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71)
로판 속 공무원 871화(872/945)
남편이 어느 미친 왕자를 전력으로 붙들고 있는 사이, 부인은 기사왕국의 자긍심을 연달아 박살 내었다.
아니지. 박살 냈다는 표현을 쓰니 우리가 제국-아르메인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잖아. 박살이 아니라 승부욕을 자극하여 아르메인의 미래를 더욱 찬란하게 만들었다고 하자. 그게 적절한 표현 같으니까.
‘장하다, 우리 피네.’
아무튼 피네의 맹활약에 아낌없이 박수를 쏟아부었다. 아까도 한 생각이지만 여전히 감격과 흡족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대륙 제일 검과 대련을 하기 전, 대륙 제일 검의 제자와 먼저 대련을 하라는 아르메인 국왕의 선포.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대련을 기대하던 기사들도 국왕의 선포가 합당하다고 여겼는지, 열렬한 환호와 함께 대련을 받아들였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바로 최종 보스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그 아래 사천왕과 붙어 보는 게 좋았나 보지.
그리고 결과는 피네의 연전연승. 제국-아르메인 외교사에 길이 남을 17연승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거 참.”
이는 반대로 말하면 아르메인의 17연패라는 뜻. 그래서인지 류티스도 쓴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복잡한 심정일 거다. 자국 기사들이 한 명에게 연달아 패배하는 게 달갑지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분노나 아쉬움을 토하기에는 피네의 남편인 내가 바로 옆에 있다. 류티스 입장에서는 괜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내 부인이 이긴 게 이상해?’ 라는 말을 들을까 봐 우려스러울 터.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감동이기는 하다. 파멸적인 눈치를 자랑하는 류티스가 내 기분을 고려하다니.
‘성장했구나.’
가장 골치 아팠던 학생의 성장만큼 기꺼운 일이 어디 있을까. 과거 동아리 고문으로서 감동적이다…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에 감사할 정도입니다. 더 대련을 이어간다면 17연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겠군요.”
“아르메인의 기사들이 용맹한 것은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제가 나설 일이 없게 전력을 다하는 피네와 달리, 기사들은 타국의 귀빈을 고려하여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공평하지 않은 결과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마십시오.”
그래서 류티스의 말에 적당히 위로를 건네주었다.
사실 류티스 말처럼 시간이 무한하다면, 대련을 무한히 이어나갈 수 있다면 피네의 연승 기록만 우직하게 쌓여갈 거다. 약 30년 동안 대외 분쟁이 없던 아르메인과 달리 제국은 여러 분쟁을 겪었고, 피네는 분쟁의 한가운데에서 구르고 구른 스페셜리스트니까. 실전 경험 유무의 차이는 크다.
허나 성장한 학생을 위해 덕담 섞인 위로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아무튼 피네가 이긴 건 맞지만 제대로 된 승부는 아니었어. 그냥 그런 걸로 치자.
“하하,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다행히 내 말에 류티스의 표정이 다소 풀렸으나,
“하지만 승부는 승부입니다. 이래서 불리했고, 저래서 불리했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기사의 도리가 아니지요!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이기는 것이 진정한 기사고, 진정한 강자입니다! 전쟁 중에도 조건을 따져가며 싸우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비록 17연패는 뼈아픈 고통이나, 이 고통 역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성장통!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 대륙 제일 검과 그 부인께 감사드립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는 류티스의 모습에 어색히 미소를 지었다.
검에 관해서는 자부심이 강한 류티스다. 의외인 곳에서 화통하고 쾌활한 류티스다. 심지어 결혼을 코앞에 두면서 철도 좀 든 것 같으니, 내가 알던 개노답 류티스가 아닌 정상에 가까운 류티스가 나왔다.
아카데미에서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지만, 늦게라도 왕자다운 왕자가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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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귀빈께서 충분히 시간을 내주셨으니 대련은 멈추도록 하겠다!”
이윽고 대련장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류티스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련 종료를 선언했다.
“경들에게 시간을 내어준 분은 제국 감찰성 특임부장이자 대륙 제일 검의 수제자다! 경들보다 뛰어난 스승 밑에서 자랐고, 보다 많은 경험을 겪었다! 그러니 패배의 분함보다는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라!”
“명심하겠습니다!”
“더욱 정진하여 왕실과 왕국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류티스의 외침에 바닥에 앉아 골골거리던 기사들, 기립하여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일제히 화답했다.
“마지막으로 대륙 제일 검의 수제자께! 검례!”
‘아.’
그러고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검례까지 피네에게 박아버렸다.
이 잔인한 놈들. 나랑 같이 검례를 받았을 때도 흠칫한 피네인데, 피네한테만 검례를 시전하는 건 가혹 행위 수준이라고. 의외로 타인들의 시선에 낯설어하는 피네거늘.
‘…상관없구나.’
하지만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례를 받는 피네의 모습은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했으니까. 검례를 하는 기사들은 단순히 타인이 아닌, 자신이 무력으로 박살 냈거나 박살 낼 수 있는 것들이니 괜찮은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대련이 아니었다면 피네는 저 기사들을 여전히 낯설어하고 꺼렸을 테니.
아르메인 체류 기간 동안 지낼 숙소는 왕실에서 제공해 주었다.
너무 과한 배려였지만 높으신 분의 배려는 거절하는 것도 실례가 되는 법. 게다가 결혼식을 빛내주기 위해 온 손님이니, 당연히 왕실이 대접하는 게 옳다는 논리인지라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빛내기 위해서라.’
국왕의 말을 곱씹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검묘에서 하늘 베기를 하는 것이 언제부터 결혼식을 빛내는 행위가 됐을까. 오히려 결혼식을 뒤엎어버릴 대참사 아닌가.
솔직히 아르메인에 온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왜 하늘 베기 같은 걸 요구한 걸까. 그것도 검묘라는 성스러운 장소에서, 그것도 결혼식이라는 기념비적인 시기에.
범인의 마음으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일 거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걸 이해하면 오히려 큰일이지.
“여보?”
‘아.’
속으로만 하려던 한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혹시, 아까 대련에서 뭔가 문제라도…”
대련 이후로 살짝 의기양양하던 피네는 내 한숨에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운 모습인지라 픽 웃음이 나왔다. 무려 기사왕국의 심장에서 17연승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달성했다. 자랑스러우면 자랑스러웠지, 어찌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
물론 상대 국가의 수도에서 진행한 대련이고, 국왕의 주선이 있었기에 적당히 봐주는 것이 아름다운 그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 검에 미친 인간들에게는 봐주는 것이 실례지 않겠나. 전력을 다한 승부, 아름다운 패배. 이것이 저 검 애호가들에게 있어 만족스러운 결과일 거다.
“피네 혼자 고생하게 한 것 같아서. 남편이라는 놈이 구경만 해서 미안해.”
그래서 피네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도저히 ‘저 미친 아르메인 놈들은 무슨 생각으로 검묘 하늘 베기를 요청한 건지 모르겠어.’ 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내 고민이 피네에게도 옮을 뿐이니.
“아,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입니다! 대륙 제일 검을 상대하려면 당연히 그 제자부터 이겨야 하는 법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도 했습니다!”
격렬하게 고개를 내젓는 피네의 등을 연신 토닥였다.
안다. 피네의 마음은 다 알아. 나를 위해서 검을 들고, 나를 위해서 기사들과 연이어 싸웠다. 그 마음을 몰라준다면 사람이 아니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딱딱해.’
오랜만에 검을 들어서 그런지 어투가 딱딱해졌다.
나와의 결혼, 메리 출산 등. 피네의 딱딱하고 진중했던 군기는 여러 사건을 겪으며 조금씩 조금씩 빠지고 있었다. 가끔은 나에게 요자를 쓰거나, 다나까 체를 쓰더라도 미묘한 부드러움이 깃들었는데 말이야. 17연속 대련은 피네의 잃어버린 군기를 돌아오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지만 아쉽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상복구될 테니 기다리는 수밖에.
…아니, 피네 기준으로 원상복구면 군기가 가득한 시절인가?
‘안 돼.’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기껏 말랑말랑해진 부인을 다시 군인 시절로 되돌릴 수는 없다. 피네의 경이로운 충성심을 조금이나마 낮추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피네.”
“예, 예!”
“괜찮으면 바로 외출할래? 이왕 아르메인에 왔으니 이것저것 구경해야지.”
그렇기에 피네에게 외출을 권했다. 대련의 열기와 기억을 빠르게 지우기 위해서. 피네에게 다시 말랑말랑한 기억을 주기 위해서.
***
류티스 왕자 저하께서 찾아오셨다.
왕자 저하와 페로사의 결혼이 결정된 이후로 거의 매일매일 찾아오는 왕자 저하시다. 참으로 황송하옵고도 난감한 방문이나, 감히 신하 된 도리로서 저하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니 저하가 방문할 때마다 왕실 기사단 부단장의 업무도 잠시 내려두고, 오직 저하의 예비 장인어른으로서 저하를 맞이했다. 저하께서 그것을 원하시니.
“고문 선생께서 부인 한 분과 함께 오셨습니다!”
‘아.’
다만 이번에는 조금 반가우면서도 독특한 소식과 함께 찾아오셨다.
류티스 저하가 고문 선생이라 부르는 존재는 이 대륙에 오직 하나다. 과거 아카데미 감찰관이자 제과 동아리의 고문이었던 자. 현재는 제국 감찰성 장관이자 대륙 제일 검인 자.
3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함께 굴러서 그런지, 인간관계가 그다지 넓지 않은 나조차 ‘국경 너머의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
‘칼 크라시우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고, 그보다 더욱 오랜만에 만나게 될 사람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하! 빌라르 경도 고문 선생이 반가운 모양입니다!”
“예, 저하. 3년 동안 합을 맞추어서 그런지 국적을 넘은 정이 쌓였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국경 너머의 친구들을 여럿 사귀었으니까요!”
웃음을 터뜨린 류티스 저하는 찻잔을 매만지더니,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찾아가는 건 피하셨으면 합니다. 고문 선생의 부인께서 17연속 대련을 하신지라, 오늘은 손님을 맞이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예?”
저하의 말에 절로 반문이 나왔다.
17연속 대련이라니. 대체 장관은 아르메인에 오자마자 무슨 일을 당한 건가.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지만, 멀리서 온 친구의 봉변에 내가 다 미안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