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8)
금화 열 닢과 그 외 여러 지원이 입금돼서 군말 없이 굴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쩔 수 없지, 황태자를 상대로 먹고 튀는 기행을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다른 나라에서 망명도 안 받아줄 거다.
차라리 아무것도 받지 않고 일도 안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방법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할 일이었지.’
입금된 순간부터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내가 고문인 이상 짬처리 당할 일이었다. 결국 내가 하게 될 일이면 그냥 하는 것보다는 뭔가 받고 움직이는 게 낫지 않나. 내 정신 건강을 위해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정신 건강을 걱정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기도 하고.
– 주인님. 잘 지내셨습니까?
통신구를 통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주인이 머무는 시간보다 없는 시간이 더 긴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 다르게 말하면 황족 하나, 왕족 둘, 성자 후보 하나가 머물게 될 저택의 책임자.
“나야 뭐, 늘 그렇지. 집사는 잘 지냈나?”
– 주인님의 은혜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허허 웃으며 답하는 집사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아팠다. 미안해, 오늘부터 즐겁지 못할 거야.
“며칠 후면 저택에 돌아갈 거다.”
– 기쁜 소식이군요. 오늘이라도 주인님을 맞이할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손님도 몇 같이 올 예정인데.”
그 손님의 라인업을 설명하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했다.
– …주인님의 이름에 부족함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가슴 옹졸해지는 라인업을 들은 집사는 잠깐의 침묵 끝에 고개를 숙였다. 주인의 명이니 오직 따른다는 감동적인 반응이지만, 통신구로도 눈가가 떨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언제나 여유롭던 집사가 저럴 정도면 동요가 심한 모양.
“그래. 저택에서 다시 보지.”
괜한 말을 했다가는 부담만 더 줄 것 같아서 급하게 연락을 끊었다. 미안해 집사. 그래도 나도 피해자라는 것만 알아줘. 황태자가 개새끼야, 알겠지?
집사에게 원한 1 스택 정도 쌓은 것 같은 연락을 끝낸 후, 마탑에 가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텔레포트를 써 줄 마법사는 미처 구하지 못했다. 회의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예약을 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요즘은 마탑도 나름 여유가 생기는 시기라 조금만 기다리면 마법사 하나 정도는 충분히 잡아갈 수 있다. 정말 바쁠 때는 사흘 동안 예약이 꽉 차서 답이 없었는데.
그렇게 마탑 로비의 바닥 무늬를 살피며 기다리는 와중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고, 살짝 고개를 드니 마종공이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시발.’
아무나 하나 잡아갈 생각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감히 마탑주를 잡아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아가? 여기는 어쩐 일이니?”
귀를 쫑긋 거린 마종공이 자연스레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어르신, 저한테 왜 이러세요.
“괜찮단다. 앉아 있으렴.”
황급히 일어나려고 하자 어깨를 누르며 도로 앉히는 마종공. 아니, 제가 안 괜찮아서 그러는 건데.
“감사합니다, 각하.”
“손님을 서있게 하는 주인이 어딨겠니.”
하지만 대놓고 말하면 어르신의 기분만 상하게 할 것 같으니 애써 눌러 담았다. 마종공은 의외로 사소한 거에 삐지는 편이니 조심해야 한다. 나이 때문인가.
근질거리는 입과 싸우는 사이 바닥에 끌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한 마종공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제도에는 언제 올라왔니?”
“황태자 전하께서 회의를 소집하셔서 오늘 올라왔습니다. 다시 아카데미로 복귀해야 합니다.”
“회의?”
반응을 보니 마종공은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마탑은 행정부하고 별 연관이 없으니 마종공에게 소식이 들어갈 일은 없지.
“제가 맡은 동아리가 제도에 올 예정입니다.”
“저런.”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이는 마종공. 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제과 동아리에 어떤 놈들이 속해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식이 퍼졌으니까.
“아카데미에서 제도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닌데. 오고 가려면 힘들겠구나.”
“괜찮습니다. 방학 동안 제 저택에 머물기로 해서 오기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이어지는 참담한 소식에는 그 마종공조차 할 말을 잃었다.
“힘내렴.”
그리고 조심스레 내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기 시작했다. 추위에 떠는 유기견을 쓰다듬는 손길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어머니…’
묘하게 어머니의 손길처럼도 느껴져서 마음이 포근해졌다. 오늘 하루 황태자와 장관들의 빠른 짬처리를 당하며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 어쩌면 난 차가운 지원보다는 힘내라는 따뜻한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도 모르던 내 마음을 어머니 마종공께서 눈치챈 것이 틀림없다. 물론 어머니라는 단어를 마종공에게 뱉었다가는 쓰다듬는 손에서 온갖 마법이 튀어나올 테니 내 마음 속에만 간직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렴. 여유가 되면 도와줄 테니.”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힘들다고 공작한테 지원 요청하면 더 힘들어질 것 같은데.
그렇게 한참이나 더 머리를 쓰다듬던 마종공은 잠시 기다리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하루에 하나씩 마시면 된단다. 특히 아침에 마시는 게 좋아.”
작은 유리병이 가득 담긴 상자와 마법사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아, 예.”
“몸에 좋은 거니 잊지 말고 하루에 하나씩. 알겠니?”
“명심하겠습니다.”
만족한 듯 미소 지은 마종공은 그제서야 몸을 돌려 사라졌고, 나와 마법사만 로비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모시겠습니다.”
“아, 그래.”
과정이 이상했지만 아무튼 마법사는 구했으니 된 거지.
***
마탑 밖에서 마나 흐름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막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떠난 것 같다.
‘어쩜 저리 무심한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탑에 왔으면서 인사도 하지 않고 쓱 돌아가려고 한 것이 괘씸하다. 내가 얼마나 각별히 여기는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아가가 왔다는 소식을 당사자의 인사가 아닌 부탑주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마음 아팠다. 예전에도 아가의 소식을 정보부장을 통해 들은 것이 서운하다고 확실히 말했는데, 두 번이나 이러다니.
그래서 이번에는 단단히 혼내주려고 했지만 로비에 축 처져있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변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혼낼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고생하면 안 되는데.’
피곤에 찌든 모습이 다시 떠오르자 덩달아 걱정도 다시 되기 시작했다.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걸까? 잠은 제때 자는 거겠지? 너무 일에만 몰두하면 안 되는데, 스트레스는 풀고 있을까?
한참 자라야 할 어린 나이에 그렇게 고생하면 곤란하다. 아직 살아갈 시간이 훨씬 많은 아이니 어딘가 잘못되면 안 된다. 그래도 다행이지. 마침 포션이 완성되고 마탑에 방문해서.
‘언제 주나 고민이었지만.’
직접 아카데미로 가기에는 곤란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에는 중요한 물건이다. 언제 아가가 제도로 올라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기가 좋았다.
아가에게 준 것은 아가의 피와 나의 피로 만든 포션. 당연히 아가에게 말한 것처럼 몸에 좋은 물건이다. 이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든 물건이고, 어머니의 지식도 담긴 물건이니까.
‘어머니 때에 완성됐다면.’
어머니를 떠올리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나도 기적과 기적이 겹쳐서 만들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만들 수 있었다면,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완성했더라면.
“트릭시. 너는 나 같은 슬픔을 겪어서는 안된단다.”
어머니와 달리 순수한 인간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곁을 일찍 떠나시고 말았다. 어머니도 시름시름 앓다가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 가셨다.
마지막까지 나에게 당부하셨던 어머니의 말씀. 수명이 맞지 않는 짝을 사랑하여 짝을 잃는 슬픔을 겪지 말라는 말씀.
그러니 수명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지는 몰라도, 어머니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어머니 같은 슬픔을 겪는 자들을 위해서.
“존귀하신 마종공 각하를 뵙습니다.”
설마 포션의 완성보다 마음에 품은 상대가 먼저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그 상대 덕분에 포션을 완성할 수 있었으니 실로 운명적인 만남이다. 그래, 내 수명은 아가를 만나기 위해 하늘에게 받은 것이 분명하다.
물론 포션 하나를 마신다고 획기적으로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꾸준히 마셔 효과가 누적되면 언젠가는 그 꽃을 피운다.
“수십 년…”
앞으로 남은 시간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수십 년. 넉넉히 잡아 40년 정도만 마시게 하면 된다. 그러면 아가는 나와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이미 100년이 넘게 홀로 걸어왔다. 수십 년만 더 참으면 누군가와 함께 걸어갈 수 있다. 아가의 나이도 이제 겨우 스물 하나. 수십 년은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
포션의 색깔은 빨강과 갈색의 미묘한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색깔.
‘홍삼인가.’
몸에 좋다는 말과 함께 받아서 그런지 묘하게 홍삼액이 생각나는 비쥬얼이다. 심지어 하루에 하나씩 먹으라는 말도 똑같다. 어머니 마종공, 아들에게 이런 것도 챙겨주시고 감사합니다.
일단 하루에 하나라고 했으니 당장 하나 까서 마셨다. 마종공이 만든 물건이니 효과는 확실하겠지. 딸기향이 은은하게 퍼져서 약이 아닌 음료를 마시는 것 같지만 아무튼 난 마종공을 믿는다.
그리고 강한 믿음과 함께 마셔서 그런지 마시자마자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플라시보 효과 장난 아니네.
‘매일 마셔야지.’
정말 효과가 즉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괜찮다고 느낀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거 마탑에서 돈 받고 팔면 계속 사서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