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88)
로판 속 공무원 888화(889/945)
북방에는 새로 태어난 아이가 첫 번째 파트너 겸 애마를 고르기 전까지 외부인과 접촉할 수 없다는 독특한 전통이 존재한다.
어쩌다 이런 전통이 시작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를 학대하는 전통도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어쩌면 고대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에, 외부인들이 가져오는 병균과 접촉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진 전통일 수도 있고.
그 시대에 병균이라는 개념을 알지는 못했겠지만 ‘막 태어났을 때 외부인과 접촉하면 자주 죽는 것 같더라.’ 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은 지식이 부족한 거지 지혜가 없는 게 아니니까.
아무튼 그러한 전통 때문에 아무도 황제의 조카이자 황태녀의 사촌인 고귀한 아이를 보지 못하던 상황. 허나 오늘, 길고 긴 침묵이 끝나고 나와 페디는 마침내 크란을 만나게 되었다. 이는 크란의 파트너가 정해졌다는 의미.
“고른다는 표현 때문에 거창하게 들리지만, 아이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망아지 중에서 가장 건장한 녀석을 뽑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대신 형식적으로 후보는 3마리를 고르고, 아이가 가장 먼저 쓰다듬는 망아지를 애마로 삼는 것이지요.”
지금 자신의 애마가 그 첫 번째 애마의 자식이라는 말을 덧붙인 바란디가 후작은 크란을 안은 채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파트너를 고른다고 해서 종교적 절차나 독특한 미신 같은 게 결합된 행위인가 싶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평범한 과정이었다. 그 정도면 태어나고 1주도 지나지 않아서 애마가 선정되는 경우도 있겠어.
“아- 우-!”
– 푸르르릉!
“어떻습니까? 후보는 어른들이 고른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아이가 고르기에 유대가 남다르지요? 실제로 유목민들은 어떠한 명마보다 자신의 첫 번째 말을 더 사랑하고 아끼는 편입니다.”
“그렇겠지요. 명마는 기회가 되면 언제든 얻을 수 있겠으나, 첫 번째 말은 인생에 하나뿐이니 말입니다.”
“하하, 백작의 말씀이 옳습니다.”
바란디가 후작의 품에 안긴 상태로 양팔을 허우적거리는 크란과 그런 크란을 향해 꼬리를 살랑거리는 망아지.
그 광경을 보니 내가 전선에 나설 때마다 죽어 가던 말들이 떠올랐다. 내가 타던 말들은 교감을 나누기도 전에 픽픽 쓰러졌었지. 나를 처리하기는 힘드니 일단 낙마부터 시키자며 말을 노리던 카간의 수하들 때문에.
그렇게 내 말들이 소모품처럼 허망히 쓰러지는 반면, 유목민들은 이런 방식으로 말과의 교감을 높여갔구나. 뭔가 억울하면서도 부럽다.
‘교감이라.’
슬쩍 크란에게 시선을 돌리자 크란의 겨드랑이에 끼워져 있는 작은 인형이 보였다.
우리 페디의 동물 컬렉션 중 하나. 공교롭게도 유목민의 파트너인 말 모양의 인형.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네.’
페디는 아직 유목민과 말의 상관관계를 모른다. 아니, 유목민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허나 그런 페디가 고른 선물치고는 상당히 적절한 선물이기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첫 번째 말을 고르기 무섭게 말 인형도 선물 받았으니, 크란과 말의 교감은 당대 제일 수준으로 치솟지 않을까? 크란이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면 린처럼 승마 대회 1위에 빛나는 기수가 될지도 몰라.
“각하!”
이후 크란의 자그마한 손이 망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구경하던 중, 마구간을 지키던 병사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귀한 손님이 계시니 급한 일이 아니면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을 텐데?”
“방금 집사장의 연락이 왔는데, 황후 폐하와 황태녀 전하께서 오셨다고 합니다!”
후작의 언짢은 반응과 달리 매우 급한 일이었다.그것도 후작이 뛰다시피 움직여야 할 정도로.
“페디야, 우리도 가자. 누나 왔대.”
“웅!”
빠르게 사라지는 후작의 뒤를 따라 우리도 걸음을 옮겼다. 황후와 황태녀가 왔다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 와중에 주인과 헤어진 망아지는 구슬프게 울더니, 페디가 입에 물려준 당근 덕에 도로 조용해졌다.
‘어디서 찾은 거야.’
점점 페디의 행동력에 놀라게 된다. 이 아비도 모르는 사이에 인형을 챙기더니, 이번에는 처음 온 마구간에서 당근도 찾는구나.
이 아빠는 우리 아들이 감찰 최적화 인재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좀 무서워. 우리 아들은 돈 많은 백수로 지냈으면 하는데.
이왕이면 최종 학력도 빵빵한 백수로.
황후와 황태녀의 방문에 가축들과 하나가 되어가던 아인테르도 급히 복귀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이드라펜 후작. 황궁이 아닌 북방에서 지내게 되어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히 잘 지내는 것 같군요.”
밀짚모자를 쓰고 긴 나무 막대를 들고 있는 아인테르. 누가 봐도 훌륭한 양치기의 모습인지라 황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쿡쿡 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와! 삼쵼! 하라부지 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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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녀도 아인테르의 모습에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할아버지라.’
다만 좋아하는 이유가 다소 오묘했다. 황궁 구석에서 농사, 축산에 몰두하는 상황을 닮아서 좋아하는 것이니까.
졸지에 상황의 은밀한 두덕리 온라인이 밝혀지고 말았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나, 그래도 대다수의 귀족들은 모르─
‘아.’
황후와 황태녀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동시에 정신을 반쯤 내놓은 것 같은 후작의 표정에 절로 감탄하고 말았다.
상황에 대한 기밀 아닌 기밀이 나오자마자 스스로 시각과 청각을 차단했다. 아무리 상황과 사돈이 되었다지만, 감히 상황의 은밀한 취미 생활에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훌륭한 자세다. 상황의 사돈이자 황제(皇弟)의 장인이 되었다면 어깨가 으쓱거릴 법도 한데, 누구보다 완벽한 처세술을 보이고 있잖아. 후작가였다가 백작가로 강등되었던 모 가문과는 너무나 비교된다.
“하라부지도 그 모자 자주써! 나도 갖고시퍼!”
다만 후작의 완벽하고도 처절한 처세술조차 순진무구한 황태녀의 맹공은 버틸 수 없었다.
물리적으로 눈과 귀를 막는 게 아닌 이상, 계속 말소리가 들리면 결국 들을 수밖에 없다. 황태녀가 말을 이어갈수록 후작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습니다.’ 라는 핑계를 대지 못한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저 평온하고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은 후작의 야망이 이렇게 막을 내리는가.
“후작 각하.”
“…예, 백작.”
그렇기에 후작의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황 폐하께옵서는 양위하신 이후로 여러 짐승을 기르고 계십니다. 상황 폐하의 유일한 취미나 마찬가지이니, 사돈이신 후작께서 훌륭한 가축들을 보낸다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파도라면 올라타라고. 상황의 취미를 외면할 수 없다면 취미에 보탬이 되는 공급 루트로 진화하라고.
사실 제국 본토에서 구할 수 있는 짐승보다는 북방에서 구할 수 있는 짐승이 더욱 많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더 튼튼할 확률도 높지. 그러니 북방 유일 후작인 바란디가 후작이 작정하고 짐승을 추린다면, 상황도 흡족하게 할 진상품이 마련될 수도 있다.
“백작의 말이 옳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해야겠군요.”
후작도 내 배려와 조언을 이해했는지, 침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포기가 빨라서 다행이다. 괜히 못 들은 척 고집을 부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삼쵼! 동생! 동생은 어딧서!?”
그리고 나와 후작의 합의가 끝나자마자 황태녀는 활기찬 목소리로 크란을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이 아이가 전하의 사촌 동생인 크란입니다.”
그런 황태녀를 향해 크란을 안고 있던 후작이 조심스레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황태녀가 크란을 쉽게 보고, 쉽게 만질 수 있도록.
“우와아아!”
그 배려 덕에 황태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무려 수개월 동안이나 보지 못했던 동생이다. 심지어 황궁 동생과 우리 집 동생이 아닌, 북방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태어난 동생이다. 황태녀 입장에서는 얼마나 신기하고 각별한 동생일까.
“우우?”
물론 크란에게도 황태녀는 처음 보는 사촌 언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부담스럽게 쳐다보면 어린 마음에 울 수도 있으나,
“뺘우!”
놀랍게도 크란은 빵끗 웃으며 황태녀에게 손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예뻐하는 사람을 알아본 모양이다.
‘보기 좋네.’
훈훈한 광경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미래의 황제와 미래의 후작, 이 둘의 첫 만남은 아름답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첫 만남이 좋았으니, 이 관계가 쭉 지속된다면 구르트 후작가는 황실의 충성스러운 지지자이자 방패로 남겠지. 이는 황태녀의 대부이자 제국의 귀족으로서 기꺼운 일이다.
“우웅?”
다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변은 갑작스레 일어났다.
“때부, 때부.”
“예, 전하. 말씀하시지요.”
“끄란이 가지고 있는거. 뻬디 인형 아냐?”
그 말에 흠칫 어깨가 떨렸다.
자신의 인형을 내어준 페디의 마음씨가 너무 기특해서, 페디의 정성을 알았는지 인형을 소중하게 안고 있는 크란이 귀여워서 잠시 잊고 있었다.
‘황태녀도 노리고 있었지.’
페디의 동물 인형 컬렉션은 우리 아이들은 물론, 황태녀도 탐내던 지고의 보물이었다는 걸.
‘어쩌지 이거.’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황태녀는 졸지에 자신이 탐내던 보물이 다른 사람 손에 있다는 걸, 첫 번째 동생인 페디가 배신 아닌 배신을 했다는 걸 두 눈으로 보게 됐다. 이는 황태녀가 분노와 억울함, 모멸감에 휩싸여도 이상하지 않은 참사다.
“웅! 내가 선물로 줫서!”
‘이런.’
일단 아무런 변명이나 내뱉으며 시간을 끌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페디의 입이 더 빨랐다.
우리 착하고 사랑스러운 페디. 역시 거짓말은 못 하는 순수한 아이야. 우리 아빠는 그런 페디가 너무 좋단다.
하지만 거짓말을 못 하면 침묵을 지킨다는 방법도 있단다…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잘 알아두렴…
“뻬, 뻬디 인형.”
페디의 확답에 황태녀의 작은 몸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두… 갖고 싶다구 했는대… 나한테는 안줫는대…”
어느새 눈물도 글썽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거 제대로 망한 것 같다. 이번에 토라진 황태녀는 절대 쉽게 달랠 수 없다고 본능이 외치고 있다.
“우우?”
그저 영문을 모르는 크란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촌 언니의 이상 증세를 지켜볼 뿐이었다.
인형은 여전히 꼭 껴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