나 시달리며 제국은 알게 모르게 대륙 각국의 의심과 도전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이제야 그 불쾌한 시선을 상당수 치울 수 있었는데, 아무리 비공식이라지만 타국 왕족의 환영을 허술하게 한다? 다시 그 불쾌한 시선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거슬리기 짝이 없는 일.
‘아인테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그래도 이번 일을 통해 확신하게 된 것이 있었다. 아인테르는 황좌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 만약 욕심이 있다면 이런 일이 터지지 않았을 거다.
아무리 외국 왕자, 차기 성자와 친분이 있다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부황과 귀족들의 지지는 나에게 있다. 그렇다면 바짝 엎드려 기회를 노려야지, 이렇게 대놓고 친분을 과시하며 제도로 온다?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런 계산도 못하는 놈은 아니지.’
아인테르는 머리 회전도 눈치도 괜찮은 녀석이다. 만일 다른 생각을 품었다면 절대 제도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품었더라도 지금 상황을 보면 절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아인테르가 왕자들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게 증명 됐으니까.
왕족 방문, 다소 거슬리고 귀찮은 이벤트지만 아인테르의 속내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으니 썩 나쁜 일은 아니다. 어차피 난 잠깐 얼굴을 비추고 악수만 하면 되니까.
‘감찰부장만 고생이군.’
감찰부장의 벌레 씹은 표정이 떠오르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감스럽지만 어쩌겠나, 그 방법이 최선이었거늘.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더 고민하겠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고.
게다가 뭔가를 시키면 입으로는 불만을 뱉어도 꾸역꾸역 평균 이상의 결과를 가지고 온다. 어찌 신뢰하지 않을까. 거기에 적당히 지원과 기름칠을 해주면 금방 표정을 풀고 움직인다.
‘안 부리면 이상하지.’
능력 좋고 성실하고 뒷끝 없는 부하. 심지어 젊다. 누가 내 자리에 있든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부리지는 않았을 거다.
적어도 지옥에 있을 도르고스, 그 새끼보다는 내가 인격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