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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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공께서 친히 하사하신 홍삼, 아니 포션을 적당히 숙소에 두고 동아리실로 향했다. 분명 오늘 방학식을 한 기억이 있는데 아직도 출근지가 동아리실인 건 무슨 상황일까.
심지어 부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동아리실에 주둔 중인 것도 어이가 없었다. 뭔가 열심히 상의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아까까지 저런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짬을 맞아서 그런지 썩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언짢음을 가득 담아 부원들을 바라보다가 의외의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아, 오빠.”
“이리나?”
부원들 사이에 껴서 어색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던 이리나. 너는 왜 여깄냐. 표정을 보니 좋아서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오라버니, 오셨어요?”
등을 돌리고 있던 루이제가 이리나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반겨줬다. 그리고 루이제의 시선을 따라 같이 꽂히는 다섯 쌍의 시선.
“여기 모여서 뭐해?”
“일정 짜고 있었어요. 전부 아카데미에 머무는 건 아니라 미리 시간을 정해야죠.”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발이 묶인 것이 귀찮을 법도 하지만 제도 여행이 마냥 기대되는지 루이제의 표정은 해맑기 그지 없었다. 그래, 제도 좋지. 나도 처음 제도에 갔을 때는 조금은 두근거리고 그랬어.
그때만 해도 제도의 어둠이 그렇게 깊은 줄은 몰랐으니까. 제도의 번영은 공무원들의 피땀눈물로 이루어졌다는 걸 미처 몰랐다.
“잠깐 할 말이 있으니 다들 집중해라.”
씁쓸한 심정을 밀어내고 일단 부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괜히 제도 여행하면서 머물 숙소 정한답시고 날뛰기 전에 말해야지.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럼 없었겠냐.’
무슨 일이냐는 듯 묻는 류티스의 말에 자동으로 장전되는 쌍욕을 슬쩍 입술을 깨물며 진정시켰다.
저 핫소스 새끼, 졸업하는 날에는 졸업빵 명분으로 한 대만 패야지. 그건 빌라르도 인정할 거다. 같이 하자고 해도 좋아할 거다.
“방학 중에 아카데미가 아니라 제도에 머무는 건 어떠냐.”
“제도 말입니까?”
“그래.”
의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류티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단순히 제도 여행이 아니라 아예 제도에 상주하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나 보지. 물론 나도 그렇다. 어떤 미친 새끼가 그런 발상을 하냐고.
하지만 황태자는 해냈다. 그 새끼 이름 세 번 부르면 저승사자가 데려가려나.
“아카데미에 있으면 지루하지 않겠나. 제도는 구경할 곳도 많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도 편하다.”
“나쁘지 않군요. 방학 동안 지낼 숙소를 구하는 건 힘들겠지만…”
“내 집이다.”
“예?”
“내 집에서 머물면 된다고.”
두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 황태자한테 받은 금화로 메소 익스플로전 하고 싶으니까.
“집? 가주님은 저택에 외부인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가문 저택 말고 내 개인 저택.”
“개인 저택이 있었어?”
“두 분 형제 맞습니까?”
타니안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개인 저택은 나도 딱 잠잘 때 쓰는 수준으로만 사용해서 딱히 말할 기회가 없었지. 애초에 타일글레헨 백작령에 있는 본가도 못 가는 상황인데 한가롭게 ‘나 제도에 내 명의 부동산 있다’ 같은 말을 할 시간이 어딨어.
아무튼 의외의 제안과 의외의 숙소 제공에 잠시 딜레이가 있었지만, 저 녀석들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니기에 반대는 없었다. 애초에 제국 밖으로 나가라는 것만 아니면 아무래도 좋을 것들이니.
“루이제, 나도 같이 갈게.”
“정말? 진짜지?”
“응. 나도 제도는 별로 못 가봤거든.”
소란 속에서 루이제와 이리나가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나가 왜 여기 있었나 했는데 루이제가 같이 가자고 꼬드겼구나.
예상 외의 손님이지만, 하나 정도 늘었다고 감당 못할 정도로 좁은 저택은 아니니 괜찮다. 오히려 개노답 부원들 사이에 정상인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내 마음이 편안해지니 환영할 일.
‘정상인이라.’
동아리실에 모인 멤버를 훑어보니 정상인 비율이 파멸적이었다. 그래, 어차피 외부인이 참가했으면 굳이 하나로 끝낼 필요는 없겠지.
자의로 아카데미에 남은 학생들이 있다면 타의로 남아있는 학생들도 있다. 후자는 주로 업무가 남아있는 학생회라거나 학생회라거나 학생회가 있다. 그리고 내가 영입하려는 외부인도 학생회의 일원.
-똑똑
“마르. 있습니까?”
“칼 영식? 네, 들어오세요.”
루이제, 이리나, 마르게타가 저택에 있다면 개노답 부원들에게 시달려도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부원들이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해도 신분으로 크게 밀리지 않는 마르게타가 나서서 말려줄 거고.
“어서 와요, 칼 영식. 오늘도 올 줄은 몰랐는데요.”
싱긋 웃으며 반겨주는 마르게타를 보자 결심이 확고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마르게타도 초대한다.
“마르가 아직 업무 중이라는 말을 들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혹시 방해였습니까?”
“그럴 리가요. 언제든지 와도 괜찮다고 한 건 저였잖아요? 마침 거의 끝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길래 급하게 손을 저어 만류했다. 아직 일이 남아있기는 하니 용건만 말하고 가야지.
“사실 마르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저한테요?”
고개를 갸웃거린 마르게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제과 동아리에서 제도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들었어요. 제도까지 가까운 거리는 아닐 텐데 고생이 많겠어요.”
“괜찮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예 방학 동안 제 저택에 머무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더군요. 아카데미로 돌아올 필요는 없으니 여유롭죠.”
“…네?”
제도 얘기를 꺼내자 걱정 가득했던 마르게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동아리 전원이,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입가도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 것이 심하게 동요한 것 같다. 여기서 뜸을 들이면 마르게타의 생각이 어디까지 뻗을지 모르겠네.
“그래서 마르도 제 저택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네?”
“제가 마르에게 신세를 진 게 많지 않습니까. 즐거운 자리에 마르가 빠지면 허전할 것 같군요.”
사실 딱히 즐거운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마르게타가 저택에 있다면 천군만마나 다름없다. 이건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함 없는 진실.
그리고 저번 수학여행 때 마르게타와의 약속을 본의 아니게 어기고 말았으니까. 방에 놀러 가겠다고 말했으면서 결국 마지막까지 가지 않았으니 그 사과 대신이라고 하면 마르게타도 봐주지 않을까 싶다.
“아, 그, 그…”
하지만 마르게타는 갑작스런 드리프트에 당황했는지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며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마르?”
그래도 가만히 두면 진정되겠지 싶어 대답을 기다렸지만 진정은커녕 책상에 올려진 손마저 벌벌 떨렸다. 아니, 예상보다 격렬한 반응인데.
“괜찮습니까?”
“아, 네, 네. 괜찮아요!”
마르게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묻자 몽롱했던 초점에 생기가 돌아오며 급하게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가렸다. 서류는 왜…? 뭔가 숫자가 중구난방으로 적혀 있기는 했는데.
“마르, 제 초대는─”
“가, 갈게요. 꼭 갈게요, 칼 영식.”
수락을 받았으니 고맙다고 하고 돌아갔다. 더 남아서 얘기하기에는 마르게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마르게타가 당황하는 건 예상 범위였다. 내가 마르게타를 저택으로 초대한 건 처음이니까. 그런데 그걸 감안해도 더 격렬한 반응이었는데, 뭐지. 무슨 일 있나?
***
칼이 부회장실을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벌벌 떨리던 손이 진정됐다.
‘저택… 칼의 저택…’
제과 동아리가 방학 동안 칼의 저택에서 지낸다는 말을 듣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제과 동아리에는 루이제 영애도 있으니까.
칼에게 처음 안기는 것도 빼앗겼는데 칼의 저택에서 지내는 것도 뺏긴다?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나와 칼의 보금자리에 처음 들어가는 여자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라니, 절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칼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저택에 초대해줬다. 단독이 아니라는 건 조금 아쉽지만 나도 처음이 되는 거니 용납할 수 있는 수준.
‘칼의 저택.’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루이제 영애가 가는 것은 동아리의 일이지만 내가 가는 것은 칼의 초대를 받아서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레이디를 저택에 초대? 이건 칼도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거야. 날 짝으로 생각하니 가능한 일이지. 칼도 참, 이렇게 돌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전하께 감사해야겠어.’
황태자, 길버트 리브노만. 지금까지 황태자 전하와 엮일 일이 없어서 큰 관심을 가진 상대는 아니었다.
그런 황태자 전하의 제안으로 동아리가 칼의 저택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원망이 생겼지만, 오히려 내가 초대 받는 계기가 되었으니 원망이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원망과 함께 만족감이 담긴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시선이 아직도 가리고 있는 서류로 향했다.
“큰일 날 뻔했네…”
조심스레 서류를 가린 손을 치웠다. 그러자 맨 위에 적힌 글자와 숫자들.
마5 칼7 르4 크3 게4 라5 타5 시3 바6 우3 렌7 스3 티4
나와 칼의 이름, 그리고 그 획수.
절대 들켜서는 안되는 걸 가장 들키면 안되는 사람에게 들킬 뻔했다.
“부회장님. 이름점이라고 아세요?”
얼마 전에 서기가 했던 말.
‘괜한 말을 해가지고…’
그래도 그 괜한 말에 휘둘린 것이 나니까 뭐라 할 말도 없다. 그치만 이름으로 궁합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 당연히 궁금하지 않아?
물론 나와 칼의 궁합은 이런 조잡한 걸로 하지 않아도 최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둘의 관계는 하늘이 만든 운명이니까. 응, 당연히 최고의 궁합이 나올 거야.
─라고 생각했었다.
‘왜 89야.’
맨 아래에 적힌 숫자는 89라는 수치였다. 다시 봐도 이상하다. 왜 100이 아니야? 당연히 100이여야 되는 거 아니야? 나와 칼 사이에 11%나 부족하다고? 거짓말, 역시 조잡한 점이야. 이런 건 믿을 수 없지, 응.
그리고 이 조잡한 점을 혼자 끄적였다는 걸 칼에게 들킬 뻔했다. 그럼 칼이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
보통 재무성 관료들은 철저하고 이성적인 업무를 보는 편이기에 미신을 믿지 않는다. 간혹 믿지 않는 것을 넘어 미신을 믿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깔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만약, 만약 칼도 그 경우라면.
“마르도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군요. 다시 봤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칼의 모습을 상상해 버렸다. 안돼, 그건 절대 안돼! 칼한테 경멸 받으면 정말 죽어버릴 거야!
다시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이름점이 적힌 서류를 찢어버리려고 했다. 이 흉한 물건, 당장 없애버려야 해.
’89도 높은 편 아닌가?’
하지만 조금의 미련이 남아 차마 찢지 못했다. 물론 100이 나와야 정상이지만, 그래도 89도 높은 편이 아닐까?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찢지 않고 보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