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84)
로판 속 공무원 884화(885/945)
외무성 장관은 듣는 사람의 정신이 절로 아득해질 정도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잇는 것을 보면 최소 수년, 어쩌면 수십 년 동안 가슴속에 품고 있던 숙원인 모양이다.
이해한다. 외무성 장관은 제국의 국력이 가장 바닥을 치던 시절에 청춘을 보낸 인물이잖아. 제국의 대외 관계가 대차게 꼬였고, 대륙의 열국들은 제국을 공경하기는커녕 우습게 보던 시절에 젊음을 불태웠다.
그러니 열국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제국의 위엄을 드높이고 싶을 거다. 사람으로서도, 같은 공무원으로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
그래, 이해할 수는 있는데.
‘이 시대에 나오면 안 될 물건을 가져왔어.’
설마 그 수단이 범대륙 조약 기구일 줄은 몰랐다. 유사 유엔 같은 존재를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꺼내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물론 이 시대는 껍데기만 중세지, 실상은 고대와 중세, 근세를 아우르는 끔찍한 혼종이다. 신분 제도와 봉건 제도가 존재한다는 걸 제외하면 ‘중세’ 판타지라고 불러도 되는지조차 의문이야.
그래도 이건 아니다. 내가 예전에 살던 세계에서도 전 세계를 아우르는 기구는 20세기에 나왔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서야 겨, 우…?
‘…여기도 발달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니 이 세계의 교통과 통신도 훌륭한 편이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통화가 무리라면 문자를 언제 어디서나 날릴 수 있는 통신구. 마법사의 능력이 버틴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텔레포트.
범용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국가 간 교류에 사용하기에는 충분한데? 어떻게 보면 이전 세계 20세기보다 좋아.
“모든 국가가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위치에 맞는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 위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건 대륙의 평화를 깨트리는 일이니, 모든 국가가 단호히 응징해야 합니다.”
나 홀로 고민에 빠진 사이, 외무성 장관의 설명은 어느덧 절정에 이르렀다.
“대륙의 모든 요소가 제 역할에 충실한다면 어찌 전란이 생기겠습니까. 가정은 가장이 굳건하고, 가족들이 가장을 믿어야 화목한 법입니다. 도시는 시장이 현명하고, 시민들이 시장을 지지해야 번영하는 법입니다. 이는 국가도, 대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말한 외무성 장관은 황제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황제의 책상에 있던 백지에 무언가 휘갈기기 시작했다.
[ 범대륙 조약 기구. 이하 기구는 대륙 모든 국가들의 가입을 추구한다. 가입을 거부할 시 무력으로 미가입 국가를 억압하지는 않으나, 가입 국가들은 미가입 국가와 어떠한 외교 관계도 맺지 않는다.크펠로펜 제국은 기구 내에서 ‘상국(上國)’의 지위를 갖는다. 상국은 기구의 의장국으로서 가입국 사이의 분쟁 조율 및 대륙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다.
신성교국은 ‘참관국’의 지위를 갖는다. 참관국은 기구가 각국에 부여하는 의무에서 자유로우며, 가입국 사이의 논의에 참관할 권리가 있다. 또한 가입국의 요청에 따라 논의에 개입할 수 있다.
제국과 교국을 제외한 3개국은 ‘대국(大國)’의 지위를 갖는다. 대국은 기구의 부의장으로서 대륙의 각 지역을 우선적으로 담당한다.
그 외 국가들은 일반 가입국으로서 동일한 지위와 발언권을 갖는다.
상국은 기구 가입국 간의 결정 사항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
대국 3개국의 뜻이 일치하면 거부권을 무력─
상국, 대국, 일반국의 투표권은─ ]
‘아.’
빠르게 백지를 채우는 내용을 보다가 슬며시 눈을 감고 말았다.
대충 봐도 심상치 않은 내용이다. 저 상국과 대국이라는 표현이 실제로 사용될지는 미지수이나, 외무성 장관의 마음속에는 이미 제국은 상국이다. 분명 상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정도로 제국의 권한을 막강하게 설정할 것이다.
동시에 대국을 3개국 선정한다는 것에서 외무성 장관의 짙은 악의를 느끼고 말았다.
‘둘이라면 당연히 아르메인이랑 유벤이지.’
그 둘이 명백한 대륙 2, 3위니까. 그런데 그 뒤를 잇는 4위는 누구지? 어떤 국가가 아르메인과 유벤에 버금가는 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차라리 교국이 대국 자리를 차지한다면 다들 그럭저럭 납득했겠지만, 교국은 참관국으로 빠졌다. 그렇다면 ‘일반국’들은 하나 남은 대국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울 터.
동시에 이 기구는 제국의 주도 하에, 외무성 장관의 설계 하에 만들어지는 기구다. 대국 선정 기준에 제국의 의향이 듬뿍 첨가되도록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설립국 겸 의장국 겸 대국 지정국…’
미친 타이틀이라 가슴이 웅장해졌다. 저대로 이루어진다면 제국은 그야말로 대륙의 정점이자 불변의 1위가 된다. 제국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는 이상, 영원토록 크펠로펜의 시대가 이어질 것이다.
저대로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장관.”
“예, 폐하.”
“참으로 흥미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 기구가 대륙을 아우른다면 제국은 국력으로 열국을 억누르는 것이 아닌,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관성으로 나아갈 테니.”
빼곡하게 글자가 적힌 백지(였던 것)를 내려다보던 황제는 이윽고 외무성 장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능하겠나?”
그리고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제국이 대륙을 좌지우지하며 한 손에 주무를 수 있는, 모든 국가들이 제국의 말에 벌벌 떨고 복종해야 하는 이 기구를 만들 수 있겠냐고. 결국 기구라는 것은 가입국이 많아야 힘을 발휘하는 법인데, 다른 국가들의 가입을 유도할 수 있겠냐고.
실로 타당한 지적이다. 대륙의 평화나 새로운 질서를 명분으로 들었지만, 결국 제국 패권을 위한 도구나 마찬가지인 기구다. 다른 국가들이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런 기구에 가입하겠나. 여차하면 제국과 겨울 삼국, 잘 쳐줘야 제레노 왕국 정도만 가입한 웃음벨 기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폐하. 모든 사람들은 정점에 선 1인자를 경외하며 질투하지만, 2인자에 만족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외무성 장관의 대답에 황제는 침묵을 지켰다. 더 말해보라는 것처럼.
“오늘날 제국의 권위는 하늘에 닿을 정도입니다. 아르메인조차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으니, 다른 국가들은 어떻겠습니까. 사실 이 기구가 없어도 제국의 패권은 최소 백 년은 이어질 것입니다.”
그 말에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압도적으로 벌어진 1인자와 2인자의 격차. 경쟁을 포기한 2인자. 1인자를 넘보지 않고 2인자 자리 수성에 전념하는 사람.
이렇게 키워드를 나열하니 외무성 장관이 그리는 그림을 알 것 같았다.
‘지역 패권.’
제국은 대륙을 아우르는 패권을 확립했다. 이는 대륙 2인자인 아르메인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니, 외무성 장관의 말처럼 최소 백 년은 이어갈 권좌다.
그렇다면 그 아래는? 제국이 하나하나 관리하기에는 번거롭고, 제국과 거리가 먼 다른 지역들은? 대륙이라는 거대한 단위가 아니라 지역이라는 여러 개의 단위로 나누면 그곳의 패권은?
‘대국들 차지지.’
대륙 북부의 아르메인. 대륙 동부의 유벤. 적어도 그 지역에서는 두 국가가 제국이고 황제다. 멀리 있는 제국보다는 가까이 있는 대국들이 위세를 떨치게 된다.
그 권위를 기구가 보장하는 거다. 2, 3인자들이 더 위를 노리지만 않는다면 1인자가 기꺼이 옥좌 아래의 자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상부상조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다리 걷어차기.’
이미 많은 걸 손에 쥔 나라들끼리 변화를 거부하는 기구. 대충 그렇게 요약할 수 있겠지.
“흐음.”
황제도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제국의 패권을 위한 도구라면 다른 국가들이 가입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있는 놈들끼리의 동맹, 후발 주자가 올라올 사다리 걷어차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국 입장에서는 어차피 넘보지도 못할 1인자 자리를 포기하면 지금 내 위치가 안전해진다. 약소국 입장에서도 ‘난 대륙 최강국이 될 거야!’ 라며 지랄발광을 할 미친 이웃이 사라질 테니 손해는 아니다. 본래 대륙 국력 순위가 요동친다면 어딘가에 있는 약소국이 쥐어터졌다는 말이니까.
대신 대국도 약소국도 아닌 애매한 중견국들이 문제기는 한데, 수적으로는 소수에 불과하니 상관없다. 꼬우면 제국, 대국, 약소국들을 상대로 이겨보든가.
‘게다가 대국 자리도 하나 마련해뒀으니 눈치가 있으면 숙이겠지.’
사실상 대륙 전체와 싸워 이겨 패권을 손에 쥐느냐, 아니면 제국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국 자리를 하나 얻어먹느냐.
과연 중견국들은 어떤 방법을 택할까. 이 순간에도 서로의 대가리를 내리치고 있을 류튼과 바젠은 어떤 길로 나아갈까.
“허면 장관. 전쟁 중재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어느새 밝은 미소를 머금은 황제는 외무성 장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것은 소신이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기구 창설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흘리면, 저들이 중재를 구걸하게 되겠지요.”
외무성 장관은 그보다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분명 장관 회의에서는 눈을 뒤집으면서 노발대발했던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그 강렬했던 모습이 철저한 연기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 까불지 말자.’
원래도 외무성 장관을 자극한 적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더 조심하면서 살자.
외무성 장관하고 충돌할 바에는 재무성 장관 뺨을 치는 게 낫겠어.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외무성의 소관이기에,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외무성 장관이 어떤 논리와 대가로 대륙 열국들을 포섭했는지는 외무성과 황제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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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일이 잘 풀렸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 전쟁 멈췄다. 아직은 휴전이지만, 조만간 정식으로 종전한다고 하니 그게 그거지.
행정부에 서식 중인 재무성 장관이 기꺼운 소식을 전달해 줬으니까.
– 그런데 종전 조약을 아우스엔에서 맺는다고 해서 급하게 예산 편성 중이다. 안 그래도 외무성 쪽에 갈 예산 꾸리느라 죽을 맛이었는데. 환장하겠어.
“저런.”
그것도 절로 웃음이, 아니 탄식이 나올 소식도 함께.
‘아우스엔에서 맺는 종전 조약이라.’
중재 실패로 인해 훼손된 제국의 권위가 다시 떡상하게 생겼다. 남들이 보면말 안 듣는 국가들을 쥐어 패서 제도로 끌고 온 것 같잖아.
사실 무력이 아니라 다른 걸로 팼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