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96)
로판 속 공무원 896화(897/945)
좆됐다.
고작 몇 초 동안 고민하여 내린 결론이지만 확실하다. 두뇌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몇 번이나 검토한 내용이기에 장담할 수 있다.
아무래도 이거 제대로 좆된 것 같다.
‘어쩌지 이거.’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뒤늦게 눈치챘지만 손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은화를 들고 황태녀에게 쪼르르 달려간 페디, 그런 페디를 향해 활짝 웃는 황태녀. 일단 겉으로만 보면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광경이다. 둘이 친한 친구이자 남매라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니까. 두 아이가 함께 웃고 떠든 것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있는 일이니까.
그러니 저 광경 자체는 이상한 광경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라면 훈훈하게 바라보거나, 늘 있는 일이라며 덤덤히 넘어갈 광경이야.
‘저 새끼 눈빛 맛이 갔잖아.’
헌데 제3자인 황제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황태녀의 웃음을 보고 헤실거려야 할 놈이 진지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마치 무언가 눈치챈 것처럼. 나와 황후만의 비밀을 알아낸 것처럼.
‘왜 벌써.’
물론 언젠가는 들킬 거라 각오했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 같은 건 없고, 상대가 황제라면 자발적으로 알아낼 것이라 예상했었다. 애초에황제한테는 첩보부라는 눈과 귀가 존재하잖아. 영원히 숨길 거라 기대하는 건 양심 없는 생각이지.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렇게 광속으로 들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눈이 돌아간 황제한테 살아남을 방법 같은 건 찾지 못했다고.
‘아직은 안전 범위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다가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래, 아직은 안전하다. 아니, 많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즉사할 정도의 위험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저놈이 완벽하게 사태를 파악했다면 침묵으로 끝날 리가 없다. 나한테 즉각적인 보복을 날렸거나, 소름 끼치는 표정과 목소리로 노골적인 경고를 날렸을 거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는 황제도 이 상황에 찝찝함을 느낄지언정 확신은 못 한다는 뜻.
‘그럼 됐어.’
황제의 눈치와 지능은 일반인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했다. 저놈은 황태자가 아닌 1황자 시절부터 처절한 생존 경쟁을 하였고, 끝내 2황자를 처단하며 황태자에 책봉되었던 놈이지 않나. 인성과 별개로 능력만 보면 일반인과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다.
그런 놈이니 황태녀의 이변은 빠르게 눈치챌 수 있어도, 확신이 없다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스스로의 경거망동을 경계하는 건 황제의 본능과도 마찬가지인 버릇이니.
그러니 진정하자. 동요해 봤자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아.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고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괜히 날뛰면 오히려 내 목을 내가 조르는 꼴이야.
“황제 폐하 만세!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음?”
말없이 황태녀를 바라보고 있던 황제를 향해 우렁찬 인사를 날렸다.
평소보다 과장된 인사기는 하다. 이 요란한 인사 때문에 황제의 의심이 더 짙어질 수도 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그러나 황제는 이미 의심을 품고 있는 상태다. 저 빌어먹을 새끼는 한번 품은 의심을 순순히 풀 새끼가 아니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태가 호전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요란하게 행동하여 황제의 어그로를 끈다. 내가 평소처럼 황제를 피하거나 건성건성 대하면 황제가 홀로 사색에 빠지는 시간만 길어지니까. 그러면 황제가 확신을 할 가능성이 높아.
‘절대 안 되지.’
저놈이 의심은 하되 확신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황태녀의 이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제국백의 눈물겨운 어그로쇼.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다행히 눈물의 광대짓은 그럭저럭 성과를 보였다.
상념을 끊는 요란한 인사에 황제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으나, 내 신분은 황태녀의 대부이자 황제의 심복. 그런 인물의 인사를 무시하면 쓸데없이 불화설만 나돌 것이다. 황제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지.
덕분에 황태녀에게 집중하던 황제의 이목은 나한테 쏠리게 되었고, 살기 위하여 그런 황제에게 쉬지 않고 말을 걸었다.
“폐하께옵서 자리를 빛내주시니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입니까. 여명공은 제국의 기둥이나, 사적으로는 소신의 가족이기도 합니다. 가족의 경사에 폐하께서 함께해 주셨으니 영광스럽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그러한가.”
“물론이옵니다. 여명공을 위한 자리는 폐하로 인해 실로 빛나는 자리가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은 리브노만의 영광이고 대제의 보우하심이겠지요.”
말이 길어질수록 황제의 눈동자가 조금씩 혼탁해졌다.
이해한다. 말하는 나조차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졸지에 붙잡힌 황제는 얼마나 어지럽겠나.
하지만 황제의 고통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이대로만 가자.’
황제 몰래 힐끗 황태녀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황후가 은근슬쩍 황태녀를 이끌고 거리를 벌리는 게 보였다.
역시 황후다. 말하지 않아도 최선의 행동을 하고 있어. 이렇게 황제의 정신을 흔들고, 시야에서 황태녀를 치워버리면 이번 연회 동안에는 버틸 수 있─
“헌데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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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하명하시옵소서.”
“혹, 바란디가 후작령에서 무슨 특이한 일이라도 있었나?”
순식간에 판을 깨부수는 직설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있었지. 엄청 거대한 사건이 있기는 했지.
“바란, 디가 후작령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그건 어인 일로…”
“바란디가에 다녀온 이후부터 황태녀가 조금 특이한 모습을 보여서 말일세. 아무래도 아비로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어.”
겨우 말라가던 식은땀이 다시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 망할 새끼. 내가 이렇게 재롱을 부려가며 관심을 끌고 있으면 넘어가는 척이라도 해줘야지. 대놓고 묻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이 새끼 진심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황제의 눈빛을 보니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황제도 내 재롱에 넘어가 줬을 거다. 심복이라는 놈이 이렇게 절절한 어그로를 끄니, 신경이 쓰여서 다른 일에는 생각이 닿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황제에게 있어 황태녀는 무엇보다 위에 두어야 할 존재. 심복의 눈물겨운 어그로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내 말을 들어주는 것 같던 모습은 ‘이 새끼 어디까지 지껄이나 보자.’나 마찬가지였어.
“백작.”
이윽고 황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이 말로 할 때 순순히 진실을 토해내라는 것처럼.
“바란디가 후작령에서, 페디가 크란 영애에게 인형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바란디가 후작령에서 있던 일은 아인테르나 바란디가 후작에게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 이것마저 침묵하고 숨기려고 하면 후환이 두렵다.
“인형이라.”
“예. 황태녀 전하께서도 은근히 탐내시던 물건이었지요. 허나 소신의 아들은 전하를 늘 저택에서 뵙는지라, 전하께는 인형이 필요 없을 줄 알았나 봅니다.”
“매번 같은 곳에서 논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어차피 선물로 줘봤자 다시 저택으로 가지고 올 테니까.”
턱을 매만지던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탐내던 물건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면 황태녀의 마음이 상했을 터인데.”
“아, 예. 그래도 페디가 새로운 선물을 전하께 드리니, 다행스럽게도 마음을 푸셨습니다.”
“그런가.”
이번에는 눈을 감았다.
불안하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할 텐데. 원래 가장 무서운 무기는 검집 안에 잠들어 있는 검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 선물은, 꽃이었던 모양이고.”
“…예. 그렇사옵니다.”
물론 내 착각이었다. 전혀 안 편해.
“페디, 에게, 다소 실망했던 황태녀가, 꽃 선물을… 받고, 마음이 풀렸, 다라.”
‘아니 씹.’
내 어깨를 잡고 있는 황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어 능력에도 다소 타격이 왔는지, 상당히 인상적인 말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꽃을 받은 이후로, 페디에게… 더 잘 보이고 싶어, 한다라.”
“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말을 해.
허나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풀렸다. 정확히는 의문 따위를 품을 여유가 없어서 사라졌다는 말이 옳을 거다.
“칼.”
어느새 내 양쪽 어깨를 잡은 황제가 흉흉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걸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장관이나 백작이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자신을 짐이 아닌 나라고 표현하기 시작했으니까.
“아니기를 바라지만, 적지 않은 심증이 내 생각이 옳다고 말하고 있네. 이걸 어찌하면 좋겠는가?”
“소, 소신은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소신이라니. 이러다 내 사돈이 될지도 모르는 분이 어찌 그런 말을 하나.”
와.
이건 좆됐다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것 같은데.
***
가슴은 뜨겁지만 머리는 차갑게 하라는 말이 있다. 웅장한 이상과 열정, 긍지를 가지더라도 머리는 현실을 바라보며 이성적으로 행동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가슴도 머리도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물증은 없으나, 심증이 너무나 가득한 정신 나간 사태 때문에. 미친 듯이 내 머리를 자극하던 위화감이 실체를 드러냈기 때문에.
‘황태녀가 페디에게 마음이 있다.’
순간 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그저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고 피를 토할 것 같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아직 어리고 어린 황태녀가, 이 아빠 품에서 활짝 웃어야 할 황태녀가 벌써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다니.
아니, 아니야.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내가 지레짐작하는 걸 수도 있어.
그런데 정말 지레짐작일까?
그럴 리가. 길버트 이놈아. 너도 이미 알지 않냐. 객관적으로 보면 네 생각이 옳다고, 온 세상이 그리 말하지 않느냐.
‘아직 어린 아이니 가벼운 감정일 수도 있어.’
그렇지만 아무리 가볍더라도 황태녀가 스스로 품은 감정이라는 건 변치 않는다.
가볍게 시작한 것이 무겁게 변할 수도 있고, 아이 때 품은 감정을 죽을 때까지 가져갈 수 있다.
그렇다면 황태녀가 페디의 손을 잡고, 자기는 페디를 좋아한다고, 페디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안 돼.’
용납할 수 없다. 우리 황태녀는 이 아빠랑 평생 같이 살아야 돼.
‘우리 순진한 황태녀를 홀리다니.’
이윽고 분노는 눈앞의 시커먼 놈에게 향했다.
페디? 황태녀보다 어린 그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페디는 죄가 없다. 페디는 그저 우리 황태녀와 사이좋게 놀아주는 좋은 친구이자 동생이야.
하지만 이 까만 놈은 아니다. 한때 본인의 연애사 문제로 제도는 물론 제국까지 술렁이게 만든 놈이다. 천하의 마종공마저 홀린 그 경이롭고 놀라운 매력을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준 이놈의 죄야.
이 망할 놈. 제국을 뒤흔든 건 아비의 대에서 끊어야지 아들한테도 물려주는 거냐. 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야.
“작위 들고 정정당당─”
“우리 조카 최고다!”
그렇기에 내 마음속 마지막 억제기를 내려놓고 흉측한 까만 놈을 털려던 찰나, 여명공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허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율리아가 위태롭게 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페디의 동복동생이자 여명공의 막내 조카인 율리아.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어른 품에 폭 안겨 있던 저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쯧.’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 딸의 경사에 아비를 털 수는 없지.
“백작.”
“예, 폐하.”
“조만간 집무실로 부를 테니 준비하도록.”
내 딸을 건드려서 나를 분노케 만든 주제에, 정작 자기 딸로 목숨을 연명하는구나.
운 좋은 줄 알아라 검은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