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00)
로판 속 공무원 900화(901/945)
하얀 옷이 좋은가, 붉은 옷이 좋은가.
상당히 하찮고 의미 없는 질문으로 보이지만, 예를 갖추어야 할 자리에서 어떤 의복을 입느냐는 특정 집단의 정체성이나 국가의 집권 명분에 영향을 주는 요소다.
애초에 특정한 옷을 골라야 한다는 것 자체가 철저한 규칙, 의례, 관습 등이 존재한다는 뜻이잖아. 본래 명분이라는 것은 그러한 요소들이 얽히고설켜서 완성되는 법이다.
‘둘 다 상징적 의미가 강한 색이다.’
아무튼 교황이 선택지로 내세운 백색 의복과 적색 의복. 생전 시성을 당할 성인(진)이 입을 예정인 옷인 만큼 두 의복에는 나름의 의미와 권위가 깃들어있다.
우선 흰색 의복은 교황과 성자의 상징이다. 에넨의 뜻을 사심 없이 받들고 신도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미이며, 순백의 의복이 추악하게 더럽혀진다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다짐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여명 교단의 초대 교황 때부터 이어진 전통인지라 백색 의복의 권위는 막강하다.
반면 적색 의복은 추기경의 상징이며, 동시에 교단을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나간 순교자들의 상징이다.그리고 교단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은 순교 외에도 여러 활약을 한 경우가 잦지. 덕분에 순교자 중에는 성인으로 시성 된 사람도 많고.
‘그래서 성인의 상징도 붉은색 옷이었는데.’
문제는 내가 사후 시성이 아니라 생전 시성을 받으면서 터진 듯하다.
공식적으로 ‘성인의 상징은 붉은 의복이다!’라고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저 시성 된 사람 중에 순교자가 많았고, 성인을 기리는 것이 순교자를 기리는 것과 이어졌기에 붉은색 의복이 애용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순교자가 아니라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시성 된다? 살아있는 성인에게 붉은색 의복을 입혀? 마치 결혼식 새신랑이 수의를 입고 등장하는 수준의 참사다.
그렇다고 흰색 의복을 입히는 것도 곤란하다. 교황과 성자의 상징을 다른 사람에게도 입히는 건 좀.
‘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다. 예송논쟁과 마주한 유자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어느 쪽이든 택할 이유가 있고, 어느 쪽이든 피해야 할 이유가 있다. 한쪽을 선택하면 그 반대쪽이 발목을 잡는 미래가 뻔하다.
이래서 교황이 부른 거구나. 당사자 모르게 시성을 확정한 교황조차 이 문제는 임의로 결정할 수 없는 모양이야.
‘수의 입고 등장하기는 싫은데.’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붉은색 의복은 심적으로 꺼려진다. 내가 미신이나 징크스 같은 요소에 둔감하기는 하나, 아무리 그래도 수의 입고 행사에 참석하는 건 미친 짓이잖아. 괜히 그딴 짓을 했다가 에넨이 ‘아! 우리 성인이 순교를 하고 싶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다. 난 벌써 하늘로 갈 생각 따위 없어.
하지만 하얀색 의복은 너무 부담스럽다. 물론 살아있는 성인이 탄생하면 교황, 성자 다음가는 권위를 자랑하겠다만, 그 권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건 별개의 문제다. 교국의 수뇌부와 수많은 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나 성자와 동일한 의전을 받으면 내 미래가 고달파진다.
어쩌면 내가 기적적인 은퇴에 성공하면… 교단에서 사제의 길을 걸으라며 납치를 할 수도 있어…
“역시 형제님도 쉽게 정하지 못하는군요.”
“아무래도 교단의 역사가 담긴 문제지 않습니까? 어찌 찰나를 살아가는 제가 영원토록 나아갈 교단의 역사에 누를 끼치겠습니까.”
내 말에 교황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교단의 역사를 찾아봐도 전례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허나 전례가 없다는 것은 당대에 만들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웃는 얼굴로 폭탄선언을 했다.
불안하다. 전례가 없을 경우, 처음 행하는 사람들이 후대의 전례가 되는 건 맞다. 허나 이 타이밍에 저런 발언을 하는 건 상당히 불길하고 두려운 일이다.
“형제님이 어떠한 옷을 택하든 저희는 그대로 행하겠습니다. 설령 제3의 길을 고르시더라도 그것을 새로운 전례로 삼아 품고 갈 생각입니다.”
“예?”
“한 번 일어난 일이 두 번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만약 훗날에도 생전 시성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형제님의 결정을 전례로 삼아 진행하는 게 옳습니다.”
무릎 위에 얹어두었던 손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러지 마. 나한테 그런 짐을 넘기지 마. 제국 역사가 아니라 교단 역사에도 남는 건 싫다고.
“아. 푸른색이나 초록색도 상관없습니다.”
확인사살과도 같은 말이라 실소를 흘릴 뻔했다.
푸른색은 영원한 푸른 하늘, 초록색은 콘스탄티나니까.
– 멍!
주인의 착잡함을 알았는지, 내 옆에 조용히 엎드려있던 티티가 내 손을 부드럽게 핥기 시작했다.
고맙다, 우리 티티. 그나마 네가 있어서 멘탈이 버티는 것 같아.
“아니면 그 아이처럼 노란색으로 하시겠습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교황이 미워졌다.
사람으로서도 사제로서도 훌륭한 사람인 건 알지만, 주체할 수 없는 원망이 솟구쳤다.
다행히 그 자리에서 바로 복장을 정하지는 않았다.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요. 교국에 계시는 동안 느긋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물론 며칠 정도 유예된 것에 불과하나 그 며칠조차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억울하기는 하다. 예송논쟁조차 내로라하는 유자들이 수년 동안 다툰 사건인데, 나는 나 혼자서 며칠 만에 결정해야 한다니.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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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혼자니까 좋은 건가?’
사실 여럿이 머리를 맞댔으면 더 개판이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나마 이번 의복 논쟁은 교황이 전적으로 내 뜻에 맡겨서 망정이지, 추기경들이나 신학자들까지 나섰다면 교단이 반으로 갈라졌을 수도 있어.
“형제님.”
“아, 부르셨습니까?”
그렇게 찻잔을 매만지며 침묵을 지키자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타니안이 입을 열었다.
민망하다. 교황과의 대면이 끝나자마자 타니안에게 찾아갔지만, 아직도 의복 논쟁의 여파에서 떠나지를 못했다. 육체는 여기 있지만 정신은 여전히 집무실에 갇혀있는 기분이야.
“형제님께 큰 짐을 떠넘긴 것 같아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 말에 어색히 미소만 지었다.
타니안도 차기 성자로서 내 시성 논의에 발을 걸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복에 관한 논의도 진행했을 테니, 내가 교황에게 맞은 짬도 알고 있을 터.
“허나 형제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 저희는 형제님의 선택을 지지할 것입니다. 살아서 성인이 될 업적을 쌓은 것은 형제님이고, 만인 앞에서 시성 될 분도 형제님이니까요.”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짐을 짊어지되 부담에 짓눌리지는 마십시오. 이 미숙한 종이 형제님께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뿐입니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타니안은 이윽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귀한 선물을 받은 것치고는 도움이 안 되지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코끼리 인형. 내가 타니안의 아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로 시선을 내렸다.
“도움이 안 되다니요. 형제님 덕분에 마음속 짐이 사라진 기분입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마침 우리 피에트로한테 새로운 장난감을 주려고 했는데, 때마침 형제님께서 이리 귀여운 선물을 주셨지요. 조금이나마 보답하지 못했다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겁니다.”
흡족함이 가득한 목소리라 내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갔다.
역시 나는 아버지계의 프로다. 아이들이 원할 만한 선물을 적절하게 고르고, 적절한 시기에 건네주지 않았나. 아홉 아이의 아빠라는 이름은 포커로 얻은 게 아니다.
“참. 곧 부인이 피에트로를 데리고 올 겁니다. 이 선물은 형제님이 피에트로에게 직접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처음 보는 어른을 경계할 수도 있는데요.”
“저희 아이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에게는 참으로 천사 같은 아이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하사하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벌써부터 아들 바보스러운 조짐이 보여 픽 웃음을 흘렸다.
능력을 하사한 게 아니라 단순히 낯을 가리지 않는 아기일 뿐이다. 호의적인 사람을 알아본다는 거야 뭐, 솔직히 어떤 미친놈이 차기 성자와 시성성 성장의 아들을 막 대하겠어. 보는 사람마다 전부 호의적이겠지.
“실로 에넨께서 보우하심이군요. 형제님과 추기경 예하의 신실함은 하늘에 닿을 정도니, 에넨께서 형제님의 아이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지신 듯합니다.”
물론 떠오른 것을 필터 없이 말하는 건 류티스나 에리히 정도만 저지를 만행.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찬물을 끼얹는 건 무례한 짓이다.
“하하, 살아있는 성인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기쁘군요!”
“아무리 성인이 고귀한들 성자만 하겠습니까?”
타니안의 말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사적인 자리라도 ‘성인이 성자보다 고귀함’으로 해석할 만한 발언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성자조차 살아있는 성인 앞에서는 덕담이나 듣는 존재라고 여겨지면 그만한 봉변도 없다.
성자와 맞먹거나 제치면 그다음은 교황밖에 없으니까. 황제와 함께 대륙을 지배하는 존재와 어깨를 견주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건 싫다. 그런 미래가 찾아오면 여섯 리브노만 백작의 묘비 사이에 몸을 누일 각오도 되어있다.
“어찌 신을 따르는 자들끼리 우열을 나누겠습니까. 그저 누가 더 기도를 자주 올리는지, 누가 신성력에 더 익숙한지의 차이겠지요.”
타니안도 내 각오를 이해한 듯 급히 말을 수습하였다.
고맙다. 네가 류티스처럼 호쾌하고 저돌적인 놈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타니안, 형제님.”
“아, 부인.”
“추기경 예하 오셨습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 작은 남아를 품에 안고 방에 들어왔다.
아주 조금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가 다시 살아난 건 말할 것도 없으리라.
“우아!”
– 멍멍!
다만 피에트로가 내가 준비한 인형보다 티티에게 더욱 큰 관심을 가져 살짝 서운할 뻔했으나, 티티도 내가 데려온 동행견이니 이 또한 내 선물이겠지.
티티는 인형처럼 두고 가지 못하지만. 내가 교국에 있는 며칠 동안이라도 열심히 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