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85)
로판 속 공무원 885화(886/945)
외무성에서 범대륙 조약 기구에 대한 정보를 슬쩍 흘리자, 류튼과 바젠은 귀신같이 조용해졌다.
비록 아르메인과 유벤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그 두 국가도 대륙에서 목소리 좀 높일 수 있는 국가다. 제국이라는 초강대국, 아르메인-유벤이라는 강대국의 뒤를 이어 지역 강국 정도는 자부할 수 있는 수준.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류튼과 바젠의 수뇌부는 지역 강국이라는 국력에 걸맞은 지성과 눈치를 가진 것들이다. 애초에 제국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나름의 계산 끝에 나온 결과였으니까.
제국의 분노를 감수한 것이 어떻게 계산한 결과인가 싶으나, 솔직히 말해서 저 멀리 있는 제국의 분노보다는 ‘숙적과의 치킨 게임에서 굴복’, ‘상대를 짓누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기’ 같은 낙인이 더 공포스러울 거다. 제국의 분노는 현재가 고달파지지만, 낙인은 미래를 팔아먹는 짓이기에.
그래서 외무성 장관은 두 국가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도 고달프게 만들었다. 당장 제국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왕가와 왕국의 존립을 장담할 수 없게 말이다.
“내일이면 전부 입국한다고 했죠? 이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전쟁을 멈추고 나니 뒤늦게 제국 눈치가 보이는 거지. 이유가 어떻든, 저것들은 한 번 제국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었으니까.”
재무성 장관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 삼국이야 류튼, 바젠에 격렬히 항의하기만 했지 실질적으로 군사를 동원한 적은 없으니 넘어가더라도, 류튼과 바젠은 이미 수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쿼로노스는 4개의 군단이 국경까지 진군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병력을 움직인 삼국은 제국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괜히 느긋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괘씸죄까지 쌓이면 얼마나 고달프겠나.
게다가 각국 외교관들은 나름 사적인 친분도 가지고 있다. 제국 외교관들은 외무성 장관의 열렬한 분노를 삼국 외교관들에게 전달했을 테니, 더더욱 공포스러울 터.
“아무튼 아슬아슬하게 준비는 끝났다. 이거 하마터면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서 종전 선언할 뻔했어.”
“괜찮지 않습니까? 사고를 친 놈들을 곱게 대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고의로 홀대하는 거랑 예산이 없어서 소홀한 건 딱 봐도 차이가 난다. 예산 문제라는 걸 들키면 재무성 장관인 내가 욕먹을 텐데, 얼굴도 모르는 새끼들한테 욕을 처먹으라고?”
코웃음을 친 장관은 팔짱을 끼더니, 의자 등받이에 눕다시피 몸을 기대었다.
“빌어먹을 놈들. 쓸데없이 전쟁이나 일으키고 말이야. 덕분에 안 써도 될 돈까지 썼어.”
“뭐, 그래도 돈 좀 쓰고 열국들 기강을 잡는 거면 이득이죠. 좋게 생각합시다.”
내 말에 장관은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봤다.
“너 어디까지 알고 있냐?”
“예?”
그러고는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 새끼 이거. 저번에 외무성 장관이랑 같이 호출 당하더니, 거기서 뭔가 듣기는 들었구만.”
어느새 장관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장관 회의가 끝나자마자 황제의 호출을 받았던 나와 외무성 장관. 누가 봐도 은밀한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것이 뻔한 조합이었으나, 무려 황제의 호출이었기에 누구도 나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캐묻지 않았다. 황제가 비밀로 부치려는 일을 캐묻는 건 자신의 모가지에 미련이 없다는 뜻이니.
다만 재무성 장관은 내가 너무도 평온한 모습에, 외무성 장관에 대한 언급을 철저히 피하는 모습에 무언가 눈치챈 듯싶었다.
“외무성에서 노리는 게 뭐냐. 단순히 제국의 권위를 세우려고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외무성 장관의 분노가 단순히 제국의 권위가 훼손되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걸.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어. 공사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났어도 부하 관료들을 그렇게 털어댔다고?”
애초에 외무성 장관의 분노 자체가 연기에 불과하다는 걸.
“외무성의 일을 감찰성 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외무성에 감찰을 건 것도 아닌데요.”
허나 정답을 향해 걸어가는 재무성 장관에게 시치미를 뗐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전직 감찰성 장관이자 현 백수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은 내막을 알지만, 그 외 감찰성 사람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외무성 장관의 원대한 포부는 나와 황제, 외무성 장관 본인만이 알고 있다.
사실 본격적인 범대륙 조약 기구 논의는 이번 종전 선언 직후부터 시작한다고 하니, 재무성 장관한테는 미리 귀띔을 해줘도 무방하다. 그래봤자 하루 차이에다가 외무성에 온갖 예산을 투입할 장본인이잖아.
그럼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으니까.’
갑자기 범대륙 조약 기구라는 명분으로 외무성이 돈을 빨아들이면, 황제가 최우선적인 지원을 명하면 재무성 장관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 말해줘도 제법 볼만한 표정을 짓겠지만, 하루나 이틀만 더 묵히면 더욱 격렬한 반응을 보일 터. 그 재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물론 나라의 일에 사적인 감정을 우선하는 건 미친 짓이다. 황제한테 노예 낙인이 찍혀도 할 말이 없는 만행이다.
‘말하라고 안 했잖아.’
하지만 황제는 딱히 이번 사태를 함구하라고도, 미리 말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말해도 무방한 일이라면 숨기는 것 또한 무방한 일이라는 의미다.
어느 쪽이든 문제가 없다면 난 내 즐거움을 택하겠다.
다음날. 이번 종전 서약에 서명을 할 대표들이 황궁에 집결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루센 왕국 외부대신 로이테른 백작,스티니예 왕국 외부대신 네셀리덴 백작,노스고르 왕국 외부대신 스베르커 자작. 겨울 삼국을 대표하여 함께 온 셋이었다.
일단 이 셋은 제국이 오라고 해서 놀러 온 관광객 수준에 불과하다. 겨울 삼국은 이번 전쟁에 휘말린 피해자에 가깝고, 제국의 중재에 그럭저럭 따르는 시늉─ 아니, 진심으로 따르고자 했으니까. 류튼과 바젠이 냅다 전쟁을 일으켜서 눈이 뒤집힌 거지.
그래서 이 셋은 ‘너희 마음고생 시킨 녀석들이 절절 매는 거 구경이나 해라.’ 라는 서비스 차원으로 부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뭔가 중한 역할을 맡은 건 아니다.
‘저 셋이 진짜지.’
그렇게 마음 편히 방문한 셋이 있는가 하면, 침통한 심정으로 황궁에 발을 들인 셋도 있었다.
류튼 왕국 외부대신 헬드룽겐 백작,바젠 왕국 외부대신 실레시아 공작.
마지막으로 쿼로노스 왕국 외부대신 겸 내부대신 겸 군부대신 겸 법부대신 겸 수도경비단장 겸 대법관인 란다티아 후작.
‘저놈은 대체 뭐야.’
온갖 직함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란다티아 후작을 보자마자 절로 탄식이 나올 뻔했다.
대체 뭘까. 남들은 일생을 쏟아부어도 겨우 도달할까 말까 한 직책들을 6개나 쥐고 있다. 그것도 외교, 내정, 군사, 사법, 수도, 재판을 한 손에 쥔 알짜배기 직책들로만.
일단 겸직 직책 중에 내부대신이 있는 걸 보면 저 사람이 구국의 결단을 일으킨 장본인인 것 같다. 시원하게 망국 루트를 밟던 쿼로노스를 정상화하고, 제국과 아르메인에게 대가리를 박았던 최후의 양심이다.
‘줄 사람이 없었구나.’
란다티아 후작의 전적을 떠올리고 나니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저건 권력욕 때문에 겸직한 것이 아니다. 구국의 결단을 찍으면서 맛이 간 수뇌부를 물갈이 한 덕분에, 그 공백을 채울 인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본인이 겸직하고 있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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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란다티아 후작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 보였다. 안 그래도 어두웠는데 지금은 거의 심연을 보는 기분이야.
“다들 모이셨구려. 귀한 발걸음을 해주어서 참으로 감사하오.”
아무튼 손님 여섯이 모이니, 이번 회담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외무성 장관이 모습을 보였다.
“다들 멀리서 오셨으니 우선 연회라도 즐기는 건 어떻겠소? 평화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딱딱하고 불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법. 서로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즐겁게 논의를 시작하는 거요.”
오히려 불편하고 어색한 연회가 될 것이 뻔하지만, 누구도 외무성 장관의 제안에 난색을 표하지는 않았다.
겨울 삼국은 제국의 충실한 친우요, 다른 나라들은 제국에게 대가리가 깨질 위기니까. 아무리 외교가 복잡하고 정교한 타협의 예술일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제국이 까라면 까야 했다. 꼬우면 앞으로 이루어질 신-질서에서 낙오되는 거고.
그보다 기분 탓인가. 어째 외무성 장관의 어조가 평소보다 고압적인 것 같다.
‘하오체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제국 귀족이 왕국 귀족보다 한 단계 위의 의전을 받듯, 제국의 장관들도 왕국 대신들보다 상위 존재로 취급받는다.
허나 그걸 감안해도 외무성 장관의 목소리에는 강력한 위압감이 깃들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들어도 그러할진대 같은 외교관인 저들은 오죽하겠나.
“장관 각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변방 소국의 미천한 신하를 이리도 신경 써주시니, 이는 실로 황제 폐하와 제국의 은혜겠지요.”
란다티아 후작의 대답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장관에게 고개를 숙이며 동의를 표했다.
괜찮은 시작이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외무성 장관이 무얼 위해서 회담보다 연회를 먼저 개최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장관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니 아무렴 어떤가 싶다.
“저, 각하. 혹시 옆에 계신 분은 감찰성 장관 각하가 아니신지요?”
그렇게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노스고르 왕국에서 온 스베르커 자작이 입을 열었다.
“맞소이다. 귀한 분들이 오셨으니 호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소? 그렇기에 대륙 제일 검을 특별히 모셔왔소.”
그 말에 대표들의 오묘한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외무성 장관이 와달라고 부탁해서 온 거지. 평상시라면 얼굴도 안 비쳤을 거다.
***
회담 전에 열린 연회는 사실상 진짜 회담이나 마찬가지다.
회담이 순식간에 끝났다는 모습을 과시하기 위해, 회담 참가국들의 의견이 평화적으로 일치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준비. 연회 시간 동안 모든 것을 조율하고, 회담 때는 결과만 발표하기 위한 물밑 작업.
당연히 다른 각국의 외부대신들도 이 조율 작업을 알기에, 연회를 즐기면서도 틈틈이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결과. 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종전 서약서의 초안이 완성되었다.
‘좋군.’
흡족하다. 이미 전쟁을 일으킨 국가들은 제국의 눈치를 보고 있고, 제국의 충실한 친우 셋이 눈에 불을 켜며 지켜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뻣뻣하게 나서는 건 겁이 없는 게 아니라 지능이 없는 거다.
심지어 감찰성 장관에게 부탁하여 자리를 빛내달라고도 했지. 대륙 제일 검의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면 부담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아주 좋아.’
미소를 머금으며 6개국 외부대신들의 서명이 적힌 초안을 바라봤다.
이 초안이 진짜 서약서가 되고, 그 서약서는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 것이다. 내가─ 우리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 제국 외무성 장관, 클레멘스 로타어 오브 메테르니히 후작. ]그렇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나 역시 서명을 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