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02)
로판 속 공무원 902화(903/945)
교황이 생전 은퇴를 결심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왜 그런 중대한 사안을 외부인인 나에게 말했는지 아직까지 의문이나, 아무튼 알고는 있었기에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황이 교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그렇구나.’ 라고 넘어갈 준비를. 혹은 살아있는 복자나 성인으로서 교황의 은퇴를 지지할 준비를.
‘이건 대체.’
하지만 이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생전 시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벤트로 사제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 사제들의 기립 박수가 터져 나오기 직전일 때 폭탄을 터뜨릴 줄은 몰랐어.
“성하! 성하께서는 주의 뜻을 누구보다 성실히 받드셨고, 신도들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교단의 교황으로서 부족함 하나 없었거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혹시 피로가 쌓이신 겁니까? 그렇다면 저희 성장들이 성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저희가 물러나 새로운 성장들을 뽑을 테니, 성하께서 물러나신다는 흉참한 말씀은 하지 말하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성하! 누군가 물러나야 한다면 부족한 저희들입니다!”
그보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 사제들의 외침이 더욱 선명하게 들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사제들이 일제히 반대를 부르짖었다. 암군이 양위쇼를 벌여도 예의상 말려야 하는 것이 도리인데, 현 교황은 성군이자 명군이나 마찬가지인 지도자다. 사제들 입장에서는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말려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교황의 은퇴를 만류함과 동시에 ‘차라리 성장들이 은퇴하겠다!’라는 여론으로 몰고 가는 건 감탄스러울 정도다. 대체 누가 저런 예술적인 여론전을 펼치는 거지? 보법부터가 일반인과 다른데.
‘여기도 제국이랑 비슷하구나.’
세속의 정점인 제국과 교계의 정점인 교국. 둘 다 정점이라 그런가 행정부가 돌아가는 모양새는 비슷한 것 같다. 제국의 장관들도, 교국의 성장들도 호시탐탐 합법 은퇴를 노리고 있어.
“이 부족한 늙은이를 좋게 봐주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사제들의 절절한 반대 속에서 어색히 무릎만 꿇고 있는 사이, 폭탄을 터뜨린 교황이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허나 친애하는 형제자매님.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이자 욕심은 교황으로서 남는 것입니다. 오직 주만을 섬기는 종이자, 종들의 종인 교황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성하. 그렇다면 더더욱─!”
“저는 그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교황의 부드럽고도 단호한 말에 침묵이 맴돌았다.
교황으로 기억되고 싶다면 죽을 때까지 교황직에 앉아있으면 된다. 현 교황의 능력과 인품이라면 자리를 지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애초에 세속이든 교계든, 99%의 지도자들은 권좌에 앉은 채로 죽지 않던가. 리브노만 직계 말기의 끔찍한 암군들도 자리 지키기는 훌륭하게 해냈다.
하지만 교황은 교황보다 위의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단순히 교황으로 기억되는 것을 넘어, 더욱 위대한 존재로 취급받는 것을 꺼리고 있다.
‘위험 단계기는 하지.’
외부인이자 딱히 신실하지 않은 내가 봐도 현 교황은 훌륭한 교황이다.
사실 훌륭하다는 말조차 부족한 표현이다. 생전 시성 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교황이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일단 사후 시성은 확실한 양반이야.’
당장 생각나는 굵직한 업적만 해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현 교황 집권기에 세계수가 부활하고, 공의회를 개최하였으며, 부활한 사왕을 광속으로 토벌했으니 시성 근거는 충분하다 못해 과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교황이 계속 권좌에 군림한다? 생전 시성이라는 어마어마하고 파격적인 안건도 통과시킨 교황이, 공의회를 밀어붙일 정도로 열정적인 교황이 최소 수년은 더 군림해?
그렇게 되면 무조건 에넨의 종 교황이 아니라 교황 발트사크 37세를 칭송하는 세력이 나온다. 어쩌면 이미 등장했을 수도 있다.
“저는 형제자매님들께, 주의 은총을 받는 모든 신도들에게 교황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걸 알기에 목소리를 높이던 사제들이 일제히 침묵한 것이겠지.
시성식에 참석한 사제들이라면 굳건한 신앙심과 신념을 갖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어찌 교황을 향해 살아있는 우상의 길을 걸으라고 강요할까.
“하오나 성하.”
다만 이 세상이 공감으로만 해결되는 세상이라면 법과 관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을 터.
“아직 교단은 성하를 필요로 합니다.”
교황의 심정은 이해해도, 순순히 은퇴시키는 건 별개의 문제다.
지도자의 생전 은퇴는 어디까지나 특별한 상황, 드물고도 희박한 사례, 정말 피치 못할 경우에만 일어나는 이벤트여야 한다. 지도자의 생전 은퇴가 수시로 이루어지면 지도자의 권위가 하락하며, 공식적인 지도자가 아닌 막후로 물러난 전임자에게 권력이 쏠리지 않겠나.
상황과 황제, 상왕과 국왕, 전임 교황과 현 교황. 실권자와 명목상 지도자가 별개로 군림하는 기막힌 상황이 터질 수 있다.
“물론 저희 또한 사제기에 성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성직자이자 교황으로서 남고자 하는 성하의 마음. 어찌 저희라고 모르겠습니까.”
이윽고 나와 교황 쪽으로 다가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벌써 누군가 총대를 멨다. 교황의 기습적인 은퇴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을 대표하여 반대를 부르짖을 사람이 나왔,
‘왜 익숙하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총대를 멘 사람의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아.’
슬쩍 고개를 돌리자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다.
신앙교리성 성장, 페드로 오트바야 추기경. 여명 교단 내 보수파의 수장이자 교황의 정적인 인물이 나섰다.
‘…왜?’
아니, 진짜 당신이 왜?교황이 은퇴하면 정적인 신앙교리상 성장한테는 좋은 거 아닌가?
‘교황도 당황한 것 같은데.’
언제나 포근한 미소를 짓고 있던 교황도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듯, 살짝 눈가가 떨렸다.
골치 아픈 일이다. 시성식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집에 돌아가기는커녕 성당에서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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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분위기가 애매해서… 아직 몸도 일으키지 못했다…
다행히 성당에서 프리스타일 랩 배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성인이 탄생한 경사스러운 날, 성스러운 장소에서 논쟁을 벌이는 건 예의가 아니라나? 그리고 교황의 은퇴 문제도 즉석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논의하기로 결정됐다.
교황 입장에서는 시성식의 뜨거운 열기를 몰아 은퇴를 반쯤 확정 짓고 싶었을 텐데 말이야. 신앙교리상 성장의 제지로 좌초된 상황이지.
“상황이 조금 복잡하게 돌아가는군요.”
아무튼 교황과 신앙교리성 성장의 장군-멍군이 오고 간 후, 타니안과 회동 아닌 회동을 하게 됐다.
“성하께서 은퇴를 결정하신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시성식이 끝나자마자 추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에 탄식을 흘릴 뻔했다.
차기 성자인 타니안조차 몰랐다면 아무도 몰랐다는 거다. 어쩐지 비서성 성장도 넋이 나간 얼굴로 교황한테 달려가더라니.
“그리고 예하께서 반대하실 줄은 더더욱 몰랐고요.”
주어가 빠진 문장이었지만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모든 사제들이 교황의 기습 선언과 가슴 절절한 ‘교황으로 남고 싶다.’라는 말에 혼란에 빠졌음에도, 홀로 제정신을 유지하며 빠르게 총대를 메었던 신앙교리성 성장. 가장 의외인 인물의 반대에 타니안도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혹시 교황 성하와 신앙교리성 성장께서 화해라도 하신 겁니까?”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지만 그런 말이 나올 정도다.
설마 정적이라 불리는 두 거물이 극적으로 화해한 것은 아닐까? 성장은 기껏 화해한 1인자가 물러나는 것이 싫어서 반대를 외친 게 아닐까?
“그건 아닙니다. 애초에 두 분은 신념의 차이로 다른 길을 걸으시는 거지, 감정적으로 갈라지신 게 아니니까요. 싸운 적이 없으니 화해를 할 일도 없습니다.”
“그건, 그렇겠군요.”
더더욱 골치 아픈 대답이라 미간을 짚었다.
이득이 걸린 대립이 아닌 신념의 대립. 그래서 감정적으로는 딱히 싸우지 않은 관계. 어떻게 보면 그런 관계가 더 복잡한 관계 아니던가. 이득은 어떻게 조절이라도 하지만 신념은 답도 없어.
“이거 참. 새로운 성인께도 골치 아픈 매듭을 건넨 것 같아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잠깐의 침묵 후. 쓴웃음을 지은 타니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단순히 고개를 숙인 수준을 넘어서 허리를 접었다. 그것도 부정할 수 없이 완벽한 90도의 각도로.
“혀, 형제님! 어찌 성자께서 일개 신도에게 허리를 숙이십니까! 제가 비록 과분하게도 성인의 이름을 받았으나, 형제님은 주께서 택하신 성자 아닙니까!”
“저 아직 차기라 정식 성자는 아닙니다. 성자도 아니고, 추기경도 아니며, 주교도 아니지요. 성인 앞에 공손해야 할 평범한 신도에 불과합니다.”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논리라 개소리 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차기 성자인 게 무슨 상관이냐. 이미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진짜 성자 취급하고 있는데. 교황조차 너를 성자로 생각 중이고.
‘이럴 때만 차기 딱지를 내세우다니.’
비겁하다, 타니안 에네스.
아무래도 아카데미 3년 동안 추하고 괴팍한 류티스에게 옮은 모양이다.
***
보수파 추기경들이 모인 자리에서 묵묵히 차를 마셨다.
“예하.”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질 급한 동포들은 노인의 느긋한 티타임조차 기다려 줄 여유가 없는 것 같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성하께서 물러나시다니요.”
“나한테 묻지 말게. 대충 보니까 비서성 성장도 처음 듣는 얘기였던 것 같은데, 나라고 알겠나?”
“그렇지만 예하께서 가장 강력히 반대하시지 않았습니까? 성하와 무언가 얘기를 나누셨기에─”
“얘기는 무슨. 성하께서 스스로 물러나신다는데 성장의 도리로서 당연히 말려야지. 그분이 교리를 어기기라도 했나,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하기라도 했나?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
내 말에 대표로 입을 열었던 추기경이 꾹 입을 다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다시 침묵이 맴돌았기에 차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성하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번 은퇴 발언은 성하의 기습적인 발언이었다.
동시에 성하를 만류한 것은 성하께서 훌륭한 교황인 것도 이유지만,
‘지금 성하가 물러나면 차기 교황은 보수파에서 나온다.’
이게 가장 큰 이유다. 여차하면 우리 보수 진영에서 차기 교황이 선출될 수도 있다.
물론 공의회 이후로 진보파가 보수파를 압도하고 있다. 진보파 추기경 전체의 세력을 합하면 보수파를 가뿐히 능가한다.
하지만 진보파 추기경 개개인을 보면, 유감스럽게도 모든 진보파 추기경들이 나 하나보다는 못하다. 일이 꼬이면 차기 교황으로 내가 선출될 수도 있다. 그건 곤란한 일이지.
‘진보 쪽에서 단일화할 시간은 벌어야 한다.’
솔직히 성하가 은퇴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성하께서 연로하신 건 사실이고, 임기 중 이런저런 대형 안건을 진행하신 덕에 정치력을 상당히 소모했으니까.
그래도 당장은 안 된다. 교단의 대대적 개혁을 이끌어야 할 차기 교황이 나 같은 보수파의 거두이면, 교단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좌초될 것이다.
‘마지막까지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는구려.’
성하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보수파의 표를 진보파 추기경 중 괜찮은 사람에게 몰아줄까 싶지만, 그렇게 선발된 교황은 보수파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에는 내가 교황이 되는 것이 낫다. 내가 교황이 될 바에는 진보파의 단일화를 기다리는 게 옳고.
‘늙으면 죽어야지 원.’
교단의 미래를 위해 상대 파벌을 배려해야 하는 입장이라.
성하가 물러나면 나도 물러날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