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90)
로판 속 공무원 890화(891/945)
황태녀의 대탈주로 인해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졌으나,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활기를 되찾았다.
“어서 오세요, 백작 각하. 인사가 늦었지만 바란디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잠시 외출을 떠났던 샤티가 돌아왔으니까.
황태녀의 눈물과 울분을 지켜본 사람끼리 모여 있었다면 여전히 분위기가 칙칙했겠지만, 샤티는 때마침 부재중이어서 사태를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정수가 유입되었으니,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드는 건 당연한 일.
“우아- 우-!”
심지어 사촌 언니의 이상 증세에 울먹거리던 크란도 엄마의 등장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행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크게 놀랐을 크란이 진정됐다면 어른들도 한시름 놓을 수 있지.
“그런데 황후 폐하와 황태녀 전하는 어디 계시죠? 성에 오셨다고 들어서 급하게 복귀한 건데요.”
크란을 품에 안은 샤티는 크란처럼 환한 미소를 짓더니, 이윽고 아인테르와 바란디가 후작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의문이기는 할 거다. 무려 황후와 황태녀가 강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왔거늘, 정작 소식의 주인공들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건가 의문이 들 상황이지.
“조카님은 이 성에 처음 오는 것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색달라서 그런지, 성 이곳저곳을 누비고 계십니다.”
샤티의 의문에 아인테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인테르의 말처럼 황태녀는 후작성 곳곳을 누비는 중이니까. 그 사유가 흥미로 인한 탐방이 아닌 분노로 인한 탈주라는 게 문제일 뿐.
“그래요? 그래도 폐하와 전하께서 귀한 발걸음을 하셨는데 아무도 모시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죠. 제가 지금이라도 두 분한테─”
“아뇨아뇨. 괜찮습니다. 모녀가 느긋하게 둘러보고 싶다고 하셔서 시녀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물리셨습니다.”
“그, 그렇군요.”
필사적인 만류에 샤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심상치 않은 일이 터지긴 터졌다는 확신이 담긴 표정이었다.
당연한 결과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질감을 풍기는데 눈치채지 못하면 그게 사람이냐. 게다가 샤티는 후작위를 물려받을 후계자고, 제국인이 되기 전에는 차기 부족장이었던 사람이다.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면 민감했지, 절대 둔한 사람은 아니야.
“…페디도 어서 오렴. 우리 크란하고는 이미 인사했지?”
그리고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다는 것은 눈치가 좋다는 뜻. 이 이상 접근해 봤자 서로 난감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페디에게 미소 지었다.
“페디는 동생이 많으니까, 크란도 동생처럼 여겨줬으면 좋겠어.”
“우웅! 끄란도 내 동생이애요!”
페디의 활기찬 대답에 샤티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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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란이 가지고 있는 인형도 페디가 선물로 준 겁니다.”
“세상에.”
아인테르의 첨언에 샤티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저 인형 때문에 어떤 사고가 터졌는지 알면 절대 웃지 못하겠지만, 원래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모르는 사람은 계속 모르는 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황태녀의 우당탕탕 대탈주는 황후의 성공적인 진압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황태녀의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는지, 황태녀는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각하기는 하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놀기 좋아하는 황태녀가, 동생들을 사랑하는 황태녀가 홀로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것도 그냥 동생이 아니다. 수개월의 인내 끝에 겨우 만난 동생이고, 핏줄이 이어져 있는 친척이기도 하다. 평상시의 황태녀라면 지금쯤 크란을 품에 안은 채 후작성 복도를 질주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 뒤에는 페디가 있어야 하고.
“대부.”
“아, 폐하.”
급히 마련한 초콜릿 상자를 매만지다가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 황급히 상자를 숨겼다.
단순히 초콜릿 몇 개 수준이 아니라 무려 상자다. 이렇게 대용량을 황태녀에게 준다면 황태녀의 이가 남아나지 않을 터. 황후가 보면 대녀의 이빨을 테러하려는 사악한 대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후후,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너무 커서 멀리서부터 보였거든요.”
“소, 송구하옵나이다.”
그렇구나. 그 정도로 컸구나. 황태녀의 분노가 큰 것 같아서 선물도 큰 걸로 준비했는데, 커도 너무 컸구나…
“좋은 선물을 준비해 줘서 고맙지만, 잠깐 저한테 맡겨주세요. 지금 황태녀한테 주면 홧김에 전부 먹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아, 예. 여기 있습니다.”
그건 안 될 말이기에 즉각 초콜릿 상자를 황후에게 바쳤다.
루센 왕국에서 지즈를 타고 날아온 초콜릿이다. 지즈가 챙겨올 만큼 맛도 양도 확실한 물건인지라, 자제심 없이 먹으면 여러 의미로 끔찍한 결과가 일어나게 된다. 황태녀의 뱃살이 늘어나거나, 이가 크게 상하거나.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사실 둘 다일 확률이 높기는 해.
“저, 폐하.”
“말하세요.”
“전하께서는 좀, 괜찮으십니까?”
그 말에 황후는 난처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저도 샤를로테가 저렇게 토라진 건 처음 봐서요.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괜찮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군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친모 입에서 나온 ‘나도 저렇게 삐진 건 처음 본다.’ 라는 발언. 대체 어떻게 해야 황태녀의 마음이 풀릴까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일단 황태녀가 방에서 나오는 수준은 돼야 페디가 선물을 줄 수 있고, 선물을 받아야 황태녀도 완전히 회복될 텐데 말이야. 이거 페디를 다짜고짜 방에 집어넣을 수도 없고.
“그보다 대부.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시간을 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폐하.”
저택에 있는 티티와 성수들을 긴급 투입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황후가 독대를 요구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 타이밍에 긴히 할 말이 있다면 높은 확률로 황태녀와 페디에 관한 일이겠지. 그런 거라면 없던 시간도 만들어서 응할 의향이 있다.
‘어차피 문 앞에 있어봤자 의미도 없으니.’
나와 황후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임에도 묵묵부답인 황태녀.
일단은 황태녀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한 뒤, 저녁 즈음 다시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저녁때 황태녀를 보러 가는 건 무리일 것 같다.
저녁에는 내가 침대에 누워서 골골거릴 예정이니까.
“폐, 폐하. 송구하오나 소신이 황태녀 전하에 대한 걱정으로 귀가 멀어, 폐하의 말씀을 온전히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미약한 희망을 가진 채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 잘못 들은 거겠지. 황태녀를 걱정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청각이 맛이 간 거야. 분명 그런 걸 거야.
“샤를로테가 크란에게 질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아.’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단순히 인형을 갖지 못한 질투가 아닌, 페디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준 것. 그것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게다가 정신승리의 여지를 완전히 차단한 첨언까지 붙였다.
과연 전승공의 딸다운 모습이다. 상대의 도주로를 이렇게 완벽히 차단하다니. 대단해.
“폐하. 질투, 라고 하시면…?”
아무튼 예상치 못한 폭탄 발언에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참담한 상황이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질투라는 감정이 무조건 이성 사이의 감정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가족 사이, 친구 사이에도 질투는 꽃피우는 법이다. 내가 우려하는 그 감정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
“대부.”
“예, 폐하.”
“저는 대부가 사돈이 되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말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내 세상이 잠시 멈췄다.
***
내 말에 대부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혹시 눈을 뜬 채로 기절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만큼 내가 한 말은 대부에게도 충격적인 말이었으니.
‘대녀를 며느리로 들일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물론 벌써부터 결혼을 논하는 건 성급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상황이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 10살도 되지 못한 꼬꼬마들. 아무리 귀족 간의 결혼은 평민 간의 결혼보다 다소 이른 경우가 있더라도, 10살 이전에 결혼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신 약혼은 이 나이에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문제가 없는 수준을 넘어 권장하는 수준이다.
‘어릴 때부터 알아둬야 미래가 편하지.’
귀족의 결혼은 보통 가문과 가문의 결합, 사랑이 아닌 필요에 의한 정략이다.
그러나 기껏 결합한 부부가 불화로 갈라지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결혼이 되니, 어릴 때부터 친구라는 명목으로 붙여두는 경우가 잦다. 사실상 약혼 관계나 마찬가지인 친구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귀족들은 그렇게 친밀감을 쌓으면서 자연스레 결혼까지 나아가게 된다. 아이들 입장에서도 어차피 할 결혼이라면 친한 사람과 하는 것이 좋을 테니.
‘딱 그 상황이기는 한데.’
의도한 건 아니지만 샤를로테와 페디의 상황이 결혼을 전제로 한 약혼 관계와 유사하게 됐다. 대부 입장에서는 둘의 결혼이 현실적으로 다가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곤란하게 됐네.’
여전히 침묵 상태인 대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샤를로테가 원하는 상대라면 누구라도 응원할 생각이다. 내가 누군가의 결혼을 반대할 입장은 아니니까. 나는 뭐 모두의 지지와 축복을 받으면서 결혼했나?
심지어 상대가 페디라면 더더욱 환영이다. 황가와 크라시우스 가문의 결합, 샤를로테와 대부의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는 것이니 어찌 달갑지 않을까. 페디의 성품 자체도 훌륭하고.
다만 내 입장과 달리 대부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졸지에 차기 황제의 시아버지가 되게 생겼잖아.
‘대부한테는 위험한 일이야.’
이미 수많은 명예와 권력을 짊어진 대부다. 대부의 성품을 생각하면 그것들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겠지만, 도리어 그 성품 덕분에 어깨에 짊어진 짐을 부담스러워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차기 황제의 대부에 이어 시아버지? 다른 귀족들이 대부를 어떤 눈으로 보고, 대부는 얼마나 부담스러워할까.
“대부. 물론 어린아이가 잠깐 품고 갈 가벼운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10년은 더 지나야 확실해질 감정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의 말씀이 옳지요.”
내 위로에 멍하니 허공만 보던 대부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틀렸다. 이미 머릿속에서 샤를로테와 페디의 결혼식이 열린 모양이야.
“저, 폐하.”
“말하세요.”
“그으, 황제 폐하께는 이 일을 비밀로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결혼식에 이어 폐하의 격렬한 호통까지 스쳐 지나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