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03)
로판 속 공무원 903화(904/945)
시성식이 끝났지만 귀국은 하지 못했다.
교국 측에서 남아달라고 부탁한 건 아니다. 그저 교국의 분위기가 복잡하게 돌아가서 ‘잘 놀다 갑니다.’ 라는 말을 꺼낼 틈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타니안한테 말하고 튈까 싶지만, 정작 타니안도 정신이 없잖아. 그런 상황에서 귀국을 시도하는 건 누가 봐도 추하게 도망치는 꼴이지.
‘도망 맞지만.’
사실 도망이 맞기는 해. 그런데 교황 은퇴와 새 교황 선발은 사제들의 일 아닐까? 내가 이제 성 칼이기는 해도 정식 서품은커녕 성경 공부도 한 적이 없는 외부인인데.
물론 이런 말을 꺼내면 곧바로 어그로가 끌리겠지. 서로 수군거리느라 바쁜 추기경들이, 혹은 벌써부터 차기 교황의 권좌를 노리는 야심가들이 살아있는 성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달려들 거다. 자신들의 의견에 성인의 권위를 얹기 위해.
– 대체 언제 오려는 건가?
그렇게 시성식이 끝나고 사흘이 지났을까. 황제가 먼저 연락을 걸었다.
– 혹시 교국에 망명을 할 생각이면 미리 말하게. 특무성을 보내서 백작의 귀국을 적극 도울 의향이 있어.
여전히 아비의 분노가 담긴 황제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귀국하면 황제의 분노, 잔류하면 사제들의 접촉. 참으로 눈물겹고 서럽기 그지없는 양자택일이다. 황제의 분노를 피하려다 새로운 재난과 마주했어.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었나…’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양반도 온갖 매운맛을 본 인생의 피해자였을 거다.
확신할 수 있다. 꿀만 빤 인간은 절대 그런 말을 남기지 못해.
– 아니지. 이제는 백작이 아니라 성 칼이라고 해야 옳을 터.
착잡함에 침묵을 지키자 황제가 넌지시 끔찍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장관이나 백작이 아닌 성 칼이라니. 기어코 저 단어가 황제 입에서 합법적으로 나오는 날이 오다니.
…
‘잠깐만.’
그런데 나 아직 시성 받았다는 말은 안 했는데? 교국도 교황의 폭탄선언에 정신이 나가서 공식 발표가 유예된 상황이고.
교국 내에서는 이미 성 칼이나, 교국 밖에서는 여전히─
– 제국과 우정을 나눈 추기경은 한둘이 아닐세.
‘아.’
내 의문을 눈치챈 듯, 덤덤히 입을 여는 황제의 모습에바로 납득했다.
하긴. 황실과 교단의 우호 관계는 수백 년에 이르고, 교국에 가장 막대한 헌금을 쑤셔 박는 나라도 제국이다. 제국이 교국 내 소식에 깜깜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그리고 황제가 내 시성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 친우들도 정신이 없었는지, 시성이 이루어지고 하루가 지나서야 연락을 줬지만 말이야.
교황의 은퇴 선언과 신앙교리성 성장의 반대도 들었다는 뜻이다.
– 교황께서 의외로 짓궂은 면모를 가지고 계셨어. 설마 시성식이 끝나자마자 은퇴를 선언하실 줄은 누가 알았겠나.
“실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수석 추기경인 비서성 성장조차 성하의 선언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 허어, 과할 정도로 비밀을 지키셨군.
그렇게 말한 황제는 턱을 매만지더니 오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비서성 성장에게도 비밀로 한 은퇴를 왜 너한테는 말한 거냐, 라고 추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억울한 추궁이다. 나도 교황이 왜 내 앞에서 생전 퇴위를 언급했는지 아직까지 의문이니까. 차라리 측근인 비서성 성장, 차기 성자인 타니안에게 말한 거면 납득이라고 하지. 대체 나한테는 왜.
‘그래 놓고 은퇴 선언 시기는 비밀로 했지.’
다 말하지도 않고, 다 숨기지도 않았다.실로 기묘한 중용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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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얼 위한 중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중용이다.
– 백작.
“예, 폐하.”
– 당장 귀국할 생각은 없나?
연이은 귀국 재촉에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오나 교국의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차마 물러나기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정중하고 화려한 마중을 받은 입장으로서 말없이 떠날 수도 없습니다.”
– 그럼 당분간은 교국에 남아 있게. 못해도 2, 3주는 있어야겠어.
“예?”
의외의 명령인지라 절로 반문이 나왔다.
내 귀국을 누구보다 바라고 있을 사람이 황제다. 내가 교국의 부름을 받고 긴급 탈출했을 때, 아쉽다는 기색을 강렬하게 풍기지 않았던가.
물론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정이 식기 마련. 내가 교국에서 생을 연명하는 동안 황제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았을 수 있다.
하지만 교국에 남아있으라고 지시할 정도로 가라앉지는 않았을 텐데? 다른 것도 아닌 황태녀가 걸린 분노가 그렇게 빨리 식는다고? 희대의 딸 바보인 황제가?
– 교국 전체가 소란스러워서 빠른 정보 파악이 어려워. 헌데 성인이 된 백작이 때마침 교국에 있지 않나.
그래도 약간의 언짢음이 담긴 황제의 목소리에 다시 납득했다.
아직 황제는 나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의 생전 퇴위와 차기 교황 선출이라는 급박한 사태가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아비의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중인 거다.
‘다행이다.’
저놈이 황제라는 사실이 지금만큼 다행이었던 적이 없다. 만약 황제가 아니었다면 아비의 마음을 억누를 정도로 의무감을 가지지 않았을 테─
‘황제가 아니면 패도 되지 않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놈이 황제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빌빌거릴 일도 없잖아.
– 짐도 백작에게서 교황의 생전 퇴위 결심을 들은 이후, 차기 교황이 될만한 인사들을 추리고 있었다네. 하지만 아직까지 마땅한 차기 주자가 없어. 그런 상황에서 이런 난리가 터진 거야.
이번에는 내 생각을 읽지 못했는지, 황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다른 국가보다 우리가 먼저 차기 교황 후보에게 접촉해야 하네. 그래야 제국과 교국의 영원한 우정이 더욱 굳건해질 테니.
“양국의 우호를 위해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 음. 백작이 그리 말하니 든든하군. 믿도록 하지.
썩 달갑지 않은 믿음이라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살아있는 성인이 되자마자 차기 교황 선발에 관여하게 생겼다. 이거 남들이 보면 제국의 교계 장악을 위한 선봉장으로 보이지 않을까?
점점 내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희대의 권신이자 난봉꾼으로 기록되면 좀 슬플 것 같아.
황제의 요구대로 현지에 머무르며 특이사항을 긁어모으는 특파원이 되었다.
이런 건 나보다 정보부나 첩보부 애들이 더 능숙하겠지만, 애석하게도 걔네 중에는 성인이 없잖아. 이번 일은 은밀하고 능숙한 사람보다 대놓고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무려 교황이 교체될지도 모르는 성스러운 자리에 첩보원을 넣었다가 들킨다? 양국 관계가 얼마나 어색해질까.
“나 이제 뭐 해야 되냐.”
다만 양국의 원활한 관계와 확고한 명분을 택한 결과. 능숙한 정보 수집에는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
나 솔직히 타니안을 빼면 신성교국 내에 친하다고 할 사람도 없어. 좀 적당히 친분이 있어야 접근도 하고, 정보도 수집하고, 은근슬쩍 로비도 하는 거지.
막막하다. 성심을 다 하겠다고는 했지만, 성심만 다 하다가 사건이 종료될 것 같다. 그렇게 아무 성과 없이 귀국하면 황제에게 영혼까지 털릴 터.
– 끼이잉…
내 막막함을 티티도 느낀 듯, 낑낑거리며 내 손을 핥아주었다.
고맙다 티티야. 그나마 네가 옆에 있어서 마음이 좀 놓인다. 나 혼자 교국에 덜렁 있었으면 매일 멘탈이 스르륵 녹아내렸을 거야.
‘진짜 어쩌지.’
허나 유감스럽게도, 티티의 존재가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내 멘탈은 지켜줬지만 정보를 물어오지는 못했다. 내 곁을 지켜주었지만 함께 머리를 맞대지는 못했다.
‘타니안도 바빠서 계속 만나기 민망한데.’
교황이 은퇴 선언을 하면서 차기 성자인 타니안에게 접촉을 시도하는 사제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동시에 타니안의 부인인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도 마찬가지.
이런 상황에서 난 대체 무슨 방안을 택해야 할까.
– 똑똑
‘응?’
씁쓸한 상념은 난데없는 노크 소리에 깨졌다.
“누구십니까?”
“외교성 부성장인 카렐 스텐덤이라고 합니다. 성스러운 분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성스러운 분.’
경이로운 호칭이라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내 기억으로 외교성 부성장은 성장인 빌렘처럼 추기경이다. 헌데 추기경의 입에서 형제님이 아니라 성스러운 분이라는 극상의 존칭이 나온다라. 이것이 살아있는 성인의 힘인가.
“들어오시지요. 귀한 손님이 오셔서 반가울 따름입니다.”
물론 당혹감 때문에 직접 찾아온 추기경을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여전히 내 손을 핥고 있던 티티의 머리를 토닥인 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스러운 분을 뵙습니다. 외교성 부성장인 카렐 스텐덤, 다시 인사드립니다.”
뒤이어 카렐 추기경이 방 안으로 들어와 목례를 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성스러운 분께 양해를 구하고 시간을 잡는 것이 도리거늘, 급히 오느라 미처 그러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헌데 형제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소 급한 방문인 감이 없잖아 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빌렘 형제님께서 성스러운 분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는 것을 탄스럽게 여기고 있는지라, 성스러운 분께 드릴 작은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선물이요?”
내 반문에 고개를 끄덕인 카렐 추기경은 작은 함을 공손히 건넸다.
“초대 교황 성하께서 순교하신 땅, 초대 교황 성하를 암살한 이교가 회개하여 주께 이름을 바친 땅에서 재배한 찻잎입니다. 역대 비서성 성장들이 직접 관리하며, 재배가 끝나면 교황 성하께서 축성을 내리기도 하지요.”
‘뭣.’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물건이라 눈가가 떨렸다.
재배하는 땅, 과정, 결과까지 화려하기 그지없다. 찻잎 자체로도 성물이나 마찬가지잖아.
“새로운 성인이 탄생하셨으니, 마땅히 그를 기념하며 바치는 것이 옳을 터. 빌렘 형제님께서 성하의 허락을 받아 성스러운 분께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 렇군요. 참으로 감사한 선물입니다.”
“별말씀을. 성스러운 분께서 마땅히 가져야 할 물건입니다.”
그렇게 말한 카렐 추기경은 다시 목례를 하더니, 뒷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스러운 분을 번거롭게 하여 죄송합니다.”
정말 선물만 주고 사라졌다.
외교성의 부성장이자 추기경인 사람이. 단순히 심부름만 하고 그냥 돌아갔다.
‘대체 뭐야.’
교국의 분위기가 좀, 많이 혼란스럽기는 하구나.
카렐 추기경이 건넨 함을 열자 찻잎과 함께 작은 쪽지가 보였다.
[ 밤에 형제님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딱 한 문장이 적힌 짧고 강력한 쪽지가.
“으음, 이 짓도 늙어서 하니 영 버겁군요.”
그리고 실제로 밤이 되자, 방 천장이 들썩거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신앙교리성 성장…’
아니,이게 진짜 무슨 상황인 건데.
성장이나 되는 양반이 왜 천장 위를 기어다니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