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94)
로판 속 공무원 894화(895/945)
5공작 중 한 명이 교체되는 건 현명공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동시에 현 황제 즉위 이후로도 처음 있는 일이고. 어찌 보면 현 황제의 치세를 기념하기 위해 공작조차 새롭게 등극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형님의 공작 등극 축하 연회는 어마어마한 인파의 방문, 뜨거운 성원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전통적으로 울켄 공작의 휘하나 마찬가지인 동부 귀족들은 물론, 제국 곳곳의 고위직들도 기꺼이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으니까.
사실 이런 연회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 건 사교계에서 고립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어딜 감히 공작의 경사를 패싱해. 황제를 제외하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인데.
“축하하오, 여명공. 이제 새로운 얼굴을 보고 지낼 테니 반갑기 그지없구려.”
“추카해! 쩔혈공이 언재 물러나나궁금햇는대! 올해일쭈른 몰랏써!”
그 증거로 제국의 대표적 히키코모리 둘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황금공과 현명공. 자기 영지에서 지박령처럼 업무를 보느라 바쁜 두 거물. 신년하례식 수준의 대형 이벤트가 아니라면 볼 일이 극히 드문 존재들.
그런 사람들마저 나란히 연회에 참석했다는 건 그만큼 새로운 공작을 진심으로 반기고, 뉴비 공작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의미다. 혹여나 새로운 공작을 우습게 보는 놈이 있다면 같은 공작인 자신들이 조져주겠다는 경고 같은 느낌이지.
“저도 갑자기 공작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깨가 무겁지만, 이겨내야 할 일이지요.”
“우리한테 존대를 할 필요는 없소. 소공작 시절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작이 아니오?”
“마쟈! 공작끼리 말노피고 하대하구 그러는거 아냐! 서로 죤중!”
현명공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트릭시가 떠올랐다.
다른 공작들은 몰라도 현명공은 저 외침을 누구보다 잘 실천하고 있다. 공작들 중 압도적 최선임인 트릭시에게도 말을 편히 하고 있으니까.
…
‘하대는 하지 않나?’
생각해 보니 트릭시는 현명공의 조카며느리라는 죄로 하대를 듣고 있잖아. 트릭시는 공작이 아니라 조카며느리로만 취급하는 건가?
‘그럴듯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감히 상상할 수 없던 일이라 괜히 실소가 나왔다.
요즘 보면 트릭시가 아니라 현명공이 공작 중 최선임 같아.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고려하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연회 동안에는 좀 봐주십시오. 이게 수십 년 동안 입에 익어서, 바로 바꾸려니 좀 힘듭니다.”
“하긴. 그도 그렇겠지. 나도 막 공작이 되었을 때는 이래저래 낯선 것이 많았으니.”
“히히, 사실나두 그랫써.”
아무튼 세 공작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전승공은 연회장 구석에서 첫째 장인어른과 대화 중이었다.
형님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바로 포획당하더라. 대체 전직 공작과 현직 공작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궁금하지만,
‘신경 쓰지 말자.’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본능이 부르짖고 있다. 저런 상황에 끼어드는 건 스스로 귀찮은 일을 만드는 꼴이라는 걸.
내 정신 건강과 평화로운 일상을 위해서라도, 저 둘의 대화는 그저 둘의 대화로만 끝나게 둬야 한다는 걸.
‘같은 무인끼리 덕담이나 나누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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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그렇게 결론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전승공과 장인어른은 다섯 공작 중에서 은근 합이 잘 맞는 관계였다. 둘 다 무인인 데다 전선에서 굴렀다는 동질감까지 있지 않나. 그런 와중에 한 명이 은퇴를 선언하며 백수가 되었으니, 다른 한 명이 덕담과 격려, 위로를 건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작 전승공을 납치한 사람이 장인어른이라는 건 무시했다. 아무리 봐도 용건이 있는 사람이 장인어른이라는 건 머리에서 지웠다.
그게 나한테 이로운 일이니까.
***
가벼운 마음으로 연회에 참석한 것이지만, 상당히 의외의 상황과 마주하고 말았다.
“철혈공. 진심이오?”
새로운 공작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낚아챈 철혈공. 뒤이어 거대한 체구로 은근슬쩍 나를 가리며, 누군가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까지 했다.
심상치 않은 행동이라 결코 가벼운 용건이 아니라는 건 짐작했으나, 설마 이런 내용일 줄은 몰랐다.
“이제는 철혈공이 아니라 올리버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소만.”
“아니, 아무리 공작위에서 물러났다지만 그건.”
“농담이니 당황하지 마시오. 그냥 편한 대로 불러도 상관없으니.”
농담치고는 다소 살벌한 말이었다. 같은 공작이기는 했지만, 나보다 나이도 많은 철혈공을 이름으로 부르는 건 가혹한 일이지.
“아무튼 방금 한 말은 진심이오. 나도 사관학교에 이름을 올려볼까 싶은데, 어찌 생각하시오?”
“흐으음.”
허나 지금 중요한 것은 이름을 부르냐 마느냐가 아니다. 철혈공이 사관학교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내 비록 아들 녀석에게 실권을 넘겨주어서 이름뿐인 공작이었다지만, 그래도 작년까지 공직에 있다가 물러난 몸이오. 일생을 제국을 위해 헌신하다 야인이 되어서 그런가, 가슴에 구멍이 생긴 것 같더구려.”
“이해하오. 철혈공이라는 기둥이 제국을 위하여 얼마나 헌신하였는지는 온 대륙이 기억할 터이니.”
철혈공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혈공은 수십 년 동안 제국의 안정을 위하여 헌신한 충신이다. 상황 폐하께옵서 막 즉위하셨을 무렵, 감히 동부 왕국들이 제국의 영토를 넘보았을 때 단호히 응징한 제국의 방패다.
그렇게 황실과 제국에 충성을 다하고 일생을 바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은퇴는 자유가 아니라 방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더 이상 제국을 위해 할 일이 없다는, 자신의 쓸모가 다 했다는 서글픈 방출.
“그러니 새로운 길을 걸어보고 싶어졌소. 교편에 선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래도 제국군을 이끌어 갈 후학들에게 작은 조언을 줄 수 있겠지.”
“철혈공의 가르침이 작은 조언이라. 허면 큰 조언은 대체 누가 줘야 하는 것이오? 투쟁공께서 살아오셔야 하는 건가?”
제국 역사에서 철혈공보다 확실히 위라고 장담할 수 있는 장수는 초대 하블렘 공작이신 투쟁공 정도밖에 없다. 크펠로펜 왕국군을 이끌며 아펠스를 짓누른 투쟁공 정도는 돼야 철혈공보다 뛰어나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철혈공의 능력은 뛰어났다. 헌데 그런 철혈공의 가르침이 작은 가르침이라면, 다른 교사들은 전부 범부가 되어버리지 않겠나.
“…철혈공이 원한다면 없던 자리도 만들 의향이 있소. 교장 자리든, 그 위의 자리를 새로 창설하든 말이오.”
그렇기에 철혈공에게는 드높은 자리를 보장했다. 능력도 연륜도 신분도 부족함이 없는 입장이니, 평범한 교사 자리를 주는 건 서로에게 곤란한 일.
“헌데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들을 수 있겠소?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은퇴 이후에는 공작성에서 조용히 살아갈 예정이라고 했었지. 물론 몇 년 전의 이야기이나, 내가 아는 철혈공은 몇 년 전의 발언도 지키는 기사 중의 기사. 생각을 바꾸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일 터.”
“으음.”
내 질문에 철혈공은 침음을 흘렸다.
확실히 무언가 있다. 철혈공의 성격상 단순한 변덕 때문에 발을 번복하는 건 아니야.
“이건 전승공만 알고 있으시오.”
“음. 죽을 때까지 품고 갈 테니 염려 마시오.”
즉각적인 장담에 철혈공의 몸이 조금 기울어지더니,
“딸들이 은퇴한 늙은이 취급을 해서 조금 서럽소.”
“뭣.”
예상치 못한 사유를 귓가에 속삭였다.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가차 없을 줄은 몰랐지. 사관학교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이라도 상관없으니,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관료가 되고 싶소.”
참으로 착잡하고 서글픈 이유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철혈공조차 작위를 물려주고 나니, 위대한 명장이 아닌 동네 할아버지 올리버가 되고 말았구나.
‘무조건 교장 자리를 줘야겠어.’
사실 사관학교 교장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많다. 나조차 사관학교 설립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부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사관학교 교장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철혈공이 이토록 가슴 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면 초대 교장은 철혈공이 되는 것이 옳다.
상징적인 면에서도 그게 더 좋을 테니.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관학교 교장은 전쟁성의 부장급 대우를 받을 것이오. 제국 아카데미의 경우를 고려하면 그 정도가 적당하지.”
“딱 적절한 수준이로군.”
철혈공에게 교장의 의전 수준을 설명한다는 건 교장 자리를 주겠다는 약속이나 다름없다. 그래서인지 철혈공의 표정은 아까보다 미묘하게 밝아졌다.
참으로 안쓰러운 광경이다.
***
여명공. 내가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하사한 공작의 이명.
제국 동부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였던 철혈공의 뒤를 이어, 새로운 울켄의 주인이 된 열아홉 번째 울켄 공작.
그리고 부친인 철혈공과 달리 무인보다는 행정가의 성격이 더욱 강한 문인 성향의 귀족.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인재다.’
여명공의 능력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철혈공이 실권을 물려준 이후로 아무런 잡음 없이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역대 울켄 공작들이 관리하던 동부의 귀족들도 소공작 시절의 여명공을 존중하고 철저하게 따랐다.
심지어 나이도 젊은 편이 아니라 완숙한 편이니, 실로 준비된 인재이자 준비된 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철혈공의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에도 큰 혼란 없이 공작위를 물려받은 것이지.
실로 기꺼운 일이다. 이토록 완벽한 인재가 이 시대에 나타났다. 동부 국경이 평화로워진 오늘날, 전란보다는 안정에 가까운 오늘날에 행정가 인재가 공작으로 등극했다.
‘이제 검보다는 펜이 필요한 시기기는 했지.’
어느덧 레온 왕국 남부에 대한 정책도 군사력보다 행정력이 더 절실한 시기가 되었다. 그러니 레온과 접해있는 여명공 덕에 더 수월한 레온 억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된다.
“아빠!”
“황태녀?”
홀로 흐뭇한 미소를 짓던 중, 곱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황태녀가 달려왔다.
“아빠! 나 어때!?”
“음, 아주 아름답구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
진심을 그대로 말하자 황태녀도 활짝 웃었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인 여명공의 등극. 이를 축하하기 위한 기념 연회. 당연히 황제인 나도 자리를 빛내야 마땅하기에, 황태녀도 곱게 차려 입고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뿌듯한 일이다. 이렇게 어여쁜 황태녀를 모든 귀족들 앞에서 자랑─
“히히, 뻬디도 예쁘다고 하겟찌?”
‘음?’
그 말에 살며시 미간이 찌푸려졌다.
뭔가, 뭔가 작은 위화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