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92)
로판 속 공무원 892화(893/945)
페디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누구도 닿을 수 없는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다행히 황태녀는 페디의 사과와 선물에 마음이 풀렸고, 크란을 다시 귀여워하기 시작했으며, 크란도 사촌 언니의 진심 쓰다듬기에 꺄르르 웃으며 기뻐했다.
하마터면 차기 황제와 차차기 후작의 사이가 틀어질 뻔했지만, 기적적으로 다시 화합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아직도 소식이 없다.’
그리고 바란디가 후작령에서 복귀하고 사흘이나 지난 지금. 아직까지 황제에게서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연락이 있기는 했다. 자기도 못 본 조카를 먼저 보니 어땠냐는 농담 섞인 구박이었지만.
‘역시 황후야.’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일이라는 것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기에 노심초사했으나, 사흘이나 잠잠하다면 확실하다. 황후는 약속대로 황태녀의 감정을 황제에게 말하지 않았다. 황태녀가 페디에게 다소 조숙한 감정을 품었다는 건 나와 황후만 아는 비밀이 되었다.
당사자인 황태녀를 포함하면 셋이기는 하나, 솔직히 황태녀도 자신의 감정은 정확히 모를 테니 둘만 알고 있는 게 맞아.
아무튼 정말 다행이다. 황제가 뒷목을 잡으면서 소환령을 내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최악은 피했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우며 앙증맞은 장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경악스러운 소식. 심지어 그 상대가 대부의 아들이라는 진실. 황제의 눈이 540도 정도 돌아가기에는 충분한 사태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민망하지만, 나나 에리히나 여자관계가 깔끔한 편은 아니었잖아. 부인들의 마음을 상당히 복잡하게 만든 후에야 결혼하게 되었으니, 만약 페디도 우리 형제를 닮았다면 황태녀를 울릴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나조차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황제는 오죽할까. 왜 하필 그 검은 머리 짐승의 아들이냐고, 왜 친구 관계를 넘어서려는 거냐고 통곡을 하겠지.
‘이해한다…’
세상에는 역지사지라는 것이 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였어도 우리 장녀인 마리아가 벌써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들으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자신이 있다. 상대의 부친이 심상치 않은 새끼라면 죽창을 들고 찾아갈 의향도 있어.
덕분에 황제를 향한 공포와 두려움은 사흘 동안─ 아니, 지금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다. 내가 그 새끼를 상대로 이렇게 명분적으로 밀린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내 기억에는 이번이 처음이다.
…
‘영원히 숨길 수는 없을 텐데.’
안도의 한숨은 어느새 탄식 가득한 한숨으로 변하였다.
안심과 신뢰의 황후 덕에 당장은 생을 연명할 수 있었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없다. 이건 감찰부, 감찰성에서 지낸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아무리 나와 황후가 입을 조심해도 언젠가는 정보가 샌다. 황제도 황태자 자리, 황제 자리를 포커로 얻은 건 아니기에 남들보다 눈치와 지능이 뛰어나기도 하고. 자기 딸이 사랑이 빠졌다는 것 정도는 자발적으로 알아챌 확률이 높지.
그저 자발적으로 알아낼 동안, 정보를 접하고 현실을 받아들일 동안 소모되는 시간. 그 시간 동안 내가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황제와 작위를 붙인 채 결투하기 전까지. 반드시.
“칼. 들어갈게요.”
“아, 응.”
그렇게 부끄럽게도 페디와 황태녀의 미래보다는 내 안위를 철저하게 걱정하는 사이. 마르가 슬쩍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윽고 나를 보자마자 작게 웃음을 흘렸다.
“또 그 옷이에요? 다른 옷도 많으면서.”
마르의 은근한 지적에 머쓱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디 나갈 일이 있다면 가장 먼저 입는 옷. 이제는 내 피부의 연장처럼 느껴지는 감찰부장 시절 제복.
사실 감찰성 장관이 된 이후로는 장관 제복까지 받아서 추억 속에 남겨도 충분한 옷이지만, 추억 속에 잠길 즈음이 되면 내가 강제로 꺼내오고 있다. 오히려 업무 때 입는 옷이라는 인식이 사라져서 그런가, 더 거리낌 없이 손이 가고 있어.
“아무래도 이게 편해서 말이야.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내가 화려한 옷을 입는 것보다는 이렇게 입는 게 보기 좋대.”
“누가요?”
“아버지도 그랬고, 재무성 장관도 그랬고, 바란디가 후작도─”
“세 분 다 옷을 잘 입는 분들은 아니네요.”
마르의 덤덤한 팩트 폭력에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그건 그렇지. 아버지는 어머니가 주는 대로 입는 편이고, 재무성 장관도 크게 다를 건 없고, 바란디가 후작은 유목민 복장에서 제국인 복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니까. 셋 다 능력과 별개로 패션에 조언을 줄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아직 출발하려면 멀었으니까, 제가 고르는 걸로 다시 입어요.”
“그냥 이대로 가면 안 될까…?”
“연회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그래도 돼요. 다른 손님들이 칼을 보면 움찔하기는 하겠지만요.”
그 말에 조용히 외투를 벗었다.
망나니가 망나니 칼을 들고 돌아다니면 보는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법. 애석하게도 나에게 있어서는 이 제복이 망나니 칼 같은 존재나 다름없다.
하긴. 생각해 보면 내가 감찰성 장관이 되고 감찰을 진행한 건 사법계 감찰이 유일하잖아. 귀족들을 두들겨 팬 감찰은 전부 이 제복을 입던 시절에 했으니, 귀족들이 내 제복을 보고 PTSD가 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미안하다…’
곱게 차려입은 제복을 도로 옷장에 넣었다.
어지간한 행사라면 남들이 쫄든 말든 그냥 입고 갔겠지만, 이번에 참석할 연회는 상당히 중요한 연회라 어쩔 수 없다. 기껏 연회장에 모인 손님들을 PTSD로 몰아넣을 수는 없어.
‘처가 경사에 분탕질을 치는 건 미친 새끼지.’
올해 초, 장인어른의 완전한 은퇴로 인해 새로운 울켄 공작이 된 형님. 18대 울켄 공작인 철혈공의 뒤를 이어 19대 울켄 공작인 여명공이 탄생한 바렌티 공작가와 제국의 경사.
그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준비 중이던 연회가 드디어 열리게 되었다. 형님을 위해 처가가 수개월이나 준비한 연회인데, 옷 하나 잘못 입고 가서 분위기를 망치는 건 장인어른에게 척추가 접혀도 할 말이 없는 만행이지.
“참, 칼. 연회 중에 율리아는 칼이 안고 있어줄래요? 아무래도 이번 연회 때는 저도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할 것 같아서요.”
“당연히 그래야지. 나한테 맡겨.”
마르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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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성이 크라시우스로 바뀌었다지만 마르가 형님의 동생인 건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마르 또한 손님들의 관심을 받을 테니, 아직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율리아는 아빠인 내가 소중히 돌보고 있어야지.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아기를 울켄까지 데려가는 게 맞나 싶지만, 형님과 처형들이 꼭 율리아를 보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가서 바렌티를 뒤집어버리렴.’
지금쯤 침대에서 곤히 숙면 중일 율리아를 떠올렸다.
머리는 크라시우스의 피를 이어 흑발이지만, 눈은 마르를 닮아 초록색인 우리 율리아. 볼이 빵빵하고 새하얘서 사랑스러운 우리 율리아.
그 사랑스러움으로 바렌티의 일원들을 휘어잡는 거야. 형님과 처형들이 홀린 듯이 용돈을 바칠 정도로.
울켄 공작성에 도착하자 형님이 직접 반겨주었다.
“마르야! 매부! 어서 와라!”
양팔을 벌리며 호쾌하게 웃는 것을 보니, 막 공작위를 물려받았을 때의 착잡함과 부담감은 완전히 털어낸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털어낸 것이 아니라 숨기는 법을 배운 걸 수도 있지만.
“페디도 어서 오렴.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이윽고 내 다리 옆에 착 붙어있던 페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와 마르를 활발하게 반겨준 것과 달리, 페디에게는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마치 손자가 온 것에 기뻐하는 할아버지처럼.
사실 형님과 마르의 나이 차를 생각하면 페디가 손주뻘이기는 해. 딸 같은 늦둥이 여동생의 손주 같은 조카. 얼마나 예쁘고 귀엽게 보일까.
“외삼쵼 보러온거라 안 힘들엇써요!”
“으응?”
아무튼 페디의 기습 공격에 형님은 눈을 깜빡 거리더니,
“매부. 조카를 아주 잘 돌보고 있는 모양이야.”
“과찬이십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장하다, 우리 페디. 이 아빠가 가르쳐 준 대로 훌륭하게 행동했구나. 예상치 못한 아이에게 예상치 못한 말을 들으면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지.
“페디야. 이 외삼촌이 지금은 금화밖에 없어서─”
“애한테 뭘 주는 거예요. 다시 집어넣으세요.”
금화를 한 움큼 집었던 형님은 마르의 제지에 도로 손을 거두었다.
조금 아쉬웠다. 페디에게 ‘공작의 지갑을 턴’이라는 칭호를 붙일 기회였거늘.
“그리고 율리아도 오라버니가 보고 싶다고 데려왔는데, 페디만 보기예요?”
“율리아!”
그래도 율리아라는 말에 형님의 눈빛이 뜨겁게 타오르는 걸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지갑을 털 기회가 생길 것 같다.
“흐으, 머리가 까만 걸 빼면 마르랑 똑 빼닮았어. 역시 바렌티의 핏줄이 진하기는 한 모양이다.”
“우우-?”
“우리 율리아. 외삼촌이애용.”
“빠우!”
무려 공작이라는 작위를 짊어졌음에도 코맹맹이 소리까지 내는 걸 보면 확실하다.
형님. 만약 율리아를 두고 왔으면 진심으로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어…
“그보다 매부. 이 기세면 셋째는 마르처럼 적발에 녹안으로 태어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역시 형님하고는 생각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떤 선물보다도 만족스러운 대답이군.”
마르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율리아를 안고 있는지라 마르의 손바닥이 형님의 등짝을 강타하는 일은 없었다.
율리아가 공작의 행복과 권위를 동시에 지켜줬다.
***
페디와 율리아를 보니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소중하고도 귀여운 존재. 허나 부모는 마땅히 아이를 정성으로 길러야 하기에, 마음 편히 귀여워하기는 어렵다. 행복과 비례하는 의무를 짊어져야 하니까.
반면 조카들은 다르다. 조카는 자식처럼 잔뜩 귀여워할 수 있으나, 내가 기르는 건 아니니 책임도 없다. 책임 없는 쾌락을 무한히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조카들과 만나는 것이다.
‘어찌 이리 귀여울꼬.’
이미 귀여운 맛이 사라진 내 자식들과 다른 조카들에 비해 이 아이들은 어떤가. 참으로 깜찍하고 앙증맞지 않나.
‘마르가 바렌티의 보물이야.’
나도 모르게 마르를 힐끗 바라봤다. 우리 남매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온갖 행복을 주더니, 이제는 예쁜 조카까지 이 오라버니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보물이 아니면 무엇이 보물일까.
비록 마르의 성은 바렌티가 아닌 크라시우스지만, 아무튼 바렌티의 보물이다.
반박하는 놈이 나온다면 공작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