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86)
로판 속 공무원 886화(887/945)
6개국이 얽혔던 전쟁은 대륙을 불태우기 직전에 종전되었다.
한때 종군했던 몸으로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온 결과였다. 류튼과 바젠의 전쟁은 제국의 체면에 똥물을 끼얹은 희대의 사태였으니, 만약 일이 조금이라도 꼬였다면 대륙의 모든 열국들이 합류한 세계대전이 터졌을 수도 있다.
외무성 장관이 분노보다 이성을 앞세우고, 손상되었던 제국의 권위가 종전 서약 덕에 다시 복구돼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하늘 베기를 할 뻔했어. 무슨 전술 핵무기도 아니고.
그리고 제국의 권위와 외교 역량을 온 대륙에 알린 직후. 외무성은 곧바로 범대륙 조약 기구 설립을 공론화했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 모든 국가들의 화합을 위해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그 방안은 모든 국가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대화로 대륙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라고.
“야 이 새끼야! 너 이거 알고 있었지! 이런 내용을 끝까지 함구해!?”
제국 외무성이 선언한 새로운 질서에 같은 제국의 귀족마저 동요하는 일이 있었으나, 신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작은 성장통에 불과하다.
아무튼 성장통이다. 제국과 대륙이 더 선진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희생이지. 아무렴.
‘앞으로 사흘은 밥 안 먹어도 되겠다.’
재무성 장관의 절절한 분노와 절규를 회상하니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만족스럽다. 외무성 장관이 꿈꾸는 신세계는 이제 막 PV를 공개한 수준이나, 이미 나는 최고의 결과와 마주했다.
제국의 확고한 패권? 대국들과 함께 즐기는 사다리 걷어차기? 그딴 거 알 게 뭐냐. 재무성 장관이 고통받는다면 그걸로 충분한데. 어차피 나는 재무성 소속도 아니니까.
‘어떻게 사람이 재무성에서 일하지?’
안타깝고도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돈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명분이자 힘이요, 탐욕과 분쟁의 결정체지 않나. 그런 흉한 걸 다루는 중책을 고작 인간의 어깨에 짊어지다니. 나라면 혀 깨물고 죽었어.
물론 혀를 깨물기 전에 재무성에서 감찰성으로 독립했지만. 상황 폐하의 은혜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 기분이다.
“압빠, 아빠.”
“우리 페디, 준비 다 끝나니?”
“웅! 여기 쟝생이두 챙겻서!”
황궁 변두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 상황에게 기습 숭배를 하는 사이. 페디가 장생이를 품에 안은 채 쪼르륵 달려왔다.
어째서일까. 외출할 일이 있으니 가지고 놀 장난감이나 인형을 챙기라고 한 것뿐인데, 설마 장생이를 품에 안고 올 줄은 몰랐다.
‘이젠 반항도 안 하네.’
심지어 장생이는 이 사태가 익숙하다는 듯 초연한 표정으로 페디의 품에 안겨 있었다.
왜 나를 준비물로 취급하는 거냐고,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냐고 항의조차 하지 않고 있어.
‘이미 하고 온 건가?’
어쩌면 페디에게 생포 당하는 과정 내내 울분을 토했을 수 있다. 허나 먹히지 않아서 포기한 걸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니 장생이의 눈동자가 유독 촉촉하게 보였다.
“페디야. 아빠랑 갈 곳에도 동물 친구들이 많아. 그러니 장생이는 두고 가도 되지 않을까?”
내 말에 축 늘어져 있던 장생이의 귀가 스르륵 올라가더니,
“걔네도 말해?”
“그건 아닌데…”
“그럼 쟝생이 데려갈래!”
다시 내려갔다.
미안하다. 졸지에 희망고문을 해버렸구나. 기대를 줬다가 실망도 주는 게 가장 잔인한 짓인데.
“그, 거기는 소랑 말이랑 양 같은 덩치 큰 애들이 많거든? 장생이가 가면 무섭지 않을─”
“그만해라, 주인.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려는 거냐.”
“미안하다.”
졸지에 ‘일반 가축에게 공포를 느끼는 전직 악신’이 될 뻔한 장생이는 침묵을 깨고 항변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좀 무리수인 명분이기는 했어. 게다가 내가 무슨 명분을 내세우든 페디의 뜻을 꺾는 건 불가능하겠지.
결국 장생이는 가만히 있다가 상처만 받은 꼴이 되었다.
페디와 함께 북방, 정확히는 바란디가 후작령에 방문했다.
황제의 조카이자 아인테르의 첫 번째 자식이 태어난 걸 축하하기 위해서. 차차기 바란디가 후작이자 현 바란디가 후작의 유일한 손주를 구경하기 위해서.
‘사실 진즉에 갔어야 했는데.’
비록 직계가 아닌 방계지만 고귀한 황실의 혈육이 태어난 경사스러운 사건이다. 그것도 멀고 먼 방계가 아니라 현 황제의 조카이며, 차기 황제의 사촌인 휘황찬란한 아이. 이 정도면 평범한 방계 취급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 아니겠나.
심지어 그 방계는 제국의 후작가를 이어받을 예정이니, 귀족들의 열렬한 환호와 축하 세례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바란디가 후작성은 수많은 손님들로 미어터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란디가 후작령은 한산했다. 제국의 그 어떠한 귀족도 후작이 될 고귀한 아이를 직접 보지 못했다. 같은 북방의 대영주들은 물론, 북방 파벌의 수장인 나까지도.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이 북방 유목민의 전통이었으니까.
‘전통이면 어쩔 수 없지.’
유목민들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의 첫 파트너이자 애마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외부인과의 접촉을 철저히 금지한다.
유목민에게 있어 말은 무엇보다 소중한 재산이자 동료고, 영혼과 영혼이 이어진 친우나 마찬가지기에. 영혼의 짝을 찾는 과정에서 세상에 찌든 어른, 외부인이 개입해서는 안 되기에.
덕분에 아인테르의 자식이 태어난 건 과거의 일이나, 이제야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벌써 기어다닐 준비를 한다더라.
“나! 동생 보고시픈대 못 보게해! 다들 치사해!”
막 태어난 아이가 기어다니는 것을 목전에 둘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이는 황태녀의 고통과 인내도 길고 길었다는 뜻.
덩달아 황태녀의 투정을 들어야 했던 나에게도 길고 긴 시간이었다. 민족의 전통만 아니었으면 몰래 만나게 해줬을 텐데, 정복 국가가 피지배 민족의 전통을 무시하는 건 미친 짓이지. 기껏 동화 중인 북방이 반발하면 어떻게 수습하려고.
‘황태녀도 오늘 온다고 했었나?’
황제는 일 때문에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황후가 황태녀와 함께 온다, 대충 그렇게 들었던 것 같다.
다만 그게 오늘이었는지 내일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둘 중 하나는 맞을 텐데.
‘아무렴 어때.’
사실 언제 오든 상관없다. 손님을 맞이할 집주인은 내가 아니라 바란디가 후작이니까. 걱정을 한다면 연달아 손님을 맞이할 후작이 하는 게 맞다.
“아빠! 져기 동물 많아!”
“그러네. 엄청 많다.”
그 와중에 내 품에 안겨 있던 페디는 초원을 누비는 소 떼와 양 떼를 가리켰다.
이미 베히모스와 가축들을 보고 자란 페디니 딱히 신기한 광경도 아니겠지만, 북방 초원은 베히모스의 터전과는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보다 웅장하고, 보다 광활하고, 보다 자연스럽지. 베히모스가 만든 환경이 아닌 자연 그 자체가 내린 초원이니 당연한 일.
‘많기는 많네.’
그리고 베히모스가 기르는 가축보다 종류는 적을지언정 숫자는 많은 것 같았다.
과연. 이게 북방 유일 후작의 위엄인가. 축산업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모양이야.
“음?”
페디와 함께 바란디가 목장의 위용을 구경하던 중, 장생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 사이에 사람이 하나 있군. 양치기 같은 건가?”
“사람?”
장생이의 말에 보다 집중해서 가축 무리를 바라봤다.
사람이라. 아무리 봐도 소랑 양밖에 안 보이는데? 저기 구석에 말들도 있고, 개도 제법 많기도 하지만…?
‘아.’
나도 찾았다. 장생이가 말한 양치기.
금발이 찬란하게 빛나고, 새하얀 피부를 가진 청년. 보랏빛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청년.
‘아인테르잖아.’
쟤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 잠깐 못 본 사이에 직업을 양치기로 바꾼 건가?
‘리브노만은 대체.’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황위에서 물러난 상황은 황궁에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더니, 정쟁과 거리가 먼 황제(皇弟)는 북방 초원에서 양치기 일을 하고 있다.
대체 리브노만의 피에는─ 아니, 상황의 피에는 대체 무엇이 흐르는 걸까. 아무리 봐도 농축성의 공무원으로 살아갔어야 할 사람이 분명하다. 그 운명을 리브노만의 직계가 뒤틀어버린 거지.
“저쪽도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군.”
“그런 것 같네.”
이윽고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아인테르는 한쪽 팔을 번쩍 들어 휘휘 흔들더니, 옆에 있던 소의 등에 올라타 다가오기 시작했다.
황제의 동생이자 후작의 사위라고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진짜 무슨 일이 있던 건데.’
너 결혼식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귀공자였잖아.
왜 20년 경력 자연인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거야.
***
곤란하다. 광대가 아프지만 미소가 멈추지를 않는다.
“아우.”
“그래, 우리 크란. 무슨 일이니?”
“마우.”
“말을 보고 싶다고?”
“우웅!”
짧은 옹알이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이 아이 덕분에 웃음이 떠나지를 않는다.
행복하다. 요 몇 개월 동안 살아서 천국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하늘이 나에게 극상의 행복을 하사해 주셨다.
어찌 이리도 귀여울 수가 있을까. 어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샤티가 막 태어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행복하다. 샤티가 태어났을 때는 육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고, 혹시 아이가 병에 걸려 잘못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시절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이미 샤티를 무사히 기른 경험 덕에, 제국의 뛰어난 의료 기술 덕에 아무런 걱정 없이 크란을 보고 있지 않나.
‘우리 귀여운 외손녀.’
크란 구르트. 언젠가 크란 구르트 오브 바란디가라고 불릴 우리 외손녀.
“아버지. 또 크란이랑 놀고 계셨어요?”
아무튼 우리 크란이 말을 보고 싶다고 하니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때마침 샤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허. 딸이 출산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당연히 아비가 대신 돌봐야지!”
“벗어나지 못하다뇨. 저 이제 말도 탈 수 있어요.”
그건 중요한 내용이 아니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샤티의 현 상태가 어떻든, 내 마음속 샤티는 크란을 돌보기 어려운 상태니까.
“뭐, 할 일도 없으신 것 같으니 바로 정문으로 가세요. 백작 각하께서 오셨어요.”
“으응? 벌써?”
그렇기에 크란을 품에 안고 방 밖으로 탈출할 계획을 짜려고 했으나, 샤티의 말에 바로 폐기했다.
“마침 아인테르랑 마주쳐서 아인테르가 상대하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주인이 맞이하셔야죠.”
“나보다는 사위님이 더 잘할 것 같은데.”
“어서요.”
샤티의 압박에 크란을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았다.
우리 외손녀. 이 외할아비랑 잠깐 떨어지자.그래도 금방 돌아올 테니 울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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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외할아버지가 일할 동안 엄마랑 있자?”
“아우!”
‘으음.’
이상하다. 왜 내가 울 것 같은 기분이지?
이 외할아버지한테 아무런 시선도 주지 않는 크란이 야속해서 그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