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93)
로판 속 공무원 893화(894/945)
내 행복, 내 보물을 강탈당했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많이 큰 것 같구나. 어디 우리 외손자가 얼마나 자랐는지 안아볼까?”
“네!”
무려 공작의 안내를 받으며 연회장으로 가던 중, 어슬렁어슬렁 다가오신 첫째 장인어른은 페디를 보자마자 가차 없이 낚아채셨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도 형님도 어어 거리며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장인어른이 연세에 맞지 않게 강건하신 건 알았지만, 설마 내 반응 속도마저 초월하실 줄은 몰랐다.
“어이쿠. 확실히 많이 자랐어. 조금만 더 지나면 훌륭한 기사가 될 정도야.”
“기사! 그럼 나도 경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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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페디, 벌써 경이라는 칭호도 아는 것이냐? 기특하기도 하지.”
심지어 장인어른 품에 안긴 페디도 활짝 웃으며 양팔을 파닥였다.
아이들은 보통 높은 곳과 큰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장인어른의 어마어마한 체구는 높고도 크지. 그래서인지 페디는 대부인 재무성 장관은 물론, 첫째 외할아버지인 장인어른도 몹시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 곁을 떠난 페디를 무력하게 바라봐야만 했다. 장인어른의 체구는 나로서 감히 닿지 못할 재능의 영역이니.
’30cm만 더 컸어도…!’
20cm는 조금 부족할 것 같고, 넉넉하게 30cm만 더 컸다면 장인어른을 상대로도 괜찮은 승부를 했을 텐데.
원통하다. 마음 같아서는 에리히 키에서 30cm만 뺏어오고 싶을 정도야.
“음, 율리아도 조금 커졌나?”
‘아.’
페디에 이어 율리아까지 탐내는 장인어른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이미 페디를 안고 계시면서 율리아도 안으려고 하시다니. 전직 공작에 걸맞은 무섭고도 거대한 탐욕이다. 저런 포부를 갖추고 있어야 수십 년 동안 공작으로 군림할 수 있는 건가.
“율리아는 제가 안고 있을게요. 한 번에 둘이나 안았다가 떨어뜨리면 어쩌시려고요.”
허나 장인어른의 마수는 모성애에 가로막혔다.
감동했다. 공작의 탐욕스러운 포부도 어머니의 마음은 뚫을 수 없는 건가.
“이 아비가 그런 실수를 하겠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작년의 아버님이라면 믿었겠지만, 올해 아버님은 은퇴하실 정도로 연로하셨잖아요.”
그 말에 장인어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예전에 비해 정정하지 못하니 은퇴하고 물러난 거 아니냐는 가혹한 지적.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닌지라 장인어른도 입을 열지 못하셨다. 저 말을 부정하려면 ‘아직 팔팔한데 아들에게 짬을 때리고 은퇴한 아버지’가 돼야 하니까.
“…그럼 조금만 만지마.”
“네. 그건 괜찮아요.”
살짝 풀이 죽은 듯한 장인어른은 조심스레 율리아의 볼을 쓰다듬었고,
“아우우-!”
다행히 높고 큰 것을 좋아하는 건 율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우락부락한 덩치의 장인어른이 다가오면 울먹여도 이상하지 않거늘, 페디처럼 활짝 웃으며 장인어른의 손길을 반겼으니까. 아주 천사가 따로 없어.
“눈이 보석처럼 아름답구나. 볼도 빵빵한 것이, 누구를 닮았는지 참 예쁘기도 하지.”
덕분에 미묘하게 침울해졌던 장인어른의 표정이 급속도로 밝아졌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어째 공작으로 지내시던 시절보다 감정 표현이 더 다채로워지신 것 같다. 예전이었다면 풀이 죽은 것도, 밝아진 것도 유심히 봐야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애초에 내가 장인어른 얼굴을 보자마자 즉각 파악할 수 있던 감정은 분노나 민망함, 비웃음 정도였지. 그 외는 조금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했고.
“많이 가벼워지셨지?”
내 의문을 눈치챈 듯, 형님이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셨다.
“이미 반쯤 은퇴하신 상태였지만, 그래도 공작이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계셨지. 그러니 남들에게 다소 위압적이고 딱딱한 모습을 보이실 수밖에 없었어.”
형님의 설명에 바로 납득했다.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고, 감정을 조절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평범한 손주 바보 할아버지만 남았다는 뜻.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나에게 제국백 자리를 물려주신 이후로는 보다 평온해지셨고, 그 기계 같은 상황조차 동네 이장 할아버지처럼 돌변했다. 사람은 짊어진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중─
“매부? 왜 그렇게 보나?”
“크나큰 짐을 짊어지게 된 형님이 존경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순간 ‘당신은 공작이라는 짐을 짊어졌는데 왜 달라진 게 없냐.’ 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난데없이 공작위를 짬 맞은 직후, 형님이 얼마나 당혹스러워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지금 모습은 수개월 동안 감정을 가다듬은 결과니까.
오히려 평소에는 가볍다가 중요할 때 칼을 빼드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 아니겠나. 어떻게 보면 여명이라는 칭호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공작의 위엄을 희미하게 보이고 있지만, 결국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낼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니.
“흐흐, 존경스럽기는. 공작하고 같이 사는 사람이 그러니까 민망할 정도야.”
그 말에 쓴웃음을 지을 뻔했다. 형님은 단순히 트릭시를 생각하고 말한 거겠지만, 그 트릭시가 내년에는 공작위에서 물러날 예정이니 웃으며 들을 수 없었다.
심지어 공석이 된 세르베트 공작위를 내가 메꿀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공작 대리라는 희귀한 형식이니 더더욱.
‘망할.’
내가 형님한테 짐이니 뭐니 할 입장은 아니었구나.
바렌티의 피를 이은 혈족 중에서는 우리 가족이 가장 늦게 도착했다.
형님은 울켄에 24시간 상주하는 주인이고, 처형들은 울켄에 살거나 근처에 거주 중이니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우리가 다른 처형들보다 먼저 왔으면 조금 민망했을 수도 있어.
“어머나. 점점 마르 모습이 보이는데?”
“그러게. 요 똘망똘망한 눈 좀 봐. 어릴 때 마르도 이랬었잖아.”
“그런데 마르보다는 조금 날카로운 것 같지 않아? 막내 제부를 닮아서 그런가?”
넷째 처형의 말에 처형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잠깐이지만 움찔했다. 마르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귀부인들이 동시에 쳐다보니, 뭔가 미래나 평행세계에 떨어진 기분이야.
“막내 제부 핏줄이 강하기는 한가 봐. 우리 바렌티 핏줄도 어디 가서 밀리는 편은 아닌데.”
“어쩔 수 없지. 아버님도 이제 흘러가는 구 시대의 주역이니까. 새로운 시대의 주역은 막내 제부고.”
‘그게 뭔.’
첫째 처형의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장인어른을 퇴물 취급하다니. 어떻게 저런 말을.
“이 녀석이.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비를 퇴물 취급하는 것이냐?”
“작위도 직책도 없는 귀족이 퇴물이라고 하신 건 아버님이잖아요. 우리가 결혼할 때마다 사위들한테 뭐라고 하셨었죠? 장인 뒷배 믿고 은퇴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하셨었나?”
허나 유감스럽게도, 최근 수개월 동안 장인어른의 가문 내 서열은 처절할 정도로 떨어진 모양이다. 첫째 처형의 맹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시니까.
그보다 장인어른. 다른 사위들한테는 그런 말씀을 하셨구나. 나한테는 은퇴의 ‘ㅇ’자도 안 꺼내셨었는데.
‘말 안 해도 은퇴 못 할 놈이다 그건가.’
비참한 진실이라 마음으로 울었다.
‘음?’
그렇게 권위를 상실한 장인어른이 씁쓸히 페디를 품에 안고, 처형들이 마르와 율리아를 쪼물딱거리는 사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장인어른의 미니 버전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형님의 아들이니까 정확히는 형님의 미니 버전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
“그러고 보니 소공작과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일단 눈이 마주쳤기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사실 소공작과는 형님이나 처형들보다도 만날 일이 없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작위와 직책, 항렬 면에서는 차이가 크니까. 게다가 소공작이 공작가의 직계여도 작년까지는 공작의 장손에 불과했다. 현직 제국백 겸 장관인 나하고는 비교하기 애매하지.
허나 올해부터는 공작의 장손이 아닌 명실상부한 소공작이 됐다. 이제는 나도 존중해야 하고, 아내의 조카가 아닌 공작가의 주역으로 대해야 하는 상대다.
“물론입니다. 올해 들어 조금 바쁘게 지내기는 했지만,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수행한 것이기에 힘들다고 할 수도 없었지요.”
그런데 어째서일까. 내가 먼저 정중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소공작은 쭈뼛거리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단순히 어색해서 보이는 모습은 아니다. 나를 꺼려 하거나 거리를 두려는 것도 아니다. 굳이 비슷한 감정을 고르자면─
‘동경.’
내가 아르메인 왕국에서 수없이 받았던 눈빛. 길을 지나갈 때마다 마주했던 감정.
저거 분명 동경이다. 대륙 제일 검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향한 동경이 확실해.
‘소공작도 무인이라고 했던가.’
바렌티 공작가는 그 시조부터가 전공을 세워 공작위를 받았을 만큼 무를 중요시하는 가문이다. 장인어른도 동부 왕국들과의 전쟁에서 맹활약을 하셨으니, 오히려 무인보다는 사교가나 행정가의 면모가 더 강한 형님이 특이한 편이다.
그러나 소공작, 에드워드 바렌티는 바렌티답게 무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상당한 편이다. 아마 소공작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황실 기사단의 일원이었을 정도로.
“하하! 에드워드가 대륙 제일 검을 보니 떨리는 모양이야! 예전에는 아버지를 동경했는데, 동경 대상이 바뀐 건가?”
‘그러지 마.’
형님의 말에 식겁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장녀한테 퇴물 소리를 들어서 씁쓸한 장인어른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야. 철혈공 퇴물설에 쐐기를 박는 망언이잖아.
“아닙니다.”
하지만 나나 장인어른이 반응을 보이기 전, 소공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인으로서 대륙 제일 검을 동경하는 건 맞지만, 동시에 조부님의 뒤를 이어 제국 제일의 무인이 된 분을 향한 동경이기도 합니다. 그런 분의 뒤를 따라야 훗날 조부님 같은 제국 제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
내 얼굴에 금칠을 하면서도 ‘조부님의 뒤를 이은 분이라 동경하는 거임.’ 이라며 장인어른을 향한 경외도 선보였다. 형님이 투하한 폭탄을 재빠르고 완벽하게 수습한 것이다.
“흠.”
장인어른도 장손의 극찬에 만족한 듯. 작게 코웃음을 치며 페디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울켄 공작령에 온 이후, 처음으로 장인어른의 권위가 바로 선 광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