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75)
로판 속 공무원 875화(876/945)
살리아 왕녀와 만나고 정확히 이틀 후. 이번에는 아르메인 국왕이 접촉을 시도했다.
국왕이 찾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 사흘 전에 찾았다면 무슨 일 때문에 부르나 걱정이 많았을 텐데, 살리아 왕녀가 다녀간 이후에 나를 찾는다?
‘해냈구나.’
아무래도 살리아 왕녀가 국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왕녀는 하늘 베기 시연 장소를 검묘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에 성공하고, 국왕은 갑작스러운 장소 변화에 양해를 구하기 위하여 연락하는 걸 거다.
분명 그럴 것이다. 살리아 왕녀가 보였던 총기, 하늘 베기를 시연할 당사자의 지지, 망자의 안식을 방해할 수 없다는 명분, 황제의 방관 등. 아르메인 국왕을 설득할 요소는 충분하니까.
‘이제 됐어.’
속으로 안도와 감동이 섞인 눈물을 흘렸다.
검묘가 아니라면 훗날 양국의 관계가 뒤틀려도 나한테 돌아올 대미지는 적다. 양심상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검묘가 아니라면 ‘느그 왕이 부탁했는데 어쩌라고.’로 밀고 나갈 수 있잖아. 꼬우면 느그 국왕한테 불평해.
라고, 한 30분 정도 생각했었다.
“생각해 보니 백작에게 검묘를 보여준 적이 없더군. 이거 참, 검묘에서 하늘을 베어야 할 사람에게 정작 장소는 보여주지 않다니. 민망하기 그지없다네.”
국왕에게 이끌려 검묘로 납치되기 전까지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왕궁에 방문한 것인데, 마치 내가 방심하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가차 없이 낚아채더라.
그렇다고 도망치기에는 검묘가 왕궁 깊숙한 곳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도망치면 왕궁에 잠입하여 무단으로 돌아다니는 외부인이 되어버린다. 왕국의 심장인 왕궁을 버젓이 돌아다니는 스파이가 되는 거야.
‘설마 노린 건가?’
치가 떨렸다. 살리아 왕녀의 행동력을 생각하면 이미 국왕에게 장소 이전을 권유했을 터. 그렇다면 국왕의 귀에도 ‘백작이 검묘에서 하늘을 베는 걸 꺼려 해요.’ 라는 말이 들어갔다는 의미다.
그런 상황에서 나한테 검묘로 가자는 말을 하면 피할 가능성이 높으니, 검묘 얘기를 쏙 빼고 일단 왕궁으로 부른 것이다. 내가 장소 이전을 기대하며 방심할 수 있도록. 왕궁에 도착하면 바로 검묘로 끌고 갈 수 있도록.
‘잔인한 인간.’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국왕이 정말로 납치를 위해서, 검묘 하늘 베기를 강행하기 위해서 치졸한 수 싸움을 벌였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당사자인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희망이 눈앞에서 사라진 내가 원흉을 미워하겠다는데.
‘왜 실패한 거지?’
이윽고 좌절과 슬픔은 의문으로 변했다.
솔직히 나와 살리아 왕녀가 마련한 명분은 100점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략 90점 정도는 받을만한 명분이었다. 아르메인 국왕이 조금만 정상적이라면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협의 대상인 황제는 어디서 하늘을 베도 상관없다고 하지, 당사자인 나는 검묘에서 망자의 안식을 깨는 게 꺼려진다고 하지, 자기 딸인 왕녀는 꾸준히 반대하며 더 좋은 장소를 찾자고 하지. 이 정도면 오히려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국왕은 기존 방침을 유지했다. 망자의 안식이나 딸의 반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묘 하늘 베기를 강행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결과야.
‘전대 국왕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윽고 전대 아르메인 국왕은 어떤 심정으로 현 국왕을 왕세자로 삼았을지 궁금해졌다. 얼마나 큰 그림을 그렸길래 이런 사람을 차기 국왕으로 삼은 거야.
혹시 왕세자 시절에는 철저하게 정상인 코스프레를 했나? 아니면 전대 국왕도 정신이 나간 인간이라 현 국왕을 마음에 들어 했나?
제발 후자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만약 후자라면 로벤스 왕가 자체가 맛이 간 핏줄이라는 거니까. 단순히 이번 세대만 특이한 것이 아닌, 수백 년에 걸친 모든 핏줄이 전부.
“어떤가, 백작? 이곳이 우리 아르메인의 심장이자 성지인 검묘일세!”
‘그걸 아는 인간이.’
자부심 가득한 국왕의 목소리에 탄식이 나올 뻔했다.
검묘가 심장이자 성지인 건 아는구나. 난 당신 머릿속 검묘는 동네 공터나 뒷골목 정도인 줄 알았지. 그래서 이렇게 막 나가는 줄 알았어.
“초대 국왕이신 자벨 1세께서 이 땅에 아르메인을 건국하신 이후, 아르메인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영웅들은 이곳에 그 의지를 묻었다네. 비록 그들의 무덤은 따로 있으나, 평생을 함께한 애검이 보관된 곳이라면 제2의 무덤이나 다름없지.”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무인에게 있어 검은 인생의 절반과도 같은 것. 그 절반이 잠든 곳이라면 무덤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지요.”
국왕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면서도 시선은 국왕 뒤편으로 향했다.
제2의 무덤? 그건 그렇다고 치자. 이름부터 검’묘’인 데다 건립 목적도 무덤 비스름한 거였으니까. 몰지각하게 남의 나라 문화나 역사적 장소에 왈가불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검묘가 제2의 무덤이기에, 아르메인의 성지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다.
‘저거 왜 여기 있냐.’
검면에 무어라 글씨가 적혀있는 대검. 검묘에 널린 다른 검들과 비교하면 세월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주 최근에서야 검묘에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는 대검.
그리고 이상하게 나하고 초면이 아닌 대검이 당당히 검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보낸 검이잖아.’
낯선 장소에서 재회한 익숙한 물건에 머쓱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너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선물을 준 나도, 선물로 받은 류티스도 멀쩡히 살아있잖아. 왜 유품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껴있는 건데.
‘암살 예고인가?’
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거 혹시 나나 류티스 중 하나를 골로 보내겠다는 암살 선언 같은 건가? 류티스의 결혼식은 그냥 결혼식이 아니라 피의 결혼식이었구나.
“하하! 백작도 눈치챘군!”
그 와중에 검묘의 역사와 의의에 대해 설명하던 국왕은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내가 보낸 검을 툭툭 건드렸다.
“대륙 제일 검이 보낸 선물이자, 무인이라면 마땅히 가슴에 품어야 할 글귀가 적혀있는 귀한 물건이지. 그래서 특별히 이 검묘에 보관 중이라네.”
“그, 전하. 참으로 황송한 일이오나, 저는 제국인인 데다 아직 살아있는─”
“걱정하지 말게. 끝없는 무의 길에 비하면 그런 건 사소한 문제야.”
아니 이 미친 인간아. 살아있는 사람 물건을 유품 가운데 꽂아두는 게 뭐가 사소해.
‘…사소한 게 맞나?’
이제는 슬슬 나도 헷갈린다. 외눈박이 나라에 계속 머무르는 중이라 그런지, 내 가치관도 외눈이 되어가는 기분이야.
아무튼 그 뒤로 2시간 정도 아르메인 국왕의 안내를 받으며 검묘를 구경하였고,
“피네야.”
“네, 말씀하십시오.”
“이러면 안 되는데 황제가 좋아질 것 같다.”
“…네?”
숙소로 복귀하자마자 피네의 품에 안겨 탄식을 내뱉었다.
어감이 뭔가 이상하지만 진심이다. 아르메인 국왕을 상대하다 보니 황제 정도면 선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새끼가 개새끼기는 해도 예측 가능한 범위의 개새끼지 않나. 하지만 아르메인 국왕은 당장 1초 후의 발언, 1분 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아주 흉악하기 짝이 없어.
‘이러면 안 되는데.’
원통스럽다. 황제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 최악의 상사가 되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올려치기를 당하면 안 된다고.
이렇게 비교 대상이 생기면 정당한 분노를 표출해야 할 때마다 ‘그래도 아르메인 국왕보다는 낫지.’ 같은 정신 승리를 하게 된다고…
‘망할.’
어째 대륙 1위 국가 군주나 2위 국가 군주나 정상이 없냐.
설마 둘 다 맛이 간 사람들이라 양국 관계가 정상화된 건가? 제법 그럴듯한 가설이라 더 미칠 것 같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까.
아르메인 국왕의 검묘 안내 이후로 마음을 접었다. 이제 부질없는 희망 따위 가지지 말고 겸허히 내 미래를 받아들이자.
망자의 안식 같은 건 고려하지 말고 냅다 하늘 베기를 박아버린 다음, 적당히 작별 인사만 남기고 바로 귀국하는 게 좋겠다. 미리 텔레포트 마법사 한 명 부르고 일이 끝나자마자 마법으로 튀면 누가 막겠나.
애초에 하늘 베기까지 시전하면 아르메인에서도 나를 막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너도 나도 갈라진 하늘을 보며 환호하기 바쁘겠지.
‘저승에 있는 양반들도 좋아할 수도 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라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초대 국왕이신 자벨 1세께서는 인간의 발전을 아름다운 예술이라 생각하셨지. 그렇기에 검 하나로 하늘을 가르는 무인을 본다면 크게 기뻐하실 거야.”
검묘 안내를 하던 아르메인 국왕이 넌지시 말했던 말. 나와 살리아 왕녀가 내세웠던 명분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던 말.
검묘에 그 넋이 잠들어있는 초대 국왕이 좋아한다면 더 이상 반발할 수도 없었다. 망자가 그걸 원한다는데 뭐 어쩌겠어. 망자의 안식이 아니라 망자의 기쁨을 위해 노력해야지.
“…자벨 1세께서 상당히 개방적인 분이라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백작도 들으셨군요.”
내 말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살리아 왕녀가 침통히 입을 열었다.
내가 검묘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 찾아온 살리아 왕녀는 어두침침한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결국 설득에 실패했다고.
그 뒤는 패배자 둘의 애처로운 티타임이 이어졌다. 지금처럼 한숨 섞인 불평을 하고, 막막함 가득한 대화를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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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대왕께서 그런 유훈을 남기셨을 줄은 몰랐어요. 그걸 부왕 전하께서 숨기실, 줄도 몰랐고요.”
그보다 기분 탓일까. 방금 살리아 왕녀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나온 것 같다.
사실 이를 백 번, 천 번 갈아도 이상할 거 없는 상황이기는 하다. 일찍 밝히면 논파될까 봐 고의로 숨기고 있었다니. 왜 딸을 상대로 그런 정치력을 보이는 건데. 로벤스 왕가는 가족 사이의 우애가 좋다며.
“그러고 보니 왕녀 저하. 검묘에서 그, 상당히 낯익은 검을 하나 보았습니다만.”
그래도 왕녀를 가만히 두면 젊은 나이에 치아가 상할 것 같아 애써 주제를 돌렸다.
동시에 내가 궁금했던 주제기도 하다. 대체 왜 내가 선물한 검이 검묘에 있는 걸까.
“낯익은 검이요?”
내 말에 살리아 왕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탄성을 흘렸다.
“보셨군요. 하긴, 워낙 잘 보이는 곳에 두었으니 보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만요.”
“참으로 황송하고도 난감했습니다. 분명 검묘는 위대한 무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장소거늘, 멀쩡히 살아있는 제가 끼어든 느낌이었으니 말입니다.”
“아, 그거.”
겸양으로 위장한 추궁에 살리아 왕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 부왕 전하의 검도 있습니다.”
“…예?”
“어차피 죽으면 검묘에 둘 검이니, 미리 둔다고 하셨던가요? 아마 백작이 보낸 검도 비슷한 이유로 둔 걸 겁니다.”
왕녀의 설명에 조용히 찻잔을 잡았다.
이 기괴하고도 파격적인 나라. 난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