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70)
로판 속 공무원 870화(871/945)
기사들은 검에 살고 검에 죽는 족속들. 전란의 시대가 아니어도 서로 검을 맞부딪히는 경우가 잦다.
서로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 대련을 하는 경우, 상대가 개 같아서 칼빵을 쑤시기 위해 결투를 하는 경우,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화려한 비무를 선보이는 경우 등.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니 작정하고 떠올리면 온갖 사유가 우르르 튀어나올 거다.
허나 이는 두 기사의 수준이 비슷해야 가능한 일들이다. 두 기사 사이의 격차가 심하면 대련을 해도 기량 상승에 도움이 되지 않고, 상대를 향한 칼빵도 순식간에 결말이 날 것이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전에 비무가 끝나 오히려 어색해진다.
다만 딱 한 가지 경우. 고수가 하수에게 가르침을 주는 경우만큼은 두 기사의 격차가 커도 무방하다. 이런 경우는 격차가 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고 문제가 되니까.
‘가르침이라.’
그래서 아르메인 국왕의 제안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황제가 ‘너 기사들한테 가르침 좀 줘라.’ 같은 말을 했다면 별걸 다 시킨다고 불평을 할지언정 곤란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체계적인 교육법을 알지 못하는 것? 기사들의 세계에서 그런 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물론 체계적인 교육법을 안다면 더 좋기는 하겠다만, 본래 몸 쓰는 직업은 이론보다 실전으로 구르는 법이지 않겠나. 나도 구르면서 지금의 경지에 올랐으니, 제국의 기사들도 나랑 같이 훈련장을 구르다 보면 자연스레 실력이 늘어날 터.
하지만 상대가 제국 기사가 아닌 아르메인 기사라면 그런 투박하고 처절한 방법을 쓸 수 없다.
‘남의 나라 재원을 개처럼 굴리기는 좀.’
기사와 마법사 같은 인력은 어딜 가도 대우받는 전력이다. 평민조차 재능과 노오오오오력으로 기사나 마법사의 반열에 오르면, 바로 준귀족 정도의 대우를 받을 정도지.
헌데 타국인에게 가르침을 청할 만큼 열정이 넘치고, 대륙 제일 검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 있을 만큼 입지를 가진 기사를 미친 듯이 굴린다? 그러다 어디 잘못되기라도 하면 제국의 사보타주라고 오해받을 수 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면 아르메인이 먼저 가르침을 청한 건 중요하지 않아.
“참으로 황송하고도 영광스러운 제안이나, 아르메인의 기사들은 용맹하고도 의기 넘치며 충성스럽다고 알고 있습니다. 일개 무인의 작은 조언이 도리어 그들의 길을 더럽히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그렇기에 최대한 그럴듯한 명분으로 거절했다. 영광스럽지만 내 가르침이 그들에게 도리어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사실상 ‘내가 아무리 대륙 제일 검이라도 결국 타국인인데, 타국인한테 자국 인재들을 맡겨도 되는 거냐?’ 라는 말을 곱게 포장한 말이었다. 스승을 잘못 만나면 자국인이어도 고생하거늘, 타국인 야매 스승이면 오죽하겠냐.
“아국의 기사들을 배려하는 백작의 마음 씀씀이에 실로 기쁠 따름이나, 그것은 백작의 걱정할 것이 아닐세.”
다만 내 거절에도 불구하고 아르메인 국왕은 웃음을 흘렸다.
“아르메인의 국왕이자 로벤스 왕가의 가주로서 장담컨대, 아국의 기사들은 가르침을 수용할지언정 휘둘리지 않는 굳건한 자들이야. 마음속에 확고한 기둥을 세우지 못한 자는 기사가 아니며, 기사가 되지 못한 자는 감히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지. 적어도 자격이 되어야 하늘을 보지 않겠나.”
“전하의 신뢰에 기사들도 감읍할 것입니다.”
자국 기사들은 물론, 내 입지도 올려치는 국왕의 발언에 어색히 미소만 지었다.
내가 이상하게 가르쳐도 자기 휘하의 기사들은 알아서 성장할 거라는 믿음. 동시에 대륙 제일 검을 하늘로 취급하며 띄워주는 칭찬까지. 덕분에 부담은 더더욱 커졌다.
“그리고 기사들이 원하는 건 백작의 이론이 아니라 실전. 백작과 직접 검을 나누는 것만큼 확실하고도 아름다운 가르침이 어디 있을까.”
‘그 실전이 문제인 건데.’
목 끝까지 치솟았던 말을 겨우 삼켰다. 차마 기사왕국의 국왕 앞에서 ‘내가 이 나라 기사들 굴리면 골골거릴까 봐 못 하는 건데요.’ 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제국의 우위를 인정했어도 그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나. 기껏 대륙 제일 검이라 존중하고 배려해 주는 상황인데, 순식간에 대륙 제일 검이 경외가 아닌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겸사겸사 제국과 아르메인의 관계도 옛날로 복귀하는 거고.
상상만 해도 끔찍한 외교적 참사다. 외무성에서 나를 죽이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참사야.
“어떤가, 백작. 백작의 후배들을 위하여 작은 가르침을 베풀어주지 않겠나?”
후배라는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난 그런 후배들 모른다니까 아예 공식화하려고 작정을 했네.
‘어쩌지 이거’
아무튼 정중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어지는 설득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르치는 것이라도 이론적 가르침이 아니라 몸을 굴리는 실전이라면 복잡할 게 없기는 하다. 적당히 검을 휘두르고, 적당히 상대의 검을 받아주면 끝이니까. 단순히 결혼 축하 겸 신혼여행을 왔다가 일일 강사가 되는 것이 오묘할 뿐,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정말 이게 맞나? 제국인이 기사왕국 기사들과 대련을 하며 ‘아아, 이것이 대륙 제일 검의 힘이다.’ 같은 걸 해도 되는 건가? 이거 아무리 봐도 티배깅 같은데?
게다가 그 티배깅을 당사자들이 자처하고 있다. 도대체 아르메인은 어떤 국가일까…
“전하께옵서 괜찮으시다면.”
도대체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나 고민하던 중, 피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아르메인의 기사들과 검을 나누어 봐도 되겠습니까?”
“호오.”
“피네?”
피네의 제안에 나도 아르메인 국왕도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아르메인 국왕이 먼저 피네가 나서도 괜찮다고는 했지만, 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의례적인 말이었을 거다. 내가 하기 귀찮은 일에 피네를 내세우는 건 고려 사항이 아니었고, 아르메인 국왕도 내뱉자마자 까먹은 말이었겠지.
허나 피네가 그 의례적인 말을 물었다. 명목상 국왕이 먼저 제안한 것이니 무례가 되지도 않는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러우나, 저는 타일글레헨 백작의 부인이자 대륙 제일 검에게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은 제자입니다. 저와 대련하는 것도 기사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자라.”
그리고 피네의 첨언에 국왕의 눈빛에 흥미가 맴돌았다.
“백작. 정말인가?”
“아, 예. 제가 직접 무인의 길로 인도하고, 이런저런 도움을 주기는 했습니다. 제 첫 번째 제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틀린 말은 아니라 당당히 대답했다.
감찰부 4과가 화려하게 망한 직후, 내가 4과를 부활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중 피네는 내가 가장 신경 쓴 인재이고, 내가 신경 쓴 만큼 능력으로 보답한 케이스다. 다른 묵광대 애들도 뛰어났지만 피네는 압도적이었지.
“그렇군.”
내 대답에 아르메인 국왕은 만족스럽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슬쩍 피네를 바라보니 피네의 얼굴에도 굳은 결의가 깃들어있었다. 마치 나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뚫어야 한다는 것처럼.
***
대토벌 전쟁으로 인해 모든 걸 잃었었다.내 가족, 내 이웃, 내 친구, 내 고향. 내 몸뚱어리를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졌었다.
동시에 모든 걸 얻었다. 신께서 나의 모든 걸 가져가시고, 새롭게 모든 것을 주셨다. 나의 영혼이나 다름없는, 나의 인생이나 다름없는 것을.
‘주인님.’
내 영혼이자 인생을 떠올렸다.
물론 주인님이라는 호칭은 이제 입에 담지 않는 호칭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결심했을 때, 그때는 여보가 아닌 주인님이라고 불렀다. 남들이 주인님을 부장님이라고 부를 때, 마음속으로는 홀로 주인님이라 부르짖었다.
그리고 주인님이 감찰부장이던 시절부터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기사왕국이라 불리는 아르메인의 기사들마저 갈망하는 분에게, 아주 작은 가르침이라도 받기를 애원하는 분에게 정성 어린 가르침을 받았다.
이건 내 자부심이다. 나와 전전 감찰부 4과, 전 묵광대, 현 특임대 1과의 긍지다. 그중에서도 나는 명실상부한 첫 번째 제자고, 최고의 제자라고 자부할 수 있다.
‘함부로 이 영광을 나눠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욕심을 부렸다. 이 영광은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 우리 특임대 1과만이 간직해야 할 소중한 영광이야.
그래서 내가 나섰다. 감히 주인님─ 아니, 여보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니. 이 얼마나 건방지고 주제를 모르는 탐욕일까.
“다음.”
작게 심호흡을 하며 최대한 덤덤히 입을 열었다. 바닥에 쓰러진 기사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음 기사를 호출했다.
너희는 딱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여보의 가르침이 아니라 내 가르침으로도 충분한 것들이야.
‘잘 하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보를 바라봤다. 나는 이게 옳은 일이라 생각하여 검을 들고 나선 거지만, 만약 여보가 불편해하면 어쩌지?
‘아.’
허나 미소를 머금은 채 엄지를 치켜세우는 여보를 보니 급속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기우였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다. 여보도 직접 기사들과 검을 나누는 건 원치 않았던 거야. 대륙 제일 검이 어찌 아르메인 제일 검도 아니고, 널리고 널린 하수들을 상대로 검을 섞을까.
‘조금만 살살하자.’
뒤이어 뜨겁게 타오르던 머리가 점점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기껏 여보가 좋게 봐주고 있는데, 상대를 과하게 때려눕히면 외교적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저 미소가 당혹감이 깃든 미소로 변하겠지. 그건 싫다.
나는 타일글레헨 백작의 부인이자 대륙 제일 검의 첫 번째 제자.그 명성에 걸맞은 품위와 능력을 보여야 한다. 절대 내 삶과 같은 사람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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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더 늘어났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대련을 기다리는 사람이 스물 조금 안 되는 수준이지 않았나? 그사이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 같다.
***
피네의 거침없는 연승 행진에 그저 박수만 쳤다.
피네가 무슨 심정으로 저러는 건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과거 주인님이라 부르던 시절보다는 완화됐지만, 모든 것을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피네다. 내가 아르메인 국왕의 요청에 난감해하니, 귀찮은 일을 대신 맡아준 것 아니겠나.
어떻게 보면 피네의 폭주라고 할 수 있으나, 그동안 잠잠하던 피네가 먼저 나선 것이다. 게다가 ‘내 부인’ 피네가 아닌 ‘무인’ 피네로서 아르메인 기사들과 싸우는 것이다. 이렇게 승리가 늘어날수록 피네의 명성도 높아질 터.
‘장하다, 우리 피네.’
이 기세로 아르메인 수도를 배경으로 도장 깨기나 하자.
“흐으, 역시 특임부장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저도 당장 검을 들고 싶어 몸이 근질거립니다!”
나는 그동안 이 미친 왕자를 막고 있을 테니까.
‘결혼식이 코앞이라 다행이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류티스 이 새끼. 결혼을 앞둔 새신랑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피네와 붙었을 거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다치면 안 되는 시기니까 참고 있는 거지.
애초에 결혼식이 아니라면 오지 않았겠지만, 아무튼 결혼식이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