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82)
로판 속 공무원 882화(883/945)
다음날, 재무성 장관이 저택에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내 조언대로 강제 소환 당할 바에는 자기 발로 출근하는 것을 택한 모양이다.
그게 현명한 선택이기는 하다. 출근이라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면 과정이라도 아름다운 게 낫지 않겠나. ‘폭풍을 피하려고 휴가까지 썼다가 실패한 장관 vs 갑자기 휴가를 쓸 만큼 급한 일이 있었지만 국익을 위해 바로 출근한 장관’이라면 누구나 후자를 택할 것이다.
“백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누구나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 또한 그 후자에 속한 놈이다.
‘이번 일은 무조건 나까지 불린다.’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침통히 눈을 감았다.
감찰성은 국내 담당 부서기는 하나, 나는 하늘 베기라는 압도적 퍼포먼스 덕분에 대외용 인력으로도 쓰이고 있다. 제국의 무력을 타국에 과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단순한 방법이 나를 투입하는 거니까.
그런 상황에서 무려 6개국이 얽힌 전쟁이 터졌고, 제국은 이 전쟁에 개입해서 전쟁을 끝내야 하는 상황이다? 내가 호출을 받을 확률은 해가 동쪽에서 뜰 확률보다 미세하게 낮다.
당연히 내가 일시적으로 감찰성 장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황제의 신하는 제국의 모든 귀족과 평민들이지, 공무원들이 아니니까. 백수 귀족이라도 황제가 까라면 까야 한다.
“허, 참. 설마 백작이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내가 자발적으로 찾아오자 황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일시적이라지만 백작은 현재 공직과 연이 없는 야인이지 않나. 야인이 제국을 위해 자청하여 짐을 찾아오다니. 백작의 충심은 실로 아름답고도 고귀할 따름이지.”
“황송한 말씀이옵니다, 폐하.”
“또한 백작의 숭고한 결단에 감사하네. 백작이 오지 않았다면 짐은 차마 백작을 부르지 못했을 터이니.”
‘지랄하지 마.’
목 끝까지 치솟은 욕설을 겨우 삼켰다.
이 새끼. 어차피 그물에 들어온 물고기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어. 내가 진짜로 오지 않았다면 바로 소환령을 내렸을 새끼가.
“마침 오늘 점심에 장관 회의를 열 예정이었으니, 백작도 짐과 함께 들어가세. 다른 장관들은 백작이 장관직에서 내려온 걸 모르니 상관없을 거야.”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너무 감사해서 인중에 펀치 한 방 날리고 싶다.
이제는 명치도 부족하다. 제발 인중에 딱 한 대만.
“참, 백작.”
“예, 폐하. 하명하소서.”
“근래 외무성 장관과 만난 적은 있는가?”
“아르메인에 방문하기 전에는 통신구로 연락을 나누었으나, 귀국한 이후로는 안부 인사 외에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았습니다.”
6개국 전쟁 사태 이후로는 본 적이 없다는 말. 황제도 딱 예상한 답변이었는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이 장관을 좀 달래주게. 백작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면 외무성 장관의 분노도 조금은 가라앉을 거야.”
그 말에는 차마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황제도 눈치를 보고 궁내성 장관이 벌벌 떨며 재무성 장관조차 도망을 친 사태다. 그 셋도 태풍을 피하기 위해 노력 중인데, 나라고 크게 다를 것이 있을까. 괜히 말을 붙였다가 태풍에 갈기갈기 찢기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도 내가 외무성과 외무성 장관에게 빚을 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서는 최대한 말을 붙여야 한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다면 갈기갈기 찢길 걸 각오해서라도 외무성 장관을 달래야 한다. 나를 배려해 줬던 사람이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다면, 올바른 길로 조정하는 것 또한 빚을 진 자의 도리이니.
설마 저렇게까지 눈이 돌아갔을 줄은 몰랐다.
“감히 제국의 중재를 무시하고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어찌 유일무이한 제국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비로운 중재안을 거부한단 말입니까! 평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외면하고 전란을 택한 류튼과 바젠의 속내는 흉측하고도 사특할 것이 분명합니다!”
행정부의 모든 장관들은 물론, 황제까지 착석한 자리에서 열변을 토하는 외무성 장관.
“제국은 대륙의 질서를 수호하는 위대한 국가로서, 이 일을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제국의 드높은 위엄을 단호히 선보여야 합니다!”
어째 열변을 토할수록 눈에 흰자위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하는 외무성 장관.
“이제 온건책이 통할 시점은 지났습니다. 저들이 제국의 인내심을 마지막까지 보았으니, 이제는 제국의 강인함을 보여주어야겠지요!”
강인함이라는 표현에 장관들 사이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저게 제국의 무력 개입을 뜻하는 말이라는 건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집 티티도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외교관의 입에서 저런 발언이 연신 쏟아져 나오는 건 미쳤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수십 년 동안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외교적 수사가 일상 언어보다도 익숙해졌을 외무성 장관이다. 자신의 위치와 의무를 명확히 알기에 철저히 두루뭉술한 말을 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강인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같은 다소 직설적인 말을 했다? 이건 장관 임기의 마지막 불꽃으로 류튼, 바젠 응징을 택하겠다는 말이다.
물론 마지막 불꽃인지 아닌지는 황제의 결정에 달렸지만.
“외무성 장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국의 충성스러운 친우들은 이웃 국가들의 횡포에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삿된 욕심을 품었던 쿼로노스는 다시금 분수에 맞지 않는 탐욕을 부리고 있지요.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입니까.”
모두가 어색한 침묵을 지키는 사이, 외무성 장관의 열변에 맞서 조심스레 입을 연 사람은 전쟁성 장관이었다.
“류튼과 바젠 또한 불손하기 그지없습니다. 어찌 제국의 자비로운 중재를 무시하고 제 욕망을 추구한단 말입니까. 이는 외무성 장관의 말씀대로 최종 권고를 모색해야 할 사태입니다.”
마치 전쟁을 지지하는 것처럼 말을 잇던 전쟁성 장관은 잠시 헛기침을 하였고,
“그러나 제국은 대륙 열국의 어버이입니다. 못난 자식이라도 보듬어야 하고, 사고를 친다면 가혹한 매보다는 부드러운 꾸짖음을 먼저 동원해야 합니다. 자식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엇나가려고 한다면 눈물을 머금고 매를 들어야 하겠지만, 아직 류튼과 바젠은 강을 건너기 전입니다.”
아직 외교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외무성 장관을 달랬다.
조금 기묘한 광경이기는 하다. 외무성 장관이 전쟁을 외치고, 전쟁성 장관이 외교적 해결을 주장한다라. 아무리 봐도 역할이 바뀐 거 같은데.
“훈계, 좋지요. 허나 저들은 이미 제국의 권위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여기서 자비를 베풀어도 저들은 그것을 관대함에서 오는 자비가 아닌, 절박함에서 오는 구걸로 착각할 것입니다! 이는 제국 역사에 영원토록 남을 참사입니다!”
그러나 외무성 장관의 분노가 과격하기는 해도 외교에 초점이 맞춰진 것을 보면, 각자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한 듯하다.
그렇게 믿고 싶다. 차라리 외무성 장관이 분노 속에서도 이성 한 조각은 품고 있다 여기고 싶어.
“마침 레온은 이전의 특수 군사 작전을 계기로 제국의 연장선이 되었습니다. 레온을 거쳐 쿼로노스로 진입할 수 있으니, 무력 개입도 충분히 동원할 수 있는 카드입니다.”
난데없는 정쿼가도 선언에 흠칫하고 말았다.
레온이 왕가 교체 이후로 제국과 아르메인의 놀이터가 된 건 맞다. 아르메인의 영향권인 북부라면 모를까, 남부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도 명목상 타국인 레온을 거쳐 또 다른 타국을 타격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제국군이 레온에 주둔하는 건 ‘평화 유지 및 치안 확보’인데, 정작 제국군이 레온을 통행로 삼아 전쟁을 일으킨다? 이건 다른 국가들도 기겁을 하며 제국 외무성의 문을 절박하게 두드릴 사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전쟁성 장관의 언성도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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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군이 레온을 거쳐 타국을 침공한다면, 외무성과 함께 타국의 욕을 처먹을 부서는 전쟁성이니까. 전쟁성 장관이 보통 또라이가 아니라며 온갖 욕을 푸짐하게 먹을 테니까.
“외무성 장관! 제국은 북방 정벌이라는 국운을 건 전쟁을 마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상황 폐하의 영민하신 결단과 충용무쌍한 장병들의 분투로 인해 피해는 적었으나, 수십만의 대군이 북방에 발이 묶여있었습니다! 지금도 북방의 치안을 위하여 적지 않은 장병들이 여전히 북방에 있습니다!”
어느덧 외무성 장관 원맨쇼는 두 장관의 프리스타일 디스전으로 변모하였다.
‘환장하겠네.’
장관들이 어전에서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경이로운 광경에 절로 가슴이 옹졸해졌다.
다만 외무성 장관의 입장과 전쟁성 장관의 입장, 둘 다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이기에 어느 쪽을 탓하기도 애매했다. 이미 물을 먹었으니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는 외무성 장관의 주장도, 대토벌 전쟁-북방 정벌에 이어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는 건 무리라는 전쟁성 장관의 주장도 일리가 있으니.
그렇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다가 우연히 황제와 눈이 마주쳤고,
‘안 달래고 뭐 하냐.’
‘저걸 어떻게 달래 미친놈아.’
다소 의역이 섞인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밉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밉다. 전쟁을 일으킨 류튼과 바젠도, 제국한테 깝죽거리다 왕위와 거리가 멀었던 3왕자가 즉위해 버린 쿼로노스도 밉다.
당연히 겨울 삼국에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너네는 굶어 죽기 전에 그냥 집에나 들어가 있어.
***
장관 회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머리가 뜨거운 상태로 논쟁을 이어가 봤자 적절한 결론이 나오지 않으니, 실로 시의적절한 휴정이었다.
폐하께는 실로 송구스럽고도 죄스러울 따름이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도 신성한 어전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다니.
“덥군.”
휴게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이도 먹고, 살집도 많아진 덕에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뜨거워지는 편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성 장관과 열정적인 논쟁도 벌였으니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피곤한 일이다. 이 나이, 이 직책에 미친개처럼 짖어대는 것도 썩 달갑지 않다.
그래도 어쩌겠나. 외무성의 대계를 위해서는 장관이 미친개가 될 필요가 있다.
‘이러면 예산이 두둑하게 꽂히겠지.’
남들은 내가 눈이 뒤집힌 줄 알지만, 사실 아무런 감흥도 없다.
아니, 사실 처음에는 화가 났던 게 맞지만 지금은 괜찮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도 머리가 뜨끈거리지만 간신히 억제할 수 있는 수준은 된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이성을 쥐어잡은 채 나 홀로 미치광이 연기를 이어갔다.
‘이 기회가 아니면 무조건적인 지원을 보장받을 수 없다.’
기존 외무성의 예산과 인력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꿈. 제국의 압도적 패권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나,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막대한 지출.
‘범대륙 조약 기구.’
대륙의 모든 열국들을 아우르는 조약이자 상설 기구. 대륙의 분쟁을 의무적으로 조정하고, 제국의 우위를 법적으로 명시하는 방법.
이 꿈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