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87)
로판 속 공무원 887화(888/945)
누런 머리를 가진 황족은 누런 소를 탄 채로 위풍당당히 나아갔다.
바란디가 후작령의 드넓은 목초지에서 후작성까지 당당하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평온하게.
‘이놈은 대체.’
얼떨떨한 심정으로 나와 나란히 움직이고 있는─ 소에 타고 있어서 시야는 다소 높은 아인테르를 바라봤다.
아인테르는 황족이다. 상황이 황제였던 시절에는 무려 직계이자 적자 중 하나였고, 현 황제가 즉위한 시점에서도 유일한 동생이라는 어마어마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아인테르는 황제가 황태자였던 시절, 의심병에 미쳐 있었을 때에도 그럭저럭 황족의 권위에 맞는 의전을 받았다. 솔직히 실권은 쥐뿔도 없고 상당히 아슬아슬한 의전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지나가다가 보면 황족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해할 수 없다. 지금의 황제는 의심병이 풀린 것으로도 모자라 아인테르에게 적지 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황후 또한 아인테르에게 우호적이며, 황태녀도 하나뿐인 삼촌을 좋아하는 편이지.
심지어 단승 작위지만 아인테르 본인에게도 후작위가 붙어 있는 상황. 최소 의전을 받던 과거보다 압도적으로 권위가 높아졌거늘, 어째서 의전은 역주행을 한 것일까. 폐위를 당한 군주도 소에 태워지지는 않을 텐데.
– 음무우우우우우우-
그 와중에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인테르가 타고 있던 황소가 길게 울음소리를 흘렸다.
어쩌지. 시선이 마주쳤으니 손이라도 흔들어줘야 하나? 아니면 황족을 태우고 다니는 고귀한 소니까, 사장님이 타고 다니는 롤스로이스처럼 귀중하게 대해야 하나?
모르겠다. 황족이 타고 다니는 소라니. 도저히 머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기괴한 문장이야.
“많이 놀라신 모양이군요.”
짧은 시간 동안 치열하게 돌아갔던 머리는 아인테르의 목소리 덕에 멈추었다.
“그, 독특한 광경이기는 해서 말입니다. 물론 지엄한 황족의 권위는 위대한 핏줄에서 나오는 것이지 탈것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만, 일개 소가 각하의 권위를 감당할 수 있을는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너 그러고 있으니까 황족도 후작도 아닌 한량 같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아 적절히 둘러댔다.
사람의 권위라는 건 그 사람의 신분과 능력, 성품, 업적 등을 통해 생기는 법이다. 세상에 둘도 없을 명마를 탄다고 노예가 황제가 되는 건 아니며, 황족이 소를 탄다고 동네 백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걸 감안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권위라는 건 햇빛과도 같기에, 햇빛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이 존재한다. 일단 소를 타고 다니는 건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내가 권위나 의전에 큰 관심이 없어도 그 정도는 알아.
“하하!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북방에서는 충분합니다!”
내 필사적인 포장과 은근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인테르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황소의 목을 토닥였다.
기분 탓인가. 어째 결혼식 전보다 더 호쾌해진 것 같은데. 대충 0.05 류티스 정도로.
“소는 북방 유목민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든든하고 귀중한 아이지요. 흔히 유목민들은 말을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소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건… 의외로군요. 말과 비슷한 위상이라.”
털을 거의 무한에 가깝게 자체 생산하는 양, 온갖 가축들을 감시하고 인간의 친구인 개. 차라리 이 둘이 말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면 모를까, 설마 소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유목민들이 정주민들처럼 우경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저도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북방에서 살아간다면 북방의 가치관을 익혀야지요. 게다가 소를 타고 다니는 것도 은근히 편하고 좋습니다.”
“그렇군요.”
절로 납득이 가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베히모스의 터전으로 놀러 갈 때마다 아이들은 온갖 가축들의 등에 올라탔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나도 겸사겸사 같이 탔으니까. 그 과정에서 소도 몇 번 타봤지.
확실히 편하기는 편하더라. 워낙 온순하고 얌전하게 돌아다니는 녀석이라 그런지, 등에 누워 있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 저기 장인어른도 나오셨군요.”
아인테르의 말에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니, 성 정문에 우두커니 서있는 바란디가 후작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럼 저는 다시 목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돌보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돼서 말이지요.”
“아, 예. 그러십시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저야말로 이 먼 바란디가까지 와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작게 미소를 지은 아인테르는 슬며시 손을 뻗어 페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페디도 잘 놀다가 가거라. 성 안에 작은 동생이 있으니 인사도 하고.”
“웅!”
“페디야. 존댓말.”
“네!”
내 교정에 페디가 존댓말을 내뱉자, 아인테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크란도 언젠가는 페디처럼 능숙하게 말하는 날이 오겠지요. 하루라도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금방 올 겁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법이니까요.”
육아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하루하루는 강행군 같은데, 정작 돌이켜보면 1주, 1개월, 1년이 훌쩍 가더라. 참 기묘한 일이지.
그러니 아인테르의 소소한 소망도 금방 이루어질 거다.
‘크란이라.’
그보다 아이 이름이 크란이었구나. 매번 조카, 동생, 그 아이, 후작가의 귀한 분이라는 칭호로만 들어서 원. 태어난 지 수개월 정도가 지난 아이 이름을 이제야 듣게 됐어.
‘완벽하게 동화됐어.’
이윽고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소를 중하게 여기며 자가용처럼 타고 다니는 모습, 동네 양치기처럼 가축들을 돌보는 모습. 여기까지는 북방 생활에 적응을 잘 했다고 취급할 수 있다.
허나 첫 자식의 이름을 제국 본토식이 아니라 북방식으로 지었다? 이는 아인테르도 황족의 정체성보다는 북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택했다는 말이다. 북방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다 못해 완전히 수용했다는 뜻.
‘잘됐네.’
제국의 귀족이자 공무원, 북방에서 두 차례나 굴렀던 참전 용사로서 실로 기꺼운 일이다.
무려 황제의 유일한 동생이 북방의 유력 귀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북방의 색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황실과 제국을 향한 북방 유목민의 지지가 얼마나 열렬해질까.
사실 유목민 출신 귀족들만큼 문명화에 적극적인 사람들도 없으나, 그래도 제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존중한다고 하면 뿌듯하지. 필요에 따라 상대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상대가 내 문명을 존중하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오랜만에 직접 대면한 바란디가 후작은 이 세상 모든 행복을 짊어진 듯한 표정이었다.
통신구로도 종종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감정 없는 통신구는 외손주를 얻은 외할아버지의 기쁨을 완벽히 담아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별건 아니지만 선물입니다. 진즉에 축하드려야 했는데, 이제야 축하를 드리게 돼서 이자까지 붙여왔습니다.”
“이자라니요. 바로 오신다는 걸 개인적인 사정으로 말린 것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빈손으로 오셨어도 기꺼이 환영했을 겁니다.”
“차차기 후작을 처음 보는 날인데 빈손으로 오다니요. 미래의 후작께 밉보이기는 싫습니다.”
그러자 안 그래도 귀에 걸릴 듯 올라가 있던 후작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차차기 후작이라는 단어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바란디가 후작의 모든 걸 이어갈 존재,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던 딸이 낳은 소중한 손주, 구르트 후작가와 황실의 연관성을 상징하는 토템 등. 온갖 긍정적 타이틀은 한가득 담겨 있으니 어떤 단어보다 감미롭게 들리겠지.
그렇기에 후작이 조금, 추할 정도로 웃기 시작하는 건 애써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사실 나도 우리 아이들이 연관된 일이면 저렇게 웃잖아. 남을 보고 추하다 할 자격은 없다.
“아쟈씨.”
“으음?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아무튼 한참이나 히죽거리던 후작을 향해 페디가 말을 걸자, 후작은 부드러운 얼굴로 페디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나두 선물.”
그런 후작을 향해 페디가 작은 인형을 건네었다. 아직 어린 페디와 비교해도 작디작은 인형을.
“응?”
“허어.”
후작이 난데없는 선물에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나는 인형을 보자마자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저거 페디가 막 태어났을 때 내가 선물로 줬던 동물 인형 컬렉션 중 하나잖아. 어찌 보면 페디의 동물 사랑을 알렸던 신호탄과 같았던 물건 중 하나.
페디의 품에서 나온 걸 보면 여기까지 오는 내내 소중히 안고 있었다는 건데. 장생이가 페디 가슴을 가리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다.
‘어쩐지 장생이를 잡으러 간 것치고는 오래 걸리더라니.’
우리 아이들만큼 도망치는 동물을 잡고, 숨어있는 동물을 찾는 것에 능숙한 아이들은 없다. 그런 페디가 조금 늦는다 싶어서 의아하기는 했지. 설마 자기 방에 있던 인형 중에서 선물을 고르고 있었을 줄이야.
“페디가 아주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입니다. 제가 직접 고른 인형이기도 하지요. 아주 애지중지하는 물건인데, 동생을 보러 간다고 하니 하나 챙겼나 봅니다.”
“아니, 그렇게 귀한 걸.”
감동 섞인 후작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나한테도 의외의 사건이다. 저 인형은 황태녀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도 간혹 가지고 놀지만,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페디에게 있기에 페디가 눈에 불을 켜며 관리하고 있다. 인형을 배치한 위치가 조금만 달라져도 귀신같이 알아챌 정도. 황태녀가 하나만 달라 부탁해도 단호히 거절할 정도.
그렇게 아끼던 물건을 선물로 넘기다니. 비록 많고 많은 동물 컬렉션 중 하나라도 놀라운 일이다.
‘오랫동안 못 봐서 그런 건가?’
크란의 탄생은 황태녀의 열렬한 투정 덕분에 페디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새 동생을 보러 가자고 하니 바로 승낙한 거겠지.
허나 이번 동생은 무려 수개월 동안이나 보지 못해서인지, 페디의 마음속에서 애틋함이 자라고 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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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도련님. 크란도 오빠의 선물에 좋아할 겁니다.”
“동생이 조아하면 나도 조아요!”
그 말에 두 어른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미래에도 크라시우스 가문과 구르트 가문은 각별한 관계로 지낼 것 같다.
***
동생! 내 동생!
우리 집애서 지내는 동생이 아니라! 때부 집애서 지내는 동생이 아니라 다른 동생!
“후후, 그렇게 좋니?”
“웅!”
엄마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엿다.
엄쳥 조아! 동생 보는게 세상에서 제일 조아! 게다가 새동생은 엄청 오래 못밧서!
“마침 대부와 페디도 있다고 하더구나. 우리 딸, 놀 사람이 많아서 좋겠어.”
“와!”
새동생도 조치만 때부랑 뻬디도 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