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0)
언제나 그런 것처럼 부원들과 관련된 일이면 마지막에는 빌라르를 만나게 된다. 이제는 슬슬 빌라르도 같은 부서 공무원 같아. 왜 이렇게 익숙하고 편안한지.
이렇게 3년을 같이 지내면 온갖 정이 생길 것 같은데, 슬쩍 망명 권유라도 할까 싶은 생각이 치솟는다. 하지만 강직한 기사에게 그런 권유는 실례 중의 실례니 생각으로만 끝내야 한다.
강직한 기사. 그래, 강직한 기사인데.
“잠은 제때 주무십니까?”
“사흘 정도 안 자도 괜찮습니다.”
강직함과 정신적 피로는 별개라는 것이 문제다. 빌라르는 그 잠깐 사이에 급속도로 피로에 찌든 모습을 보였다. 물론 왕실 기사단 소속 기사면 사흘 정도 안 자도 죽지는 않겠지. 딱 죽지만 않고 속은 난장판이 되겠지만.
황태자에게 내 집의 자유를 금화 열 닢에 팔았던 그 날. 마르게타를 저택에 초대하고 바로 빌라르에게 연락을 걸었었다. 당시 대화는 딱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짧았다.
“우리 동네 개새끼가 내 집에 너네 개새끼들 처박자고 하던데?”
– 이런 시발.
당연히 진짜 저렇게 대화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속내는 저것과 다름이 없다는 건 나도 알고 빌라르도 알고 통신구를 만든 마종공도 알 것이다. 아무튼 아카데미가 아닌 제도에서 방학을 보내야 하는 빌라르는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됐다.
협의 내용을 따르면 삼국 호위 전력은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주둔만 가능하다. 사태가 개같이 꼬이면 호위 대상은 제도에 들어가지만 정작 호위 전력이 제도 밖에서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상황이 터진다.
다행스럽게도 이미 황금공의 허락으로 삼국 전력이 보야르에 머문 전례가 있었고, 황태자도 사태의 특이성을 고려하여 삼국 전력의 제도 입성을 허락했다. 대신 황금공과 달리 숫자에 제한을 뒀다는 것이 문제. 제도에 타국 전력이 얼쩡거리면 거슬리긴 하지.
“선별할 인원이 한 둘이 아니다 보니 잘 시간이 없더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제도에 입성할 인원, 귀국하여 새로운 호위 전력에게 인수인계할 인원을 선별하느라 빌라르의 수면 시간은 화려한 빛을 내며 폭발하고 말았다.
먼저 전력의 절반을 본국으로 보내 새로 구성한 호위 전력과 교대하고, 나머지 절반은 새 호위 전력이 제도로 오면 귀국시킨다고 했나? 그렇다 보니 당연히 서로 먼저 가고 싶어해서 인원 선별에 난항이 있었다고 한다.
“별 말씀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가볍게 웃는 빌라르의 표정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 인원 선별을 먼저도 못 가고 나중에도 못 가는 지박령 빌라르가 맡은 건 꽤 잔인한 일이었다.
“제도의 번영은 대륙 제일을 자부합니다. 이 기회에 빌라르 경도 마음 편히 즐기셨으면 좋겠군요.”
“저도 기대됩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제도를 구경하겠습니까.”
어째 속내는 ‘평생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 로 들리는데.
“제 저택에 머무는 손님이시기도 하니 각별히 모시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슬픔이 섞인 희미한 미소를 지은 빌라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졸업 전까지 빌라르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빌라르한테는 최대한 좋은 방으로 줘야지.
마르게타의 학생회 업무 마무리, 부원들의 짐 정리, 수십의 인원과 그에 비례하는 짐을 실을 마차 수배 등으로 이틀 정도가 추가로 더 흘렀다.
사실 텔레포트로 가면 편한데 제도로 가는 길 자체도 여행의 일부라나. 순간 아카데미로 오면서 겪은 고난이 떠올랐지만, 다행히 새롭게 부임한 지방관이 제대로 도로를 관리해서 이전 같은 일은 없을 거다.
– 지난번에 했던 말은 잊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
“예, 물론입니다.”
– 뭐라고 했었지?
“마르와의 혼담을 원하면 제가 직접 각하께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라고…”
– 제대로 기억하는군.
그리고 이틀 사이에 사랑하는 늦둥이 딸이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심기가 뒤틀린 어느 아버지의 연락이 날아오기도 했다. 눈빛에도 물리력이 있으면 내 몸은 이미 수십 조각으로 찢겼을 정도로 흉흉한 눈빛이었다.
그나마 루이제와 이리나 같은 다른 귀족 영애도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마르게타만 초대했다면 당장 기사단을 이끌고 내 저택을 포위하려고 했을 거다. 황태자도 박수 치면서 제도 입성을 허락해주겠지.
‘개새끼.’
아직 욕먹을 짓은 하지 않았지만 황태자는 생각날 때마다 수시로 욕을 해도 무방하다. 욕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니 난 미래의 황제를 위한 충신이 아닐까? 유병장수해라 우리 개새끼.
“다 끝났습니다. 감찰관님은 선두에 있는 마차에 타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황태자의 십일장생 편입을 기원하는 사이 빌라르가 다가왔다. 인원이나 짐은 삼국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자신이 처리하겠다며 알아서 짬을 가져가더라. 나야 아무것도 안 하고 편하니 좋았다.
“슬슬 출발하죠. 빨리 도착해서 쉽시다.”
“가는 길이 무탈했으면 좋겠습니다.”
빌라르의 발언이 묘하게 복선 같았지만 정말 무탈할 거다. 제국의 영토가 넓은 만큼 미처 토벌하지 못한 산적이나 몬스터가 출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제도와 아카데미를 오고 가는 길이다. 무슨 일이 터지면 지방관 목도 같이 터지지.
정작 치안에만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도로 상태가 개판인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만. 아직도 의문이네, 대체 무슨 용기로 그딴 짓을 한 거지. 이승에 미련이 없었나.
“칼 영식, 왔나요?”
“마르?”
아무튼 가벼운 마음으로 빌라르가 알려준 마차에 타자 빙긋 웃고 있는 마르게타가 반겨줬다. 이미 탑승하고 있는 인원은 루이제, 에리히, 마르게타라는 특이한 조합.
‘괜찮네.’
한 사람만 빼면 묘하게 익숙한 조합이다. 다른 곳에 있으면 불안한 루이제도 있고 내가 초대한 입장인 마르게타도 있다. 썩 나쁘지 않다. 에리히까지 있는 건 조금 의외기는 하지만, 대충 짐작은 간다.
‘누가 봐도 최약체구나.’
빌라르도 한 학기 동안 아카데미에서 지내다 보니 제과 동아리의 실체를 알아버렸다. 루이제에게 홀린 다섯 남자의 집합체라는 실체를. 처음 그걸 알고 실성한 듯 웃음을 흘리는 빌라르의 모습은 보기 딱했지. 그나마 삼국 중 빌라르만 진실에 도달한 게 다행이다.
그리고 진실을 알아버린 빌라르 입장에서 류티스를 루이제와 붙이면 편애로 보이고, 그렇다고 다른 삼국 놈을 붙이기에는 류티스의 눈치가 보였을 거다. 심지어 아인테르도 황족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경쟁자니.
그래서 에리히다. 빌라르도 공인한 다섯 중 최약체 에리히라니, 마음이 조금 아프다.
“어서 앉아요. 곧 출발할 거예요.”
“아, 예.”
잠시 딱한 눈으로 에리히를 바라보자 마르게타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서있다가 갑자기 출발하면 밖으로 튕기겠지. 그런 꼴은 사양이다.
“제도는 오랜만이네요.”
자리에 앉자마자 마르게타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네. 작년 신년하례식 이후로는 간 적이 없거든요.”
눈웃음을 지으며 은근히 말하는 마르게타의 모습에 슬쩍 시선을 돌렸다. 작년 신년하례식이 마지막이면 내가 마르게타와의 혼담을 거절한 그 사건 이후로는 제도에 간 적이 없다는 말. 갑자기 그런 주제를 꺼내면 민망한데.
“작년에 슬픈 일을 겪어서 제도에 가기 꺼려졌었는데.”
“…….”
“칼 영식과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가게 되니 정말 좋네요.”
“그거 다행이군요.”
마음이 많이 아프다.
“좋은 일로 덮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후후, 그렇죠?”
사정을 모르는 루이제의 말에 마르게타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고맙다, 루이제…
제도로 가는 길은 짐작대로 무탈했다. 적당히 창 밖 경치 구경하고, 눈 좀 붙이고, 서로 대화 좀 하고, 제도에 뭐가 유명하다더라 같은 얘기나 좀 하고.
“저 뒤까지 내 일행이니 통과시켜.”
“알겠습니다.”
제도 진입 신고까지 마치며 아무 일 없이 제도의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마차도 제도 중심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느려지는 것이 다 도착했나 보네.
“저기가 형 저택이야?”
“어. 여기.”
마차는 느려지기만 할 뿐,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형?”
“나도 저택 안 간 지 오래 돼서 헷갈렸어.”
“도대체 제도에서 뭐하고 지낸 거야.”
에리히에게 본의 아닌 블랙 공무원 생활 과시를 하며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주소는 제대로 기억했다. 주소도 헷갈렸으면 이상한 곳에 떨어질 뻔했잖아.
그렇게 ‘본인 집도 기억 못하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채로 먼저 마차에서 내리자 집사가 사용인들과 함께 반겨주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래,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네.”
“저 역시 주인님을 뵈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민망하게 별 말을.”
집사도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 적당히 농담으로 한 말 같다. 그냥 돈 주고 돈 받는 사이에 벅차오를 일이 있나.
“혹시 뒤에 계신 분이 에리히님입니까?”
집사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에리히가 먼저 내리고 있었다. 머리색도 같고 얼굴도 닮다 보니 바로 눈치 챘네.
“그래.”
“주인님의 동생이면 누구보다 귀한 손님이군요.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진짜 귀한 손님이 있으니 너무 힘 빼지는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집사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 본채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를 접대하는 건 내가 아니라 집사의 전문 분야니 간섭해봤자 손발만 꼬이겠지. 사실 간섭하고 싶지도 않고.
문득 좌우로 갈라져 허리를 숙이고 있는 사용인들에게 시선이 갔다. 딱 잠만 자는 곳이라 적당히 고용한 사람들이다. 덕분에 귀족 출신인 시종이나 시녀는 없고 전부 평민 출신인 하인, 하녀. 귀족도 어려워 할 사람들한테 황족, 왕족은 너무 큰 부담 같은데.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외국 삼인방은 개노답 삼총사가 맞다. 평범하게 지내는 월급쟁이들의 재앙 같으니라고.
“수고가 많군.”
“영광입니다!”
봐라. 지금도 말 한마디 했다고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잖아. 나처럼 자유롭고 볼 일 없는 주인한테도 겁 먹는 사람들인데.
부디 방학 동안 퇴사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