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73)
로판 속 공무원 873화(874/945)
왕실 기사단 부단장 겸 왕자의 장인 될 사람을 전령으로 쓸 수 있는 자.
아무리 생각해도 최소가 직계 왕족이다. 왕실 기사단 평기사라면 모를까, 부단장 겸 왕자의 장인이라는 호칭은 결코 가볍지 않으니까. 그 정도면 방계 왕족도 함부로 못 대하지.
‘국왕이거나 류티스 중에 하나 같은데.’
그리고 굳이 나에게 사람을 보낼 왕족이라면 아르메인 국왕과 류티스밖에 없다. 접촉도 나름 용무가 있거나 안면이 있어야 가능한 일. 현시점에서 나에게 용무가 있을 사람은 국왕뿐이고, 안면이 있는 사람은 류티스뿐이다. 솔직히 어느 쪽이든 썩 달갑지는 않다.
부인을 내보내서 대련도 해줬고, 결혼식이 끝나면 축하 기념 하늘 베기도 해주기로 했잖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는데 왜 또 접촉하는 거야.
이 이상 나한테 무언가를 바라는 건 양심이 없는 짓이다. 심지어 우리는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 왔지 않나. 아무리 왕의 요청이라도 공인이 아닌 이상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수용할 필요는 없다.
“살리아 저하께서 백작 각하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동생이 제국 아카데미에서 여러 결례를 저질렀을 텐데, 누나로서 감사와 사과를 표하고 싶으시다더군요.”
‘응?’
허나 이런저런 대화 끝에 빌라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국왕도 류티스도 아니었다.
살리아 로벤스. 아르메인 왕국의 1왕녀이자 류티스의 유일한 누나인 사람. 왕세자와 2왕자에 비하면 다소 존재감이 옅으나, 아르메인 왕비를 보필하며 로벤스 왕가의 업무를 처리한다고 알려진 인재.
왕자들이 왕국의 업무를 분담한다면 살리아 왕녀는 왕실, 가족을 돌보는 큰누나 포지션이다.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어도 왕족 입장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지. 어쩌면 동생들에게는 얼굴 보기도 힘든 왕세자보다 눈앞의 살리아 왕녀가 더 두려울 수 있다.
‘무슨 일이지?’
그렇기에 의문은 더욱 커졌다. 살리아 왕녀도 아주 간혹 왕국 업무를 돕는다지만, 주요 분야는 왕실 내부의 일이다. 그런 사람이 나한테 접촉을 시도한다고? 그것도 수년 전에 졸업한 류티스의 학창 생활을 들먹이면서?
분명 심상치 않은 용무 같은데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빌라르의 표정을 읽기에는 워낙 포커페이스가 굳건한 사람이라 어려운 데다, 애초에 빌라르도 살리아 왕녀의 의도를 모르는 것 같았다. 저건 상급자의 의도를 알고 온 대리인이 아니라 단순히 심부름 온 전령의 눈빛이야.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알 수 있어.
‘거절할 수는 없지.’
아무튼 짧은 고민 끝에 살리아 왕녀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용무.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살리아 왕녀 입장에서도 얼마나 다급하고 중요한 용무면 이리 갑작스럽고 뜬금없이 만남을 청하겠나. 타국 왕족에게 빚을 얹는다 생각하면 대면 정도는 무방할 것 같다.
“류티스 저하의 호방함 덕에 저 또한 새로운 길을 보았거늘, 어찌 그것에 감사를 듣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저하와 왕실께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일단은 빌라르의 말에 적당히 겸양을 표했다. 1왕녀가 직접 감사를 표하겠다는데 냉큼 받아들이는 건 좀 그렇지.
그러나 감사에만 겸양을 표하고 사과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류티스의 학창 생활을 떠올리면 난 사과 들을 자격이 있는 것 같기는 해. 그건 왕녀가 아니라 국왕이 했어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저하께옵서 드넓고도 깊은 자비를 베푸셨으니 마땅히 뵙는 것이 옳겠지요. 전 언제든 저하의 부름에 응하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것이.”
내 답에 빌라르는 잠시 망설이더니,
“각하께서 괜찮은 시간을 말씀해 주신다면, 저하께서 직접 오실 겁니다.”
“예?”
이것도 예상치 못한 말이라 놀라고 말았다.
우리 집에 툭하면 놀러 오는 황태녀 때문에 간혹 잊지만, 황족이나 왕족이 신하에게 직접 찾아오는 것은 영광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어마어마한 배려이자 존중이고 치하다. 설령 국적이 다르더라도 그 의미는 퇴색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타국 귀족에게 찾아오는 것이니 더 의미 깊은 일이지. 그 타국이 아르메인의 숙적이자 잠재적 적성국이었던 제국이라면 더더욱.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왕녀 저하의 시간을 헛되게 만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군요.”
지금이라도 만남을 무르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지만 애써 억눌렀다.
취소했다가 뒤늦게 일이 터지면 나만 죽어나갈 테니.
만남은 나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예의상 ‘전 휴가 중인 백수니 언제라도 괜찮습니다.’ 라고 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빌라르가 돌아간 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올 줄은 몰랐다.
“정식으로 인사드려요, 타일글레헨 백작. 아르메인 왕국의 1왕녀인 살리아 로벤스라고 해요.”
치마 끝자락을 살며시 잡아올리며 인사를 건네는 살리아 왕녀. 전형적인 레이디의 모습이었지만, 새빨간 머리카락은 저 사람도 류티스의 혈족이라는 걸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조금 두렵다. 내가 아르메인에서 본 빨간 머리는 류티스와 아르메인 국왕뿐이었지. 애석하게도 둘 다 정상과는 아득하게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혹시 너도…?’
굉장히 실례되는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이미 내 마음속 살리아 왕녀는 경계 대상이었다. 한 명만 보고 여럿을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나, 두 번이나 겪었으면서 세 번을 경계하지 않는 것도 어리석으니까.애초에 살리아 왕녀가 정상일 확률, 비정상일 확률 중에서는 후자가 근소하게 더 높다.
물론 살리아 왕녀를 류티스 수준의 광인으로 여기는 건 아니다. 류티스 같은 놈이 한 핏줄, 한 세대에 둘이나 나오면 저주받은 핏줄이지 그게.
다만 아르메인 국왕도 류티스의 친부다운 모습을 은은하게 풍겼다. 이는 로벤스 왕가의 태생 자체가 다소 독특하다는 의미니, 살리아도 로벤스인 이상 그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타일글레헨 백작,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입니다. 왕녀 저하를 뵙게 되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일개 왕녀를 보는 것이 영광이라니요. 대륙 제일 검을 본 제가 더 영광이죠.”
작게 미소를 지은 살리아 왕녀가 피네에게 시선을 돌리니, 피네도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타일글레헨 백작부인인 페넬리아 유스 오브 시르디라고 합니다.”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들었어요. 아국 기사들을 상대로 17연승이나 거두었다고요? 아르메인의 왕녀로서는 웃기 어려운 일이나, 한 사람의 아르메인인으로서는 감탄했습니다.”
더욱 짙은 미소를 지은 살리아 왕녀는 피네의 양손을 잡았다.
자신은 대련 결과에 아무런 유감이 없으며, 도리어 뛰어난 무인인 피네를 존중하고 경외한다는 어필. 나와는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강력한 어필인지라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점점 속이 타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로벤스의 피를 이은 왕녀가 타국 귀족에게 찾아온 것도 불안한데, 저렇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라. 이 모든 것이 폭탄을 위한 빌드업이라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하다.
“저하.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저하께서 귀한 발걸음을 주신다길래 미약하게나마 다과를 꾸려봤습니다.”
“갑자기 방문한 것인데 이런 환대라니요. 백작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라는 직접적인 표현에 입술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
타일글레헨 백작과 대면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도 부담이 큰 도박수였다.
부왕 전하, 왕세자인 큰 오라버니, 백작과 연이 있는 류티스 정도라면 모를까, 나는 백작을 만날 이유도 안면도 없는 사람이니까. 괜히 백작과 접촉하면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밀회니 뭐니─ 그런 정신 나간 이야기가 돌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백작을 찾아갔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소문을 두려워하여 침묵을 지키는 것보다, 백작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기에.
‘다들 미쳤어.’
백작과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면서도 속으로는 이 자리에 없는 원수들을 욕했다.
다들 미쳤다. 어딘가 미쳐버린 것이 분명하다. 부왕 전하도, 큰 오라버니도 제정신이 아니야.
‘검묘에서 하늘을 베다니.’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떻게 그런 정신 나간 발상을 하는 거지?
아니, 뭐, 그래. 솔직한 심정으로는 제국의 무인이 아르메인의 하늘을 베는 것도 찝찝하다. 하지만 하늘을 베는 행위 자체는 아르메인의 기사들에게 감동을 주고, 더욱 정진할 계기를 줄 수도 있다.
인간의 몸으로 하늘을 베는 경지. 그런 경지에 오른 무인을 본다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최소’ 하늘을 베는 것이라 인식할 테니까. 어쩌면 우리 아르메인에서 하늘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검묘는 아니지. 드넓은 아르메인 왕국 내에서도, 화려한 라두스 내에서도… 왜 하필 검묘인 건데…
‘선조들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아르메인을 건국하신 위대한 초대 국왕 전하와 개국공신들. 역대 국왕 전하와 아르메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명장들. 그런 분들의 애검이 자리한 장소가 검묘다. 우리 아르메인의 총의가 모이는 성지가 검묘다.
그런 검묘에서 제국의 무인이 하늘을 베어? 이거 해석하기에 따라 ‘제국이 아르메인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라고 여길 수도 있다.
“우리의 위대한 선조들이라면 분명 기뻐할 거다. 일평생 검을 위해 살아간 분들에게 생전 보지 못한 경지를 보여드리는 것 아니냐.”
“맞습니다. 어쩌면 저희의 꿈에 나와 크게 치하하실 수도 있습니다.”
문득 부왕 전하와 큰 오라버니의 말이 떠올랐다.
꿈에 나오기는 하겠지. 치하가 아니라 멱살을 잡거나 뺨을 때리기 위해서.
‘아닌가?’
이제는 슬슬 나 자신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혹시 우리 선조들은 하늘 베기를 보면 좋아하실까? 나 혼자 분위기를 망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야.’
허나 불신은 짧았다. 모두가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간다고 그곳이 옳은 길은 아니잖아? 내가 맞는 거야. 분명 내가 맞아.
그래서 타일글레헨 백작을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 부왕 전하를 설득하는 건 글렀으니, 백작의 입에서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하늘 베기는 못 할 것 같습니다.’ 라거나, ‘우리 다른 장소에서 합시다.’ 라는 말이 나오게 해야 한다.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살면서 본 검 든 남자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이상했는데. 저 사람은 그중 최고봉인 대륙 제일 검 아닌가? 상상 이상의 기행을 발휘하는 사람이면 어쩌지?
불안해졌다. 타일글레헨 백작을 설득하는 것도 실패하면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별장으로 도망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검묘에서 하늘이 갈라지는 꼴은 보지 않을 테니까.
***
한 20분 정도 떠들었을까. 살리아 왕녀가 용건을 꺼냈다.
그리고 용건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시대의 양심이 여기 있다.’
대충 길게 늘리고 아름답게 포장하기는 했지만, 요약하면 ‘검묘에서 하늘을 베는 건 피해 달라.’ 라고 부탁한 살리아 왕녀.
로벤스 왕가에도 정상인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말았다.
‘왜 하필.’
다만 그 정상인이 1왕녀라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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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왕녀가 아니라 왕세녀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