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97)
로판 속 공무원 897화(898/945)
여명공 등극 축하 연회는 1주에 걸쳐 진행되었다.
에리의 조모님 90세 생신 기념 연회도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었다. 후작가의 경사도 며칠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공작가의 경사는 오죽하겠나. 그것도 공작가의 일원이 아닌 새로운 가주이자 새로운 공작의 탄생을 기념하는 연회이니 당연한 일이다.
사실 연회 참석자의 면면이 화려하지 않았다면 한 달 내내 진행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도리어 참석자들이 대부분 고위직이라, 오래 자리를 비우면 제국이 마비되는 상황이라 1주로 끝난 것이지.
“새롭게 공작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부디 여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국과 신민들을 따뜻하게 감싸는 빛이 되기를.”
“먼저 공작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선배께서 이리도 훌륭한 덕담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죽는 그 순간까지 그 말씀을 마음에 품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연회 마지막 날에는 다른 부인들과 함께 온 트릭시가 형님에게 조언과 덕담을 건네주었다.
바렌티 가문의 경사니 마르에게 내 파트너 자리를 양보한 부인들. 동시에 트릭시가 연회장을 활보하면 주인공인 형님이 묻힐까 봐 하루가 아닌 6일이나 기다려준 부인들.
실로 아름답고 따뜻한 배려인지라 트릭시가 마지막 날이 되어서 나타났어도 형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자기 동생을 배려하기 위해 늦게 나타난 것인데, 어떤 인성 파탄자가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항의하겠나.
물론 진짜배기 인성 파탄자라도 트릭시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겠지만.
“제 조언은 새로운 공작께서 자신만의 길을 찾기 전까지 임시로 사용할 이정표에 불과합니다. 작은 이정표를 참고하여 주신다면 그보다 감사한 일은 없겠으나, 여명공만의 길을 찾는다면 무시해도 될 것이니 너무 귀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그 또한 마음에 품도록 하겠습니다. 선배의 귀중한 조언은 평생 기억하고 있어야지요.”
웃음을 터뜨리는 형님과 마주 미소를 짓는 트릭시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트릭시는 공작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연공서열 1위. 같은 공작인 형님조차 깍듯하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나, 정작 트릭시는 내년에 공작위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과연 그날이 오면 형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압도적인 선배이자 영원히 공작으로 군림할 것만 같던 사람이 갑자기 물러나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공작 대리가 자신의 막내 매부라면.
‘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건 기묘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올해는 바렌티의 가주가 공작이 되었고, 내년에는 바렌티의 사위가 공작 대리가 된다니. 누가 보면 바렌티 가문이 공작위를 두 개나 장악한 어마어마한 권력가인 줄 알겠어.
‘아.’
트릭시의 은퇴가 공식적으로 알려지면 대륙이 얼마나 들썩일까 상상하던 중, 연회장 구석에서 샴페인을 마시던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직도 흉흉하네.’
황제의 눈빛은 1주라는 시간 동안 잠잠해지기는커녕 더욱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이 연회가 끝나면 바로 나를 잡아서 족친다는 각오를 담아서, 아주 맹렬하게.
덕분에 빠르게 이성이 돌아왔다. 이 멍청한 놈아, 벌써부터 내년에 있을 문제를 상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 당장 내일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
두렵다. 과연 연회가 끝난 후의 나는, 내일의 나는 멀쩡히 살아있을까? 내일이 찾아오면 신혼 휴가 겸 육아 휴가를 즐기는 타일글레헨 백작으로서 살아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평소에도 나한테 온갖 일감을 떠넘기지 못해 안달인 놈이다. 그런 놈이 눈까지 뒤집혔다면 어떤 기상천외한 일거리를 가져올지 신조차 알 수 없다. 어쩌면 황제가 블러핑으로 사용했던 국무총괄장관이 현실화될 수도 있어.
‘망명… 해야 하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황제가 진정할 때까지 잠깐 타국으로 망명 갈까? 한 1, 2년 정도 잠적하면 황제도 진정할 것 같은데.
“칼.”
“어,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황제의 뜨거운 시선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슬며시 고개를 돌리자, 마침 내 곁으로 다가온 마르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엄마 다리에 착 달라붙어있는 페디. 기어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연회장 바닥을 전부 닦아낼 듯이 돌아다니는 율리아가 보였다.
덕분에 공포와 착잡함 대신 흐뭇함이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다.
“우리 율리아가 형님한테 큰 선물을 줬잖아. 그래서 기특한 조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누빈다는 게 신기한지,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이던 율리아를 안아들었다.
우리 기특한 율리아. 안 그래도 조만간 기어다니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형님을 위한 연회에서 냅다 기어다닐 줄은 몰랐다. 오죽하면 형님이 체면도 잃고 함성과 박수를 내질렀겠어.
물론 다른 처형들, 심지어 장인어른도 율리아의 기습적인 퍼포먼스에 기뻐하기 바빴다. 마르가 은화랑 교환했던 금화들을 다시 꺼낼 정도로.
“후후, 그때는 저도 놀랐어요. 사실 페디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제 품에 안겨 있었겠죠.”
“하긴. 그건 그렇네.”
마르의 말에 픽 웃음이 나왔다.
마르가 형님과 함께 귀족들을 상대할 때는 내 품, 마르한테 여유가 생긴 이후로는 마르 품에 있던 율리아다. 부모 품에 폭 안겨있던 상황이니 적어도 연회 기간 동안에는 기어다니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나,
“엄마. 율리아 이상해. 답답한가바.”
율리아를 빤히 바라보던 페디의 말이 모든 걸 바꿨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혹시나 싶었던 마르는 율리아를 바닥에 두었고, 바닥에 착지한 율리아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뽈뽈뽈 기어다니기 시작했다더라. 당시 나는 황제 앞에서 혼신의 재롱을 부리던 중이라 직관하지 못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지.
‘기특해.’
그러나 안타까운 것과 별개로 율리아가 장하고도 기특했다.
이제 율리아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누빌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우리 딸 덕에 아빠가 살았어.’
황제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기기 직전, 율리아가 연회장의 어그로를 끈 덕분에 내 삶이 연장되었으니까.
비록 내일이면 막을 내릴 삶이지만, 이 아빠는 우리 율리아 덕에 1주 동안 행복했다.
“우우?”
“우리 율리아. 집에 가면 티티랑 같이 놀까?”
“우아!”
빵끗 웃는 율리아를 보니 마음이 더욱 평온해졌다.
자기 오빠, 언니들이 티티나 성수들과 노는 걸 멀뚱히 바라봐야 했던 율리아다. 이제 자신도 멋지고 귀여운 동물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쁠까.
우리 율리아. 부디 아빠 몫까지 즐겁게 살아가렴.
인내심 없는 누렁이는 연회가 끝난 다음날, 바로 소환령을 내렸다.
아니지. 오히려 인내심이 좋다고 봐야 하나? 연회 기간 동안 나를 건드리지 않고 봐줬잖아. 이건 하루 만에 소환한 것이 아니라 1주 동안 살려줬다는 표현이 옳다.
허나 이왕 발휘한 인내심이라면 조금만 더 발휘하는 게 어땠을까 싶기는 해. 1주나 1개월이나 거기서 거기일 텐데, 내가 망명을 준비할 시간 정도는 주지 그랬어.
“황제 폐하 만세!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이자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짐승의 심정으로 집무실에 발을 들이니, 몸을 돌린 채 창문을 바라보는 황제가 반겨주었다.
더욱 두렵다. 표정이라도 보이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지,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 건 대체.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이라.”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등만 보여주고 있던 황제가 몸을 돌렸다.
“그랬지. 백작은 영광스러운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이었지. 황제인 짐이어도 존중해야 할 이름을 받은 충신 중의 충신이야.”
“화, 황송한 말씀이옵니다.”
칼이 아닌 백작. 내가 아닌 짐. 그나마 연회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진정된 듯한 모습이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헌데 기사단원임을 과시하고 싶다면 종자들도 데려오지 그랬나. 아주 볼만했을 텐데.”
어디까지나 연회 때와 비교한다면, 이지만.
“일단 앉게. 서서 얘기할 주제는 아니니.”
“폐하의 자비와 배려에 감─”
“말 길게 하지 말고 앉게.”
“알겠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사소하고도 지속적인 충심 어필로 분노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어필조차 거부하고 있다면 답이 없다. 그저 다가올 재앙에 순응하는 수밖에.
“백작.”
“예, 폐하.”
“연회가 끝나고 하루 동안 많은 생각을 해봤네. 과연 짐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백작을 어찌 대해야 하는지 말이야.”
그 말에 저절로 자세가 경건해졌다.
죽은 후 염라대왕이나 아누비스 앞에 서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느끼고 싶은 기분은 절대 아니다.
“아이의 감정은 어른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지. 백작이 황태녀의 마음을 조종한 것도 아닐 터인데, 어찌 그것을 탓하겠나.”
하지만 예상외의 발언에 무심코 침을 삼켰다.
장갑을 집어던져 결투를 신청하는 것도, 서류 더미를 가져와 합법적인 고문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번 사태를 ‘아이들의 감정’이라는 불가피한 일로 취급했다.
‘성군…!’
너무나 현명하고도 이치에 맞는 말이다. 내가 페디와 황태녀를 억지로 중매한 것도 아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믿지 못할 일이 터진 것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죄목은 괘씸죄밖에 없다.
그 괘씸이 너무 커서 문제지만 아무튼 그렇다. 나는 무고해.
“황제인 에이만카 17세로서 생각하면 딱히 문제 될 일도 아닐세. 아직 어린 황태녀가 품기에는 과하게 이른 감정이지만, 백작과 페디라면 짐도 믿을 수 있지, 아무렴.”
“실로 황송하신 말씀입니다.”
어느새 미소까지 지은 황제의 모습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자비로운 발언이다. 사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공적인 이성을 더 중시하,
“그런데 칼. 인간 길버트로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더군.”
는…
“내가 자네를 용서해야 할 이유를 자네 입으로 말해보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아이의 감정은 어른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칼, 네가 황태녀를 꼬드긴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점점 과격해지는 황제의 언행에 식은땀만 흘렀다.
잠시나마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지. 원래 좋은 말로 시작했다가 나락으로 처박는 게 정치 언어의 기본인데.
‘공적인 이성은 개뿔.’
애초에 이 세상 어느 아비가 꼬꼬마 딸의 첫사랑에 평정심을 유지할까.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한 달은 추궁하고 싶지만.”
황제의 말에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놈이라면 진짜 하고도 남는다. 조건만 맞으면 한 달이 아니라 반 년, 1년도 할 놈이야.
“애석하게도 신은 네 편인 것 같아.”
“예?”
“어제 신성교국에서 연락이 왔다. 생전 시성에 관해 긴히 논할 것이 있으니, 부디 와 달라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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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에넨의 복자 아니랄까 봐, 에넨께서 보우하시는 모양이야.”
살아나갈 길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