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72)
로판 속 공무원 872화(873/945)
피네의 압도적인 17연승 이후로 아르메인 쪽에서 접촉해오는 일은 없었다.
그게 류티스의 결혼식까지 평화롭고 오붓한 신혼여행을 즐기라는 배려인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패배 원인을 분석 중이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니 상관없지만.
아무튼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덕분에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관광. 비록 왕자의 결혼식이 코앞이라 어딜 가도 부산스러운 분위기였으나, 수도에서 다소 먼 관광지는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었다.
예를 들면 아르메인의 건국 시조가 처음 거병한 장소라거나, 아르메인의 대기사가 괴물을 토벌한 장소라거나, 아르메인 중앙군 5백 명이 반란군 4만 명을 격퇴한 평야라거나.
‘뭔가 카테고리가 이상한데.’
관광지를 돌다 보니 강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아르메인이 기사왕국이라지만 국가의 모든 체계와 문화가 검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검 애호가들만 모인 나라라도 정상적인 관광지나 문화가 꽃 피운 장소쯤은 존재한다.
헌데 이게 무슨 일인가. 방문하는 관광지마다 군사적 향기가 물씬 풍기지 않나. 기껏 피네의 군기를 빼려다가 더욱 강화하게 생겼어.
“그, 피네. 이런 곳만 봐도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아르메인의 상징은 누구 뭐라고 해도 숭무주의와 기사도, 그리고 그 둘을 기반으로 한 군사 전통입니다. 아르메인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니 이럴 때 감상해야지요.”
그래도 피네가 진심으로 관광을 즐기고 있는지라 차마 다른 관광지로 유도할 수 없었다.
신혼여행은 남편과 부인이 즐기기 위한 이벤트다. 그런 기쁘고도 행복한 이벤트 중에, 부인의 군기를 빼야 한다는 기괴한 이유를 들먹이며 부인의 희망 사항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도 평소 자신의 욕심을 내보이지 않는 피네니까 더더욱.
그래, 관광지 성격 같은 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나. 어떤 것을 보느냐보다는 누구와 함께 보느냐가 중요한 법인데. 사랑하는 부부가 함께 여행을 즐긴다면 시궁창조차 앤티크하고 투박한 유적지가 되는 법이다.
물론 정말로 시궁창에 갈 생각은 없지만.
“그럼 다음은 몰른 평야로 가볼까? 거기도 유명한 것 같더라.”
“네, 좋습니다.”
내 제안에 눈을 반짝이는 피네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몰른 평야. 아르메인 3대 국왕 시기에 일어났던 반란군이 각지에서 몰려든 근왕군에게 포위 당하고, 최후의 발악을 위해 출진했던 반란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은 곳. 반란군 수괴인 왕제(王弟)의 사망이 반란군의 명분을 없앤 치명타라면, 몰른 전투는 반란군의 물리적 힘을 박살 낸 확인 사살이었다.
다만 명분도 잃고 사기도 떨어지고 포위도 당한 반란군 주제에 너무 분전 한지라, 몰른 평야는 아르메인의 명소가 되어버리는 기막힌 결과를 낳았다. 어떻게 보면 반란군들은 죽어서 불멸이 된 거지. 한때 ‘아르메인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군대보다 반란 일으키는 군대가 더 강하다.’ 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반란이라.’
이윽고 피네를 향한 부드러운 미소는 씁쓸한 미소로 변했다.
반란. 그 빌어먹을 반란. 한때 아르메인 3대 국왕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어쩌면 반란군이 승리할 수도 있었던 치명적인 반란.
그 사건으로 인해 아르메인 3대 국왕은 보주를 고의적으로 분실하였다. 그때 분실한 보주가 약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제국의 손에 들어왔고. 졸지에 아르메인 왕가의 상징을 손에 넣었던 나와 황제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던가. 아직도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 몰른 평야를 웃으면서 구경할 수 없을 것 같다.
‘결혼 축하 사절이 같이 가져온다고 했었나?’
현시점까지도 제국이 아르메인의 보주를 확보한 건 아르메인 국왕조차 모른다. 류티스의 결혼 선물로 증정하기 위해 철저히 기밀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자식의 결혼식 때 조상이 분실한 유물을 선물받는 것. 기대도 하지 않았던 선물은 아비로서도 군주로서도 기꺼운 일이니, 제국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협상 위치를 점할 수 있다. 어차피 줄 물건이라면 최대한 뽕을 뽑고 주는 것이 외교의 기본인 법이지.
다만 보주가 조금 더 빨리 발견되었다면… 진즉에 제국 측 협상 카드가 되었다면 내가 검묘에서 하늘을 벨 일은 없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옛날 조상들 말 중에 틀린 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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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잠잠하던 아르메인 쪽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시간이 된다면 사람 하나를 보낼 테니, 만나줄 수 있겠냐고.
솔직히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었다. 용건이 있었다면 방문 첫날에 몰아서 처리하든가, 그도 아니라면 결혼식이 끝나고 부탁했어야지. 한창 놀고 있는데 업무를 진행하는 건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아르메인에서 보낸다는 사람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승낙했다.
“오랜만입니다, 빌라르 경. 다시 뵙게 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아르메인 왕실 기사단 부단장인 빌라르 가넬리. 누군가 나에게 국내 친구를 묻는다면 무덤을 가리켜야 하지만, 국외 친구를 물으면 당당히 답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
다른 사람도 아닌 빌라르와 만나는 거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다. 우리는 3년 동안 아카데미라는 지옥에서 함께 구른 전우니까. 사실 빌라르가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찾아갔을 수도 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백작 각하.”
내 환영 인사에 빌라르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내가 빌라르에게 우정을 느끼는 것처럼, 빌라르도 나에게 우정을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저 딱딱하고 엄격 근엄 진지한 기사가 웃을 리 있겠나.
“백작 각하보다는 대륙 제일 검이라 부르는 게 좋으십니까?”
심지어 저런 농담까지 던질 정도다. 이건 일방이 아닌 쌍방 우정이 맞아.
다행이다. 혹시 졸업 이후 수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왕실 기사단 부단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라서 아카데미 때의 기억을 잊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었다. 우리가 함께 이겨낸 끔찍했던 기억을 승진이라는 대가로 지워버린 건 아닐까 우려했었어.
허나 아니었다. 빌라르는 부단장이라는 자리에 올랐음에도 당시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하하, 편한 대로 불러주십시오. 저도 기사단원이니 칼 경이라 부르셔도 무방합니다.”
“그냥 백작 각하라고 하겠습니다.”
픽 웃음을 흘린 빌라르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백작 각하가 가장 무난한 호칭이기는 하지. 내가 빌라르를 빌라르 경이라 부르니 상대도 칼 경이라 불러도 괜찮지만, 빌라르 입장에서는 입에 영 붙지 않을 거다.
“참, 부인께도 인사를 드려야지요. 아르메인 왕실 기사단 부단장인 빌라르 가넬리입니다.”
“곧 류티스 왕자 저하의 장인어른 되실 분이기도 해.”
내 첨언에 피네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비록 현재의 빌라르는 무작위 귀족이지만, 무려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왕자의 장인이 될 사람이다. 신분과 능력, 직책 삼박자가 고루 갖추어졌으니 조만간 단승 작위라도 받겠지.그렇다면 백작부인 겸 작위 귀족인 피네라도 존중을 표할 필요가 있다.
“제국 감찰성 특임부장, 페넬리아 유스 오브 시르디입니다. 부단장 각하께서 제 남편과 3년간 호흡을 맞추었다는 건 익히 들었습니다.”
“합을 맞추다니, 과분한 말씀입니다. 백작 각하께서 일방적으로 부족한 저를 도와주신 겁니다.”
“제국에 있었다면 능히 황실 기사단의 중추가 되고도 남았을 분이라 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부족하다면 누군들 유능하겠습니까.”
피네의 말에 나와 빌라르의 눈이 어색하게 마주쳤다.
지옥에서 우정을 쌓았어도 남 칭찬에는 인색하고 머쓱해 하는 것이 기사인 법. 졸지에 칭찬한 것을 들킨 나, 칭찬을 들어버린 빌라르는 기분이 오묘할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오묘함이 아닌 긍정적이고 부끄러운 오묘함이.
“백작 각하께서도 아르메인에 계셨다면 제가 상관으로 모시고 있었을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오묘함이 더욱 짙어졌다.
“헌데 빌라르 경. 저야 빌라르 경을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 그지없지만, 휴가 중인 저와 달리 빌라르 경은 업무로 바쁘지 않습니까? 게다가 왕족의 결혼식이 코앞이라 더욱 일이 많을 터인데, 저에게 귀한 시간을 할애해도 괜찮을는지.”
그렇기에 애써 화제를 돌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우 앞에서 머쓱해 하는 모습만 보이다 끝날 수는 없잖아.
그리고 왕실 기사단 부단장인 빌라르가 직접 행차한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보통 단장과 부단장은 왕궁을 떠나는 일이 없으니까. 당장 제국의 황실 기사단만 해도 단장은 황궁 전체 경비, 부단장은 황제 개인 호위를 보지 않던가.
덤으로 왕자의 장인, 왕의 사돈으로 레벨업 할 예정인 빌라르다. 왕실 기사단은 물론, 아르메인 군부 내에서도 빌라르를 왕궁 안에 꽁꽁 숨겨두려고 할 터.
“그런 말씀은 마시지요. 국왕 전하의 과분하고도 황송한 신뢰 덕에 부단장이라는 명예스러운 자리에 올랐으나, 저 역시 왕실과 신민,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기사고,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내입니다. 어찌 각하를 만나는 시간을 헛되게 여기겠습니까.”
‘아.’
갑자기 길어진 말에 편하게 늘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듣기만 하면 우정을 위해 귀한 발걸음을 한 친우의 말 같지만,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영 달갑지 않은 진의가 바로 보였다.
‘부단장도 움직이게 할 지시가 떨어졌다는 말이잖아.’
왕실 기사단이 왕궁 지박령인 건 맞지만 왕실의 명이 있다면 왕궁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도 나와 연이 있다는 빌라르를 보낼 정도다? 나한테 아쉬운 말을 해야 한다는 뜻이지. 그것도 왕실 사람이 나한테.
‘망할.’
방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빌라르가 반가워서 이 당연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어.
개인 자격으로 돌아다니는 나와 달리 빌라르는 철저한 공인이다. 결혼식이 코앞이라 평소보다 더욱 처신을 조심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 빌라르가 먼저 찾아올 일이라면 당연히 인사가 아닌 용무가 있다는 것일 텐데 말이야.
“그거 참 감사한 말씀입니다. 제가 빌라르 경의 시간을 황금처럼 만들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지요.”
일단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달갑지 않은 일 같지만, 그래도 빌라르와의 우정과 여기까지 온 노고를 고려하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내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면 해결할 의향도 있고.
‘누가 보낸 거야 대체.’
그보다 누가 왕자의 장인 될 사람을 심부름꾼으로 보낸 거지? 설마 국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