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76)
로판 속 공무원 876화(877/945)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니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당연한 일이다. 욕심을 짊어지고 있다면 당연히 마음도 불편하겠지. 당장 내 몸으로 무거운 쌀가마니나 시멘트 주머니를 짊어지고 있다면 육체가 비명을 지르지 않겠나. 마음도 그와 비슷한 원리로 돌아간다.
감히 과분한 것을 품었기에, 큰 욕심을 부리고 있기에 마음이 비명을 지른 것이다. 당연한 이치를 이제야 깨달았어.
‘검묘 말고 다른 곳에서 하늘 베기를 하자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빠르게 털어냈다.
이 문제는 더 생각하지 말자. 이미 결정된 일을 무리해서 바꾸려 하면 나만 피곤해. 아르메인 초대 국왕과 그 전우들, 후예들이 보는 앞에서 인류가 도달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 내 역할은 그것뿐이다. 양국의 관계나 미래의 뒤틀림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다음은 저기로 가볼까?”
아무튼 마음을 비웠기 때문일까. 피네와 즐기던 신혼여행이 더더욱 즐거워졌다. 안 그래도 좋았는데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어.
지금까지는 부부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시름이 있었는데, 이제 그 시름이 사라졌잖아. 과정이 조금 이상하지만 결과만 좋으면 그만 아닐까 싶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선현들의 말씀이 있기도 하고.
“저 성이 자벨 3세가 왕비를 위해 만든 성이래. 반란으로 인해 수도를 잃기까지 했지만, 끝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나?”
언덕 위에 세워진 작지만 화려한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벨 3세가 지시하여 만든, 왕실의 명의가 아닌 왕비 개인 명의였던 자그마한 성. 수백 년 동안 왕비의 장녀로부터 시작된 방계가 소유한 성이었지만, 전대 국왕 대에 이르러 여차저차 다시 왕실의 품에 돌아온 역사적 장소.
오늘날에는 자벨 3세 부부의 끈끈한 사랑과 신의를 상징하는 커플들의 주요 관광지라고 한다. 나랑 피네가 방문하기에는 딱인 장소지.
‘자벨 3세…’
다만 저 성을 만든 자벨 3세가 동생에게 반란을 당하고, 보주를 냅다 투척해 버린 장본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오묘하다.
내가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잊을만하면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동생에게 왕위를 따이기 직전까지 간 범부이거늘. 하마터면 폐주가 될 뻔한 주제에 ‘그래도 그 양반이 부인은 사랑했어.’로 미화되는 건가.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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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저런 성을 만들면 우리 이름이 역사에 남을까?”
내가 침묵을 지키자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여는 피네에게 적절한 핑계를 내뱉었다.차마 죽은 지 수백 년도 더 된 타국 국왕을 욕하는 중이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을 사서 거기에 성을 짓는 거야. 단순히 별장 목적으로 만드는 거라면 도로가 닿지 않아도 좋고, 특산품이 있을 필요도 없어. 우리가 놀러 갈 별장이니 사람이 없으면 오히려 좋지.”
하지만 즉흥적으로 뱉은 핑계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왕위를 따일 뻔한 범부도 성을 만들었는데, 나라고 못 할 게 어디 있겠어.
게다가 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귀족이 성을 만드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양심상 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뒤져보면 성을 만드는 귀족들도 은근 있어.
물론 예산의 한계, 황제의 눈치 등으로 미친 크기의 성은 만들 수 없다. 대신 아담한 사이즈로도 충분히 미적 감각을 뽐낼 수 있지.
“서, 성을 말입니까?”
내 제안에 피네의 눈동자가 급격히 요동쳤다.
평민 출신에서 기사를 거쳐 작위 귀족까지 오른 피네다. 명실상부한 제국의 귀족이자 영지를 가진 부유층이나, 아직 평민 시절의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 성이라는 단어에 저렇게 동요하는 거겠지. 피네한테도 자기 명의 성이 있는데.
‘사실 나도 떨려.’
다만 부부는 닮는 법이라고 하던가. 피네뿐만 아니라 나도 성 건설이라는 말에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돈도 써본 놈이 잘 쓰는 법인데, 나는 재산을 꾸역꾸역 모으기만 하고 쓴 적이 드문 놈이다.
그런 놈이 갑자기 뭐? 성을 짓는다고? 단순히 저택이 아니라 성을?
‘낯설어도 내 선에서 처리해야 한다.’
허나 아무리 낯설고 민망하며 두근거려도 내 선에서, 우리 가문 선에서 처리해야 한다. 괜히 외부로 이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어느 누렁이가 ‘우리 백작이 성을 갖고 싶었구나! 진즉 말하지!’ 라는 말과 함께 성을 투척할 거다.
그런 참사를 두 번이나 당할 수는 없다. 내가 애들이랑 같이 베히모스한테 놀러 갈 때마다 괜히 울적하겠나. 난데없이 주머니에 들어온 영지의 존재감이 너무 찬란하니 그런 거지.
그래도 그 영지는 짐승을 기르기 위해 마련한 땅. 볼 때마다 울적해도 큰 지장은 없으나, 부인들을 위한 성도 그런 식으로 얻으면 곤란하다. 기껏 부부 별장을 마련했는데 꼴도 보기 싫으면 좀.
“성을 지어서 별장으로 삼고, 우리 아이들이 나이를 먹으면 물려주기도 하고, 여차하면 아예 거기서 살자. 은퇴하고 한적한 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은퇴… 한적한 곳에서…”
어쨌든 설득을 이어가자 피네도 솔깃했는지, 내 말을 따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바쁘게 살아가던 부부가 은퇴하고 시골에서 사는 것. 사람에 따라 도시가 좋다는 사람도 있으나, 내가 성을 세우려는 장소는 나와 피네가 처음 만난 장소다. 피네의 제1의 고향이자 제2의 고향인 곳이다. 은퇴 이후 생활을 보내기에는 딱이다.
“괜찮, 습니다.”
“응?”
“저, 저만 그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기쁜 일이지만, 혼자 기쁨을 독점하는 건 비겁한 것 같고…”
한참이나 고심하던 피네는 우물쭈물거리며 거절했다. 그것도 상당히 귀여운 이유로.
“걱정하지 마. 당연히 6개 지을 거니까.”
“…네?”
“서로 가지고 있는 추억이 다른데 하나로 퉁치는 건 성의 없잖아. 각지에 하나씩 짓고, 하나씩 선물할 거야. 자벨 3세는 아내가 하나였지만 난 여섯이니까.”
내 말에 피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설마 성 6개 동시 건설이라는 미친 발상은 상상도 못 한 것처럼.
나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무슨 목걸이나 팔찌 같은 것도 아니고, 성을 선물로 주고자 마음먹었다. 이걸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면 이혼 사유로 충분하다.
그러니 다소 무리하더라도 이게 맞다. 정 돈이 부족하면 황금공한테 부탁이라도 하지 뭐.
‘백지 수표는 많으니까.’
레비아탄에게 황금공을 소개해 준 대가로 받았던 백지 수표. 무려 오시덴 공작가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털어먹을 수 있는 만능열쇠.
그 귀한 물건은 아직 내 침실 서랍장에 고이 보관 중이다.
성 동시 건설 발언으로 피네의 넋이 잠깐 나갔었지만, 회복력이 빠른 피네답게 금방 정신을 되찾았다.
하지만 관광을 지속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아 숙소로 복귀했다. 한 번 나간 정신은 그 뒤로도 여러 번 동요하는 법. 이미 정신적 충격을 입은 피네를 억지로 데리고 다녀봤자 즐거운 관광을 누릴 수 없다.
“정신이 좀 들어?”
“아, 네, 이제 괜찮습니다.”
침대에 앉은 피네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자, 피네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검묘에 대한 미련을 버림으로써 마음이 편해진 상태였는데, 피네가 이런 모습까지 보여주니 더욱 기꺼울 수밖에.
“성이라고 해도 거창할 건 없어. 결국 사람이 살려고 짓는 집 같은 건데, 그게 다른 집에 비하면 좀 클 뿐이지.”
“좀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오.’
조심스레 항변하는 피네를 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설마 피네가 내 말에 반박하는 걸 볼 줄이야.
이게 세월의 힘, 결혼의 힘인 것 같다. 어쩌면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위력일 수도 있고.
‘엄마라.’
슬쩍 창문 밖을 바라봤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져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우나, 대충 이른 저녁 정도는 됐다.
즉, 지금 식사를 하면 다음날까지는 계속 숙소에 있는다는 말. 갑작스레 방문객이 생기지 않는다면 나와 피네만의 시간이 이어진다.
“피네야.”
그리고 나랑 피네는 단련된 무인. 한 끼 정도는 걸러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메리한테는 남동생이 있는 게 좋을까, 여동생이 있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여보를 닮은 남동생이 있는 게─”
“좋아, 남동생. 노력해 볼게.”
아이의 성별은 노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지만, 예의상 노력한다는 말과 함께 피네를 침대에 눕혔다.
아니, 어쩌면 내 노력은 아이의 성별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에넨의 살아있는 복자이자 성인(진)이니, 간절히 기도하면 아이 성별 정도는 정해주지 않을까?
“여, 여보?”
아님 말고. 지금 중요한 건 최소 10개월 후에 볼 미래의 아이의 성별이 아닌 눈앞의 피네니까.
“좋은 곳에서 좋은 기운 받았잖아. 좋은 곳에 사용해야지.”
작게 웃음을 흘리며 피네의 뺨을 매만졌다.
폐위 위기를 겪었던 왕과 그런 왕을 떠나지 않은 왕비의 사랑. 그 사랑의 증거라고 해도 무방한 성을 둘러보았으니, 분명 우리에게도 자벨 3세 부부의 기운이 깃들었을 거다.
물론 우리의 사랑은 자벨 3세를 능가한다. 그래도 사랑에 한계가 없다면 100에 30 정도가 추가돼도 나쁠 건 없지.
“우리 메리. 아빠랑 엄마가 놀러 가서 삐졌을 텐데, 좋은 선물 가지고 돌아가자.”
대답은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
드디어 류티스 왕자 저하의 결혼식 날이 되었다.
‘드디어.’
나도 모르게 눈가를 닦았다.
류티스 저하는 현 왕자들과 왕녀들 중 유독 쾌활하고 독특하신 분. 미혼인 왕족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이나, 결혼은커녕 약혼도 하지 않고 제국 아카데미에서 3년을 보내신 분.
솔직히 아르메인의 귀족으로서, 황송하게도 국왕 전하께 동생이라 불리는 몸으로서 류티스 저하를 많이 걱정했었다. 분명 외견도 훤칠하고, 검술도 훌륭하며, 지식도 부족하지 않은 분이다. 성품도 돌발성을 제외하면 모난 부분이 없는 분이시다.
돌발성이 다소 강하기는 하지만, 인간은 각자 사소한 흠결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겠나. 그렇기에 저하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짝을 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작 마음을 먹지 않으셨지.’
애석하게도, 저하는 아카데미 졸업 이후로도 여인과 관련이 없었다. 오직 검만 잡으며 하루하루를 보내셨다.
아르메인의 기사로서 훌륭한 모습이지만 왕족으로서는 속이 타들어가는 광경이었다. 직계 왕족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허나 그 고민이 오늘로서 끝나게 되었다. 마침내 류티스 저하께서 결혼을 하게 됐다.
‘내 생전에 이런 일이.’
다시 눈가를 닦았다. 아까 닦은 눈물이 아르메인 대원수의 눈물이라면, 이건 저하의 숙부 같은 존재인 네르카프 백작의 눈물이다.
‘아.’
그렇게 홀로 마음을 가라앉히던 중,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빌라르 경.”
“대원수 각하를 뵙습니다.”
곧 류티스 저하의 장인이 될 빌라르 경.
아주 훌륭한 딸을 기른 영웅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