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98)
로판 속 공무원 898화(899/945)
생전 시성. 말 그대로 특정 인물이 살아있는 동안 시성을 진행해, 그 인물을 성인으로 지정하는 경이로운 의식.
여명 교단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제들조차 성인의 칭호는 죽어서 받았으니, 이 생전 시성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애초에 생전 시복 자체도 대륙을 술렁이게 만들었잖아. 살아있는 생전 시성, 시복이 이루어진 건 여명 교단의 체제가 다소 주먹구구식이던 과거에나 볼 수 있는 사례일 거다. 아니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경이로운 업적을 세웠거나.
그렇기에 교황의 입에서 내 생전 시성 얘기가 나올 때만 해도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사후 시성 확정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살아있는 복자라는 것만으로도 헛웃음이 나오는데 살아있는 성인? 과장 좀 보태면 교황과 성자 바로 다음가는 권위다.
아니, 어쩌면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생전 시성이라는 이름은 너무도 무겁고 두려웠다.
‘이젠 아니야.’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 우둔하고 눈먼 어린 양이 마침내 따사로운 태양 앞에 눈을 떴다. 위대한 태양의 자비로 인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았다.
에넨. 나의 삶, 나의 빛, 나의 희망, 나의 심장,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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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유일하고도 적법한 태양신.
하늘과 초목이라는 이신조차 자비롭게 인정한 진정한 신.
‘앞으로 영원히 받들겠습니다.’
속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에넨께서는 실로 위대한 신이다. 나와 마르의 결혼식 때 존재감을 드러내며 축복을 내렸고, 그 축복을 기점으로 스노우볼이 구르고 굴러 생전 시성까지 이어진 것 아니던가. 천상의 주께서는 그때부터 안배하신 거다. 이 미천한 종의 위기를 아시고, 위기를 피할 방법을 마련하신 거다.
참으로 자비롭고도 황송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우둔하고도 눈이 먼 놈은 주의 은혜도 모르고 그동안 불평만 일삼았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이야.
“그렇게 좋나?”
“아닙니다.”
연신 에넨을 향한 감사 기도를 올리던 중, 황제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정말로 자비롭고 위대한 신이라면 이런 위기 자체를 주지 않았을 거다. 하다못해 내 꿈에 나타나 언질을 주거나, 그도 아니라면 결혼식 때처럼 강림했겠지.
그래도 황제한테 목덜미를 물어뜯기기 직전, 기적적으로 도망칠 명분이 생겼으니 그것만 해도 어디냐.
…
‘그럼 교황 덕분 아닌가?’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내 생전 시성을 결정한 것도 교황, 논의할 게 있으니 와달라고 한 것도 교황이다. 가만히 있던 에넨보다는 차라리 교황을 받드는 게 이치에 맞는 거 아닐까?
하마터면 그릇된 우상을 섬길 뻔했다. 위대하고 자비로운 교황을 위해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해야겠어.
“아무튼 잘 다녀오게. 제국에서 성인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일진대, 그 성인이 살아있는 귀족이라면 더더욱 영광인 일. 앞으로는 짐도 꼬박꼬박 성 칼이라고 불러야겠어.”
“소신은 교단의 성인이기 이전에 제국의 신하입니다. 그저 백작이라고만 불러주신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사옵나이다.”
“교단이 들으면 서운해하겠군. 기껏 생전 시성이 됐다면 마음껏 과시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한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어깨를 다소 강하게 토닥였다.
“에넨에게 바치는 교회를 지을 때, 보통 성인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편이지.”
“…예, 그렇사옵니다.”
“짐 생전에는 반드시 성 칼 대성당을 짓도록 하겠네. 물론, 황실의 재산으로 지을 것이니 백작은 염려 말고.”
누가 들어도 염려스러운 말이었지만 감히 반박할 상황이 아니라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사악한 놈. 그 와중에 황실 재산으로 짓는다고 선까지 긋다니. 오직 황실의 힘만으로 짓는 건물이라면 내가 끼어들 명분이 없잖아. 자기가 대성당을 어떻게 짓든 입 다물고 구경만 하라는 거야.
‘내 이름 붙는 건물인데.’
내 이름이 붙은 건물이 어떤 꼬라지가 돼도 항의할 수 없는 절망감. 덕분에 마음으로 울었다.
이 흉악하고도 잔인한 놈 때문에 마음이 마를 날이 없다.
서쪽의 황제는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동쪽의 교황은 내 명을 연장해 주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도리상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
‘애한테 줄 선물도 준비해야지.’
게다가 지금쯤이면 타니안의 아이도 열심히 꼬물거릴 시기다.
차기 성자와 현직 추기경인 주제에 화려한 신호 위반을 해버린 부부. 덕분에 신랑과 신부 둘 다 교단의 중핵이면서 다소 급하게 결혼해야 했지. 배가 눈에 띄게 부른 상태에서 결혼식을 진행하면 좀 서로 어색하잖아.
다만 신호 위반을 한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정식으로 부부가 된 것이 얼마 전의 일임에도 타니안과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은 벌써 아빠, 엄마가 됐다. 기분이 오묘한 것과 별개로 축하해 주는 것이 맞다.
‘인형이 무난하겠지?’
그리고 나는 아홉이나 되는 아이들의 아빠. 아이들에게 적합한 선물을 고르는 건 간단한 일이다.
아직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아이라면 인형이 가장 적절하고 무난하다. 그것도 아주 푹신푹신하고 털이 적은 인형으로.조금이라도 딱딱하거나 각진 면모가 있다면 아이가 다칠 수도 있고, 털이 많으면 아이가 먹거나 호흡기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십자가 인형 같은 것도 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빠르게 털어냈다.
이미 차기 성자인 아빠, 추기경인 엄마를 둔 아이다. 심지어 여명 교단의 중심지인 신성교국에서 태어났고, 앞으로도 교국에서 자랄 아이다. 근처의 어른이나 또래들도 신앙심 깊은 사람들일 터.
그런 아이에게 선물도 종교적 선물을 준다? 과도한 조기 교육과 신앙 주입은 오히려 비뚤어질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나만큼은 평범한 선물을 줘야지.
‘평범한 선물이라.’
그렇게 아이에게 줄 선물은 무난한 인형으로 확정 지으려던 찰나. 마침 내 근처에서 낮잠 중이던 티티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작은 인절미들도 여기저기 돌아다닐 정도로 자라서 그런가, 티티가 아침 일찍부터 출근하는 일은 없어졌다. 이제는 새끼들을 철통처럼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그래, 부모 품에 착 달라붙어 있을 시기는 지났다. 여전히 작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슬슬 분양을 보내도─
– 끼이잉?
‘아.’
낮잠을 자던 티티가 스르륵 눈을 떴다.
경이롭다.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자다가도 반응하다니. 짐승의 본능과 아비의 마음이 결합되면 저런 결과가 나오는구나.
‘꼼짝없이 전부 길러야 할 팔자인가.’
이러다 제니가 낳은 14마리를 전부 길러야 할 것 같다.
싫은 건 아닌데, 아쉬워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 조금 미묘한 기분이다.
…아.
“티티야, 잠깐 와볼래?”
– 멍?
내 부름에 막 눈을 뜬 티티가 총총 걸어왔다.
“예전에 봤던 하얀 머리, 혹시 기억나?”
그리고 티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쩍 물었다.
타니안이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제국에 방문했을 때, 우리 아이들과 더불어 티티에게도 축복을 줬었다. 안 그래도 활발하고 똘똘했던 티티가 그날 이후로 한 단계 진화한 것 같기도 해.
아무튼 타니안과 티티에게는 미약하게나마 연이 있다. 티티의 존재는 아이들에게 있어 슈퍼스타나 마찬가지다.
‘그럼 티티랑 같이 가는 것도 좋겠지.’
당연히 티티를 선물로 주려는 건 아니다. 우리 소중한 티티를 남에게 넘길 생각은 절대 없으며, 그런 짓을 했다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영원히 미움을 받을 테니.
그저 타니안의 축복을 받은 개와 함께 타니안의 아이를 보러 가는 것. 나름 의미 있는 행동이지 않을까 싶다. 선물만 덜렁 주는 것보다는 더 인상적이겠지.
– 멍!
“나는구나.”
다행히 티티도 타니안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역시 우리 티티.’
몇 년 전에 본 사람이라도 절대 잊지 않다니. 이 얼마나 장한 아이인가.
사실 타니안의 외모나 분위기는 한 번만 봐도 잊지 못할 수준이기는 하지만.
신성교국에는 나랑 티티만 방문하기로 했다. 가족들과 동행하기에는 나름 공적인 이유로 방문하는 것인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는 나 혼자 움직이는 게 맞아.
물론 티티는 차기 성자의 축복을 받은 성수 비슷한 거니까 예외다. 오히려 티티의 정체를 알면 신성교국의 사제들도 개껌을 흔들며 반기지 않겠나. 분명 그럴 거다.
“아빠. 나도 가면 안대?”
“페디는 동생들이랑 놀고 있어.”
다만 출국하기 직전, 페디가 악의 없는 암살을 시도하는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다.
황태녀가 페디에게 마음이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페디가 국외로 나간다? 황태녀가 페디는 어디 있냐고, 자기도 가고 싶다고 떼를 쓸 가능성이 너무 높다.
일이 그렇게 흘러가면 교황이 내려준 성스러운 방어막조차 위태롭다. 눈이 제대로 뒤집힌 황제가 어떤 수단을 택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하기도 싫다.
“대신 아빠가 우리 페디랑 동생들 줄 선물 사 올게. 얌전히 기다릴 수 있지?”
“누나들꺼도!”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누나’들’이라면 황태녀만 말하는 게 아니라 앙리에타랑 헬렌도 말하는 것─
‘웃을 일이 아닌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만약, 만약에 황태녀가 친구로 여기고 있던 앙리에타와 헬렌에게 질투심을 품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페디는 평소처럼 누나들을 따르고 챙기는 건데, 그 행동에 불만을 가지면?
그나마 앙리에타는 괜찮다. 앙리에타는 후작가니까 어린 시절의 트러블이 심각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거다.
허나 헬렌은 오등작에도 속하지 못한 기사 가문의 영애. 황태녀와 헬렌의 충돌은 루치아노가 개복치처럼 변하는 미래밖에 없다.
“…페디야.”
“웅?”
“누나들하고, 꼭,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
“나 누나들 조아! 잘 지내!”
“하지만 그중에서 황태녀 누나가 첫 번째 누나인 거 알지? 페디랑 가장 오래 놀아준 친구고.”
“알아!”
“그럼 우리 페디. 다른 누나들한테도 잘 해줘야 하지만, 황태녀 누나한테는 더 잘해줘야 한다?”
“우웅…”
그 말에 페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누나들인데 왜 차등을 줘야 하냐는 듯이.
그래, 우리 페디 생각이 맞아. 누나들 사이에 차등을 두는 건 나쁜 짓이야.
“티티도 동물 친구들 중에서 첫 번째니까 더 귀엽잖아. 그런 거야.”
“아랏써!”
그렇지만 어느 노랑머리 때문에 차등을 둬야 할 것 같아. 주지 않으면 여러 의미로 피곤해지니까.
그러니 부디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