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89)
로판 속 공무원 889화(890/945)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통 펑펑 눈물을 흘리거나, 격렬하게 분노를 표하거나, 바닥에 드러누워 자유형을 하는 경우가 잦다. 도저히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서 온몸으로 서러움을 표출하는 거지.
허나 황태녀의 반응은 셋 중 무엇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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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갖구 시펏는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망울로 크란과 인형, 페디를 번갈아보던 황태녀는 푹 고개를 숙이더니, 쪼르륵 황후에게 달려가 황후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황후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은 어떤 것도 보기 싫고,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어머나.”
황태녀가 생애 최초로 보인 반응에 황후조차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늘 미소를 머금던 황후의 얼굴이 잠깐이나마 흔들렸을까.
당황스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태녀가 떼를 쓰거나 서운함을 표시한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지금처럼 완전히 풀이 죽은 모습은 처음 본다. 나도 황태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본 가족이나 마찬가진데도.
‘차라리 화를 냈으면.’
무심코 침을 삼키고 말았다.
물론 화를 냈다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분노를 토했을 거다. 결코 쉽게 달래거나 진정시킬 수 없었을 터. 어쩌면 바란디가 후작령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대부랑 페디가 밉다며 토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허나 평소보다 격렬히 화를 내는 것과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전자는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지, 후자는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건데.
“저, 전하.”
이 어색하고도 난감한 침묵 속에서 바란디가 후작의 속만 타들어갔다.
정황상 자기 외손녀가 소중히 품고 있는 인형. 저 인형 때문에 차기 황제가 크게 상심한 상황이다. 완벽한 처신을 위하여 상황의 취미 얘기가 나오자 고의적으로 시각과 청각을 차단한 후작이었는데, 졸지에 차기 황제의 미움을 사게 생겼다.
아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일 거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하기에는 아이들 사이의 문제라 애매하고, 인형을 황태녀에게 주기에는 외손녀가 외부인에게 받은 첫 선물이기도 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끔찍한 딜레마야.
“조카님. 이 삼촌이 멋지고 예쁜 인형들을 잔뜩 준비하겠습니다. 전하의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마련할 터이니, 부디 마음을 푸시지요.”
‘아.’
장인어른의 딜레마를 눈치챈 듯 아인테르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영 좋지 않은 발언이라 속으로 탄식하고 말았다.
황태녀는 단순히 인형 때문에 충격받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그렇게 부탁해도 가질 수 없었던 물건이, 첫 번째 동생의 보물과도 같은 물건이 처음 보는 사촌 동생 손에 있다는 것. 바로 그 점이 충격적인 거다. 인형은 황태녀의 슬픔을 상징하는 매개체일 뿐, 진짜 이유라고 할 수는 없다.
애석하게도 아인테르는 그 점을 간과하였다. 온화한 성품, 황태녀를 향한 애정과 별개로 막 아빠가 된 초보자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인형이라는 키워드에 매몰되어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필요업써.”
아무튼 본질을 꿰뚫지 못한 아인테르의 말에 황태녀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당연히 얼굴은 황후의 치마에 묻은 채로.
그나마 대답이라도 해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싶다. 삼촌의 말조차 무시했다면 사태가 어마어마하게 심각하다는 뜻이니.
“누나.”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어른들이 고심하는 사이, 어찌 보면 사태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페디가 입을 열었다.
순간 페디의 입을 막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상황에서 페디가 황태녀를 조금이라도 자극하면 황태녀의 사춘기가 10년 정도 빠르게 올 수도 있다.
동시에 아주 희미한 기대감도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마음은 아이가 알고, 어른이 채워주지 못하는 감정은 같은 또래가 채워주는 법. 어쩌면 페디가 황태녀를 성공적으로 달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꿈틀거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페디와 황태녀를 번갈아 봤다.
‘힘내라, 우리 아들…!’
이 아빠는 언제나 우리 아들을 믿어! 우리 페디는 아빠를 실망시킨 적 없는 훌륭한 아들이니까!
“누나두 인형 만치않아?”
처음으로 페디에게 배신이라는 걸 당한 기분이다.
“그래두 갖고시프면 하나 줄깨.”
“아.”
연이은 추가 타격에 육성으로 탄식이 나왔다.
이건 지뢰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참사다. 페디가 황태녀의 멘탈에 클레이모어를 터뜨린 격이다.
“필요업써!”
페디의 잔인한 발언에 진동 모드 핸드폰 수준으로 몸을 떨던 황태녀. 결국 인내가 끝에 이르렀는지, 꼭꼭 숨겨두었던 얼굴을 빼내어 빽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분에 못 이겨 흘린 눈물이 얼굴을 가득 덮은 건 말할 것도 없으리라.
“뻬디 바보! 나빠! 바보 동생이야!”
그렇게 외친 황태녀는 황후까지 내팽긴 채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누구도 잡지 못한 광속의 질주라 멍하니 황태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길도 모르잖아.’
이윽고 황태녀에 대한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는 황궁도, 내 저택도 아닌 제3의 장소다. 황태녀에게 있어서는 미지의 장소이니, 저렇게 달려봤자 금방 길을 잃을 터. 무려 후작성에서 길을 잃는다면 다시 여기로 돌아오기도 힘들 거다.
물론 후작성에는 무수히 많은 사용인들이 있으니 길 잃은 황태녀도 금방 찾겠다만, 잠깐이라도 황태녀를 미아 상태로 만들기는 좀.
“전─”
“제가 갈 테니 대부는 여기 있으세요. 지금은 대부가 가면 더 도망칠 거예요.”
황후의 제지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녀가 크게 상심한 판국에 어쭙잖은 각오로 다가가면 그다음은 파국이다. 지금은 친모인 황후에게 맡기고, 다른 어른들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옳다.
“황후 폐하께 큰 결례를 끼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결례라니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다투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하물며 남매와도 같은 친구라면 더욱이요.”
내 사과에 미소를 지은 황후는 바란디가 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후작. 이번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아이들이 다투는 건 마음 아픈 일이지만, 당연히 일어나는 일 중 하나니까요.”
“하, 하오나 황후 폐하. 황태녀 전하께서는 평범한 아이가 아닌 제국의 주인이 되실 분입니다. 아무리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소신의 부주의로 전하께서 상심하셨으니 어찌 책임이 없겠습니까.”
“아니요.”
그새 5년은 늙은 것 같은 후작의 말에 황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와 샤를로테는 가족을 보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은 황태녀와 신하의 분란이 아닌, 가족 사이의 작은 다툼입니다.”
“폐하…”
“후작은 크란을 다독여주세요. 샤를로테는 제가 잘 다독일 테니.”
그 말을 끝으로 황후는 시녀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황태녀의 돌발 행동에 대처하는 모습치고는 상당히 자연스럽다. 시녀들은 서로 일정 간격을 유지하여 혹여나 황태녀가 역주행을 할 경우 빠르게 포획할 수 있도록 포위진을 갖추었고, 보폭도 안정적이라 황태녀의 돌진이 포위망을 깨부술 가능성도 봉쇄했다.
어째 이 상황이 익숙한 듯한 모습이다. 혹시 황궁에서는 황태녀와 시녀들의 술래잡기가 일상인가?
“아빠, 아빠.”
“응?”
“나, 뭐 잘못햇서?”
페디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계기가 페디인 건 맞다. 하지만 이걸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지. 아이가 선의로 준비한 선물이 어찌 잘못이겠나.
“아니야. 누나가 조금 서운해서 그런 거지, 페디는 잘못한 거 없어.”
“그치만… 누나… 인형때문애 화난거가튼데…”
“사실 누나도 크란한테 줄 선물로 인형을 준비했거든. 페디가 먼저 줘서 심술이 난 거야.”
“진쨔?”
아빠도 몰라. 하지만 오늘부터 그런 걸로 치자.
“그럼. 그러니 우리 페디, 누나가 돌아오면 인형 말고 다른 선물을 준비해 볼래?”
“선무울?”
“선물 때문에 화났으니까 선물로 풀어야지. 하지만 인형은 누나도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걸로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도 이게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다. 지나가던 티티가 들어도 고개를 저을만한 기괴한 논리였다.
허나 논리의 타당성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건 페디가 황태녀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니까. 황후가 황태녀의 마음을 그럭저럭 달래는 것에 성공하면, 황태녀도 페디의 새로운 선물에 완전히 마음을 풀 테니까.
분명 그럴 거다. 반드시 그래야 돼.
“우우…”
해피 엔딩을 간절히 바라며 페디를 다독이는 사이, 이 모든 소란을 지켜본 크란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황태녀가 자신을 예뻐하는 걸 눈치채고 빵끗 웃었던 크란이다. 헌데 자신을 예뻐하던 황태녀가 급격히 동요하더니, 갑자기 울면서 뛰쳐나갔다. 막 태어난 아이라도 무언가 문제가 터졌다는 걸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우리 크란. 언니는 잠깐 일이 있어서 간 거야. 곧 돌아올 테니 울지 말렴.”
그 광경에 아인테르가 급히 크란을 다독였다.
다행히 친부의 품이 안정적이고 따뜻했는지, 울먹이던 크란은 금방 잠잠해졌다.
“저, 각하.”
“말씀하시지요, 백작.”
“그러고 보니 샤티 영애는 어디 있습니까?”
폭풍이 지나가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황후와 황태녀를 맞이한 자리에 샤티가 없었다.
“귀빈을 맞이하기 위한 연회를 준비 중입니다. 마침 저희가 준비한 재료보다 더 좋은 것을 카이타나 백작이 구했다고 하여 급히 이동했는데, 어찌 보면 다행이군요.”
후작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의 사돈인 바란디가 후작, 황제의 동생인 아인테르조차 황태녀의 눈물에 당황했다. 만약 이 자리에 샤티가 있었다면 얼마나 패닉에 빠졌을까. 차라리 부재중이었던 게 다행이었다.
“각하. 이미 황후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이번 일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마십시오. 황태녀 전하시라면 금방 마음을 풀고 크란을 귀여워하실 겁니다.”
“그렇겠지요. 전하께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선하신 분이라는 건 익히 들었습니다.”
내 위로에 후작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은근슬쩍 크란에게 향하는 것이, 외손녀를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중인 것 같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샤를로테를 잡았다.
아무리 샤를로테가 빨라도 이곳은 황궁이 아니고, 술래는 건장한 시녀들이다. 시녀들이 작정하면 금방 잡힐 수밖에 없다.
“우리 샤를로테. 그만 뚝 그쳐야지?”
“우웅…”
이윽고 내 품에 안긴 샤를로테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자, 샤를로테는 가볍게 도리질을 치며 반항했다.
“동생들 앞에서 못생긴 얼굴을 보여줄 거니?”
하지만 동생들─ 페디와 크란을 언급하자 반항을 멈추었다.
다행이다. 아직 동생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구나. 단순히 서운한 감정이 크게 폭발한 것뿐이야.
“샤를로테. 페디가 크란에게 인형을 준 건, 크란은 페디의 집에 못 가니까 그런 걸 거야. 우리 샤를로테는 언제든 페디의 집에도 갈 수 있고, 인형도 볼 수 있잖니.”
“몰라…”
“게다가 크란은 처음 보는 동생이고. 그러면 반가워서 선물을 줄 수도 있지?”
내 말에 샤를로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마아안…”
그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싫단 말이야…”
“싫어?”
“이상해… 뻬디가 끄란한태 선물주니까… 엄청 실어…”
입술을 삐죽거리며 쪼그마한 손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뻬디가 나한테 안준거 다른 동생한태 주니까… 여기가 아파…”
“어머나.”
예상치 못한 말이라 놀라고 말았다.
얘도 참. 벌써 그런 감정을 느끼면 곤란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