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83)
로판 속 공무원 883화(884/945)
장관 회의는 세 차례 휴정과 세 차례 재개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기며 마무리되었다.
“행정부는 외무성의 업무에 최우선적으로 협력하도록 하며, 재무성은 긴급 예산을 편성하라. 이번 사태에 대하여 무력 개입을 제외한 모든 대처를 허할 것이다.”
“폐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폐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콕 지목당한 재무성 장관이 대표로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다른 장관들도 일제히 기립하여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회의 내내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간 결과. 황제는 ‘전부 해줄 테니 전쟁만 피하자.’ 라는 결론을 내렸다. 외무성 장관의 말처럼 온건한 대책이 실패했다면 강경 대응도 답이기는 하나, 전쟁성 장관의 ‘우리 군사력을 투사하기는 무리다!’ 라는 외침이 황제의 가슴을 울린 모양이다.
사실 나도 전쟁성 장관의 주장에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10년 전에는 카간이 이끄는 유목민 군단과 2년 내내 레슬링을 했고, 5년 전에는 도르곤과 2차 전쟁을 치렀잖아. 비록 2차 전쟁은 대토벌 전쟁과 비교하면 기간이 짧았으나,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는 것 자체로도 국력에 부담이 가는 행위다.
심지어 제국은 2차 전쟁, 즉 북방 정벌을 계기로 어마어마한 넓이의 영토를 합병하였다. 이 드넓은 영토를 유지하기 위한 병력도 결코 적지 않으니, 아르메인과 협력한 특수 군사 작전을 넘어 ‘정쿼가도’를 시전하는 건 좀.
‘5년 단위로 전쟁을 치르는 국가라.’
만약 정쿼가도가 실행된다면 제국은 5년마다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미치광이 호전광 국가로 역사에 남을 거다. 그중 하늘을 벨 수 있다는 이유로 전선에 투입될 나는 ‘크펠로펜 제국의 폭주를 상징하는 제국주의 첨병’으로 이름이 남겠지.
싫다. 그런 건 상상도 하기 싫어. 확장주의, 제국주의의 첨병이라니. 너무 흉하잖아 그거. 어쩌면 수백 년 후 내 후손들은 위대한 잊기를 운운하거나 머리 숙이고 다니는 게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외무성 장관은 짐을 따라오도록.”
“예, 폐하.”
그렇게 장관들의 대답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외무성 장관을 지목하였다.
이번 장관 회의의 MVP이자 미친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외무성 장관이었다. 황제 입장에서는 아무리 외무성 장관의 심정을 이해하고 존중해도 언짢을 수밖에 없으니, 집무실에서 1대 1로 쪼인트라도 깔─
“감찰성 장관도 같이 오게.”
“…예, 폐하.”
저 망할 놈이.
태양전의 황제 집무실에서 3자 대면이 이루어졌다.
제국의 주인인 황제, 제국 외교 총책임자인 외무성 장관, 백수 나부랭이에 불과한 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낄 자리는 아니지만, 차마 도망칠 분위기가 아니기에 침묵만을 지켰다.
“외무성 장관. 이제 듣는 귀도 우리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하게나. 무엇을 원하는 건가?”
그리고 황제는 외무성 장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솔직하게 대답하라는 미묘한 압박과 함께.
‘뭔 소리야.’
황제의 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외무성 장관은 이미 전쟁성 장관과 프리스타일 디스전을 4번이나 했다. 저것보다 솔직해지려면 대체 뭘 해야 하는 거지? 전쟁성 장관의 뺨이라도 후려갈겼어야 했나?
“처음에는 짐도 잠시 속았지. 이번 일은 장관이 분노를 표할 일이 맞았고, 일이 꼬인다면 외교 참사로 기록될 일이기도 했으니 말일세. 짐도 6개국이나 얽힌 전쟁은 제국 역사가 아니라 대륙 역사를 찾아야 겨우 발견할 수 있는 수준이었어.”
“소신이 나이를 먹으며 우둔하고 경솔한 놈이 되어가고 있으니, 부끄럽게도 어전 앞에서 언성을 높이고 추한 꼴을 보였나이다. 그저 부족한 놈의 추태이거늘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황제의 추궁에 외무성 장관은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표하였다.
‘진짜 뭔가 있나?’
겉으로만 보면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부끄러워하는 신하의 모습이나, 도리어 그 언행 덕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너무 평온하다. 방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혔던, 단호하고 확실한 무력 개입을 외쳤던 사람치고는 덤덤하기 그지없다.
그사이에 감정을 가라앉혀서? 그럴 확률은 없다. 그렇게 쉽고 빠르게 진정될 감정이었다면 장관 회의에서 터뜨리지도 않았을 거다. 게다가 외교관의 수사와 정치가의 언행은 일반인과 다른 법인데, 외무성 장관은 외교관 겸 정치가잖아. 얼마나 괴물 같겠어.
그런 괴물이 진심으로 폭발하여 눈이 돌아갔을 확률과 분노마저 카드로 이용했을 확률. 지금 생각하면 후자가 더 높기는 하다.
“이런. 감찰성 장관한테도 들킨 모양이군요.”
내가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보니, 외무성 장관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소신도 정말 늙기는 늙은 것 같습니다. 존귀하신 폐하의 눈은 피하지 못할 거라 예상했으나, 설마 감찰성 장관에게도 들킬 줄이야.”
“예?”
듣기에 따라 이상하게 애석할 수 있는 말이라 절로 반문이 나왔다.
그거 무슨 뜻이야. 나는 눈치도 뭐도 없는 애송이라는 뜻인가?
‘틀린 말은 아니지.’
유감스럽게도 외무성 장관이 상대라면 난 눈치 없는 애송이가 맞기는 하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외무성에서 구르고, 리브노만의 환상적인 암군 라인이 만들어 낸 지랄 난 외교판을 극복한 외무성 장관이다. 그런 사람이 보기에도 ‘눈치 좋은 사람’ 취급받으려면 적어도 40년, 50년은 살고 와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외무성 장관 본인처럼 온갖 수라장을 겪은 괴물이 되거나. 그런 건 오히려 내 쪽에서 사양이다.
“그런 말은 말게. 감찰성 장관은 모든 관료들을 살펴야 하는 자리이니 외무성 장관의 행동에서 위화감을 느낀 거겠지. 짐은 아직 외무성 장관이 젊고 강건한 인재라고 생각한다네.”
“참으로 황송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제 말하게나. 장관은 상황 폐하께옵서 중용하시고, 짐 또한 신뢰하는 신하야. 고작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언성을 높일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짐이 알고 상황 폐하께서도 알고 있어.”
그러자 외무성 장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황실에게 받은 과분한 신뢰와 은혜에 감동하기는커녕 교만에 빠졌으니, 부끄럽게도 폐하를 잠시나마 능멸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송구스럽고도 황공한 죄이겠습니까. 늦게나마 폐하께 모든 것을 아뢰고자 하니, 부디 허락해주십사 청합니다.”
“기꺼이 들을 터이니 편하게 말하라.”
“소신은 대륙을 아우르는 조약을 체결하고, 제국이 열국 위에 공식적으로 우뚝 서는 상설 기구를 만들고자 합니다.”
“음?”
외무성 장관의 깜짝 고백에 황제의 눈이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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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고 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외무성 장관이 미치광이 흉내를 낼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니겠지만, 설마 이 정도로 거대한 그림일 줄은 몰랐다.
“제국은 천명을 받드는 고귀하고도 강대한 국가입니다. 신의 선택을 받았으며, 위대한 선조들을 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허나 통탄스럽게도 대륙 열국이 제국을 따르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국력 때문이니, 제국이 조금이라도 침묵을 지킨다면 제국을 업신여깁니다.”
장관 회의 때보다 진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허나 외무성 장관의 진심이 가득 담겨있는 듯한 목소리에 황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제국이 침묵을 지키면 제국을 업신여긴다. 안타깝게도 이는 외무성 장관의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역사다. 과거 암군들의 시기, 제국이 휘청거리자 대륙의 국가들이 얼마나 난리를 쳤던가. 아르메인과의 관계는 제국 건국 이래 가장 냉랭했고, 동부 왕국들과는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외 국가들은 제국의 경사에 사절을 보내는 것도 소홀히 했다.
오늘날 제국의 권위가 다시 반석 위에 선 것은 국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감히 타국들이 제국을 넘볼 수 없는 수준이 되었기에 외교가 정상화된 것이다.
“영민하신 상황 폐하의 훌륭하신 통치 아래, 그 뒤를 이으신 황제 폐하의 위엄 아래─ 제국의 국력은 가히 대제 이래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압도적인 국력을 내세운다면 대륙의 질서를 개편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느덧 얼굴이 붉게 상기된 외무성 장관은 외교관의 우회적인 언사가 아닌, 제국의 암흑기를 절절하게 체감했던 한 사람의 귀족으로서 외쳤다.
조금은 외무성 장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제국이 제국답지 못했던 시절, 제국이 열국에게 업신여겨지던 시절을 기억하는 외무성 장관이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거고, 대륙 열국들에게 당했던 수모를 늦게나마 풀고 싶을 터.
그리고 지금이 장관의 한을 풀 기회다. 류튼과 바젠이 먼저 제국의 체면에 똥을 끼얹었기에, 철저히 국익을 위해 활동하던 외무성 장관이 합법적으로 분노를 토할 기회야.
“대륙의 질서를 개편한다라.”
눈을 감고 있던 황제가 다시금 눈을 떴다.
“이미 대륙은 천명을 받든 제국의 위엄 아래 고개를 숙이고 있다. 위대한 제국과 그에 고개 숙이는 열국들. 이는 뮤노 제국 이후로 3천 년이 넘게 이어진 대륙의 굳건한 질서지.”
장관 회의에서 보였던 초췌한 눈빛과 달리, 흉흉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장관. 장관은 이 뿌리 깊은 질서를 새로 개편하고자 말하는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제국이 흔들리면 곧바로 무너지는, 새로운 제국을 찾을 질서가 아닌. 영원토록 제국이 제국으로 군림할 질서를 논하는 것인가?”
“소신이 감히 영원을 장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허나 장담컨대, 새로운 질서는 제국이 대륙을 합법적으로 다스리는 최고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가.”
이내 침묵이 맴돌았다. 황제와 외무성 장관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외무성 장관.”
“예, 폐하. 하명하소서.”
“대제께서는 초대 하블렘 공작에게 군을 맡기셨고, 초대 체네스 공작에게 내정을 맡기셨지. 훌륭한 인재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셨기에 오늘날 제국을 만드셨다.”
이윽고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의 웃음이, 유쾌함이 가득한 웃음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장관이 품은 이상을 말하라. 짐이 전부 이해할 때까지.”
3천 년이 넘게 이어진 구 체제가 무너지고, 오직 크펠로펜을 위한 신 체제를 만든다는 선언.
그 선언에 황제 또한 눈이 돌아갔다.
외무성 장관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입이 근질거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유엔이잖아 이거.’
아무리 들어도 유엔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부정적으로 생각해도 유엔이다.
중세 판타지 대륙에서 유엔이 탄생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