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74)
로판 속 공무원 874화(875/945)
외눈박이가 넘치는 국가에서 본 두눈박이. 그것도 로벤스 왕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강한 두눈박이.
빌라르처럼 윗사람에게 치이느라 한쪽 눈을 스스로 감아야 하는 가련한 두눈박이가 아닌, 당당히 자신의 눈을 지킬 수 있는 두눈박이가 나타났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가.
‘역시 세상이 그냥 망하라는 법은 없구나.’
멸망 직전의 국가에는 반드시 구국의 명장이 나오며, 망국에도 세 명의 충신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 역사가 증명한 진리다. 전자는 어느 바다의 충무공이고, 후자는 어느 중원 왕조의 삼걸이 있지.
물론 세상은 넓고 역사는 길다 보니 구국의 명장이나 세 명의 충신이 없는 나라도 많겠지만, 아르메인은 제국의 뒤를 잇는 강대국이다. 어마어마한 인재풀을 자랑할 텐데, 미쳐 돌아가는 나라를 보며 탄식할 충신, 능신은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게 국왕의 직계 자식이라면 더욱 기꺼운 일이다. 신하의 쓴소리보다는 딸의 조언이 더 잘 먹힐 테니.
‘이게 정상이지.’
그리고 가슴속에 몰래 품고 있던 불안감, 살리아 왕녀를 아르메인 국왕이나 류티스 같은 위험 분자로 여기던 무례함을 빠르게 내던졌다.
이렇게 상식적이고 정의로우며 행동력 넘치는 사람을 그 미친 빨간 머리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다니. 이제부터 살리아 왕녀의 적발은 마르나 첫째 장인어른 같은 아름다운 적발이다. 아무튼 그렇다.
‘진짜 막막했었는데.’
이윽고 속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내 속을 읽는다면 ‘어차피 황제도 아르메인 국왕도 승낙한 건데, 그냥 하늘만 베고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니냐?’ 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명분으로만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철저히 명분으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다. 명분이 중요하다는 건 인정하나, 가끔 명분으로도 완전히 억누를 수 없는 양국 간의 감정과 역사가 존재하는 법.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성국이나 마찬가지였던 국가의 우위를 인정하고, 그 국가의 상징인 무인이 자기 나라 성지에서 무력 행위를 한다? 이거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소중화라고 정신 승리하던 조선에 연성공(국적: 청나라)이 방문해서 가르침을 주는 꼴이잖아. 그것도 어디 평범한 서원이 아니라 종묘에서. 심지어 자국 왕의 초청으로.
‘정상적인 국가에서 그딴 일이 벌어지면 최소가 쿠데타다.’
아르메인 국왕을 포함한 대부분의 무인들이 강자를 동경하고 경외해서 망정이지, 만약 그런 극단적 숭무주의 성향이 조금이라도 옅었다면 반드시 소란이 일어났을 일이다. 어쩌면 국왕에게 강력한 의문과 반발을 제기하며 내전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같이 엮인 나도 귀찮아진다. 아니, 솔직히 당장은 괜찮더라도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서 두렵다.
‘다시 경쟁 관계가 되면 심심할 때마다 두들겨 맞겠지.’
지금은 양국의 관계가 양호하기에 국빈 대우를 받지만, 시간이 흘러 제국과 아르메인의 관계가 다시 과거로 회귀한다면 난 아르메인의 제1 원수가 된다. 감히 아르메인의 성지에서 아르메인의 자존심을 짓밟은 역적 새끼가 되는 거야.
그러면 아르메인은 제국과 대립할 때마다 내 이름을 들먹이며 적개심을 드높이겠지. ‘타도 칼 크라시우스’ 같은 내부 구호로 아르메인의 단결력을 높일 터.
반대로 제국은 ‘어디서 검묘 하늘 갈라지는 소리 안 나냐?’ 같은 팩트로 아르메인을 조롱하고 짓누를 미래가 뻔하다. 어느 쪽이든 저택에서 숨만 쉬던 나는 양국의 분쟁 때마다 이름이 불리고, 그 업보는 내 아이들에게도 이어질 확률이 높다.
“저 또한 검묘의 위상과 숭고함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타국인으로서 검묘에 방문할 수 있는 건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나, 참람하게도 검을 휘두르는 건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살리아 왕녀에게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내가 지금까지 조용했던 건 나 혼자 발버둥 쳐도 달라지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황제와 국왕 사이에 협의가 있었는데 제국백 하나가 끼어든다고 뭐가 변하겠나. 오히려 괘씸죄로 두 번 베라고 할 텐데.
그래서 애써 양국의 평화는 굳건할 거라고, 설령 틀어지더라도 난 외무성이 아니라 감찰성이니 상관없다고 정신 승리 중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공직에 오른다면 국내에서만 활동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하늘을 베어내는 것이 아르메인 기사들에게 작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무리 기사들의 정진이 중요하더라도, 선조들의 안식보다 중요하지는 않겠지요.”
“백작의 말이 옳아요.”
내 강력한 호응에 살리아 왕녀도 눈을 반짝였다. 혹여나 내가 시큰둥하면 어쩌나, 혹은 검묘에서 무력시위를 할 생각이 가득한 놈이면 어쩌나 걱정했던 모양이다.
대체 나를 얼마나 흉악하고 막 나가는 놈으로 보고 있던 건지 통탄스러울 따름이지만, 나도 살리아 왕녀를 어느 빨간 머리 부자와 비슷한 재앙으로 여기고 있었지. 이걸로 마음의 부채는 퉁치자.
“저 또한 무를 숭상하는 아르메인인으로서 검으로 하늘을 베는 무위가 보고 싶어요. 하지만 모든 것에는 적절한 장소가 있는 법 아니겠어요? 지고한 군주의 즉위식을 빈민가에서 하지 않는 것처럼, 대륙 제일 검의 축하는 마땅히 보다 활력 넘치고 화사한 곳에서 이루어져야 하겠죠.”
요약하면 무덤 같은 곳에서 깽판 치지 말고 좀 정상적인 곳에서 하자는 말. 너무 공감되는 말이기에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부왕 전하께 장소에 대한 의문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정녕 검묘가 옳은 것인지 말이지요.”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자세한 설명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시름이 담긴 듯한 한숨이었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어떠한 말보다 그 한숨이 친절하고 세세했으니.
“…그래도 백작이 장소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부왕 전하를 더 강하게 설득할 수 있어요.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하늘을 베는 당사자가 다른 장소가 편하다는데 어쩌겠어요. 기사들은 능력이나 노력 말고도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서도 승패가 갈리는 법. 하늘을 베는 일이라면 더더욱 최고의 몸과 정신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하늘 베기는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지만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왕녀가 알아서 변명거리를 만들어주는데 왜 사양하겠어.
“다만 부왕 전하는 제가 설득해도 황제 폐하는…”
“황제 폐하께서는 양국의 우호를 위하여 아르메인 국왕 전하의 요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장소는 폐하께 있어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시면 폐하께서도 동의하실 겁니다.”
“그건 다행이군요.”
작게 한숨을 내쉰 살리아 왕녀는 찻잔에 남아있던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다 식었다지만 제법 양이 많았는데. 왕녀치고는 호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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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준 백작에게 다시 감사드려요. 다음에 만날 때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살아있는 복자께서는 부디 저희의 앞날을 기도해 주시길.”
“…아, 예. 물론이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훅 치고 들어온 살리아 왕녀의 말에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는 복자. 황제는 주로 놀릴 때 자주 쓰는 칭호지만, 설마 왕녀도 악의를 가지며 한 말은 아닐 거다. 진심으로 복자의 기도를 바라는 절박한 상황이라는 거겠지.
좋아. 당분간은 아침 점심 저녁마다 기도한다.
***
살리아가 대면을 청하길래 기꺼이 응했다. 부인과 함께 왕가의 일을 맡고 있는 아이인지라,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얼굴을 보기 힘든 아이다. 온 가족이 모이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1주에 한 번은커녕 2주에 한 번 보기도 어려웠지.
그런 아이가 먼저 찾아왔다. 아비로서 기쁘기도 하고, 군주로서 의아한 일이지 않겠나.
“타일글레헨 백작도 검묘에서 검을 드는 걸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리고 살리아는 나를 보자마자 딱 예상한 주제를─ 그러나 다소 놀라운 내용을 입에 담았다.
‘그새 백작과 만나고 온 것인가.’
살리아가 검묘 하늘 베기를 꺼려 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이후로, 아이들 중 유일하게 내 마음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으니.
다만 단순히 나를 설득하는 걸 넘어 백작까지 만나고 왔을 줄은 몰랐다. 설령 만나더라도 다소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누구 딸인지 참 똑 부러진 아이야.
“류티스의 결혼을 위해 이 아르메인까지 와준 사람이고, 하늘을 벤다는 어마어마한 위용을 선보일 사람입니다. 그러니 초대한 주인으로서 손님의 마음을 다독이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검묘에서 검을 휘두르는 걸 망자의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라 불편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비서처럼 차분하고 딱딱하게 입을 여는 살리아를 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발 빠른 대처와 괜찮은 명분. 70점 정도 주마.”
“…예?”
“잠시만 기다리거라.”
멍하니 나를 보는 살리아를 뒤로하고 서랍장을 뒤졌다.
“자, 이 부분을 읽으면 된다.”
이윽고 세월의 흔적이 담긴 책을 꺼내 살리아에게 건넸다. 친절히 읽어야 할 부분을 펼친 채로.
떨떠름한 표정으로 책을 받은 살리아는 조용히 내가 가리킨 부분을 읽기 시작했고,
“부, 부왕 전하?”
다급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바라봤다.
“다 읽었느냐?”
“이, 이, 이건 대체…”
“보다시피 초대 국왕 전하께서 남기신 유훈이다. 그분께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에서 살아가는 맹수들과 비교하면 나약하나, 끊임없이 발전하기에 아름다운 존재라 하셨지.”
여전히 당혹스러운 듯 손을 떠는 살리아. 그런 살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렇기에 그분은 인간이 쌓아갈 수백 년, 수천 년 역사를 직접 보고 싶어 하셨다. 죽어서도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역대 아르메인 국왕들, 아르메인을 지탱한 위대한 기사들을 그분의 애검 곁에 묻은 것이지. 그것이 검묘의 기원이다.”
어느새 살리아는 눈동자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망자의 안식이라는 강력한 명분이 순식간에 논파됐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그러니 살리아. 검묘에 계신 분들은 하늘 베기를 보고 기뻐하실 거다. 만일 우리가 다른 곳에서 하늘을 벤다면, 어딜 감히 좋은 구경을 후손들만 보냐고 역정을 내실 터.”
“…부왕 전하.”
“말하거라.”
“왜… 이걸 숨기고 계셨던 거죠?”
딱딱했던 말투가 부드럽게 풀렸다. 동시에 미약한 열기가 깃들었다.
“그야 이르게 공개했다면 네가 이걸 논파할 명분을 가지고 왔을 테니까. 이 아비는 우리 딸이 똑똑한 걸 잘 안단다.”
“아버지!”
솔직한 대답에 살리아는 빽 소리를 질렀다.
놀리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진심이다. 우리 딸에게 충분한 여유를 준다면, 이 초대 국왕 전하의 유훈을 반박할 논리와 명분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살리아에게는 충분한 여유가 없다.
‘완벽해.’
선조님들. 이 후손이 당신들을 위해 이렇게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