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04)
로판 속 공무원 904화(905/945)
천장에서 부드럽게 착지하는 신앙교리성 성장을 보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방은 신성교국에서 귀빈을 위해 준비한 방이라, 일반적인 방에 비해서는 층고가 높은 편이다. 3M를 가뿐히 넘는 층고임에도 신앙교리성 성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차라리 타니안이 저랬다면 아카데미 시절 버릇이 부활했구나 싶을 텐데, 아무리 젊게 봐도 노인인 양반이 저러는 건 대체.
‘신성력 대단하네.’
이윽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신성력은 노인의 무릎 관절마저 강철로 만드는 힘이 있구나.
만약 상황이 신성력을 배웠다면 아직도 옥좌에 앉아있었겠지. 그럼 황제는 여전히 황태자였을 테고.
‘아쉽다.’
그놈이 황태자였다면 장관 겸 제국백 겸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 겸 성인이라는 타이틀로 좀 비벼봤을 텐데. 그놈하고 맞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어.
“성스러운 분을 뵙습니다. 이리 독대를 하는 건 처음이지요? 실로 영광입니다.”
“…아, 예. 저도 예하를 뵙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아무튼 평온하게 인사를 건네는 성장을 향해 마주 고개를 숙였다.
허나 고개를 숙이는 순간까지 얼떨떨한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 나이에 천장을 기어 왔으면 힘든 시늉이라도 하면 안 될까? 옷에 먼지조차 묻지 않은 걸 보면 내가 사람을 보는 건지, 신선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
“참. 카렐 형제님께 부탁하여 미리 서신을 보냈습니다만, 받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좋은 찻잎과 함께 주셔서 소중히 간직 중이지요.”
“그렇군요. 혹여나 누락되지는 않았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그 와중에 성장은 평온한 안색으로 웃음을 흘리는 여유를 보였다.
그래, 그냥 신선이라고 생각하자. 고도로 신성력을 쌓은 추기경은 신선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
“예하께서 이리 불편하게 오신 것을 보니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예하께서 찾으신다면 제가 먼저 찾아뵈었을 텐데요.”
마음을 편히 먹으니 움찔거리던 입이 수월하게 열렸다.
독대를 하고 싶다면 평범하게 약속을 잡지, 뭐 이리 기괴한 방식으로 왔는지 의문이다. 애초에 성장이 만나자고 했다면 거절할 이유도 없지 않나.
교황 교체가 코앞인 급박한 상황 속에서 성장과 만나는 건 이로우면 이롭지, 절대 해로운 일은 아니다. 심지어 성장은 교황의 은퇴 선언에 총대를 메고 반대를 표한 인물이니까. 오히려 내가 먼저 대면을 청해야 할 입장이다. 성장이 노구를 이끌고 잠입 액션을 찍을 필요는 없었어.
“송구합니다. 성스러운 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참으로 예민한 내용인지라, 공식적으로 저희는 만난 적이 없어야 합니다.”
그 말에 속으로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예민한 내용이라. 대체 얼마나 예민한 내용이길래 천장을 통한 은밀 기동을 택한 걸까.
“저와 큰 접점이 없는 카렐 형제님을 보낸 것도 그 일환이지요. 설득하느라 조금 애를 먹었지만, 무릎을 꿇으니 이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그게 뭔.’
너무도 끔찍한 말이라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신앙교리성 성장은 교단 내 보수파의 수장이자 교황의 정적인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무릎까지 꿇어가며 부탁을 하다니. 카렐 추기경은 얼마나 죽을 맛이었을까.
“예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허허, 이거 성스러운 분께 시작부터 부담을 드렸군요.”
성장의 말이 끝나자 나도, 성장도 작게 웃음을 흘렸다.
물론 재밌어서 웃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심각한 주제로 대화를 나눌 터이니, 마지막으로 긴장을 풀자는 의미에서 하는 의례적인 웃음에 불과하다.혹은 앞으로 웃을 일이 없으니 정신 건강을 위해 미리 웃어두는 거고.
이렇게 말하니 둘 다 같은 뜻이네.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구나.
나와 마주 앉은 성장은 압도적인 나이와 직급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를 고수했다.
“성하의 은퇴는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다만 태도가 공손하다고 대사까지 부드럽다는 건 아니었다.
“이 늙은이가 성하의 은퇴를 반대하였으나, 그저 잠깐의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합니다. 허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성하의 뜻이 확고하다면 예하의 말씀처럼 잠깐에 불과할 터인데, 그 잠깐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는 겁니까?”
“차기 교황 후보를 선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교단에게 무엇보다 필요하고 절실한 일이니, 성하의 뜻에 반대하였지요.”
누구보다 강력하고 재빠르게 교황 은퇴를 반대했던 사람이 정작 누구보다 먼저 미래를 보고 있었다는 말. 절대 부드럽고 온화한 말은 아니다.
‘설마.’
그리고 성장의 속내를 듣고 나니 마음속에서 의혹이 고개 들었다.
혹시 교황의 선종을 대비하여 자신의 교황 즉위, 혹은 제3자 옹립을 준비하고 있던 건가? 그런데 갑자기 선종이 아닌 생전 퇴위로 방향이 틀어져서 시간을 벌려는 것이고?
그렇다면 성장의 발 빠른 대처와 은밀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이미 미래를 보고 있었기에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으며, 정적의 죽음을 대비하고 있다는 건 사제의 인품에 타격이 가기에 은밀히─
“아. 이 늙은이는 교황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뜻을 함께 하는 동포들도 마찬가지니, 현 교황 성하의 뜻을 훌륭하게 이을 자가 차기 교황이 되겠지요.”
“그렇군요.”
바로 반성했다. 이렇게 깔끔하고 욕심 없는 사람을 의심하다니. 난 쓰레기야.
“사실 공의회 이전이라면 차기 교황에 도전했을 겁니다. 일생을 바쳐가며 걸어온 길, 그 끝에 도달하고 싶은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망이지 않겠습니까? 사제라는 놈이 욕망을 완전히 다스리지 못해 민망하지만 말입니다.”
“욕망을 가지는 게 어찌 민망한 일입니까.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신도들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것도 욕망이지요. 그 욕망을 교황의 힘으로 이루겠다는 것이니, 천상의 주께서도 미소 지을 일입니다.”
“이거 참. 성스러운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기껏 포기했던 교황의 좌가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성장은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더니,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제 욕망은 홀로 간직하겠습니다. 앞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이루어야 할 교황의 자리에 보수의 상징인 자가 앉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위대한 공의회가 허풍에 불과했다고 오해할 터. 그건 사제로서 끔찍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더욱 작아진,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차기 교황은 현 교황 성하와 같은 뜻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희같이 꽉 막힌 자들의 지지로 교황이 된다면 그것을 어찌 성하의 후계자라 하겠습니까.”
“그러니 진보파의 총의를 짊어진 후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런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돌려 말하거나 고의적인 정보 누락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는 성장. 그런 성장을 바라보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보수파의 수장이 진보파의 교황 배출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나, 개인적 신념을 떠나 교단의 공익을 위한 결단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장의 말처럼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보수파 교황이 즉위하는 건 좀, 많이 이상하지.
동시에 진보파의 총의라는 말도 상당히 와닿았다.
– 현재 진보파 추기경들은 능력과 인망을 두루 갖춘 자들이 난립해 있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 한 명을 꼽기 힘들 정도야.
“다들 거기서 거기라 지지를 받기 어렵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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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한 좋게 말했는데 그리 직설적으로 말하기 있나?
황제가 나에게 현지 특파원으로 지내라 명령을 내렸을 때. 진보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성장과 같은 말을 했었으니까.
물론 인재가 없는 것보다는 후보가 많은 것이 좋기는 한데,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후보가 10명을 가뿐히 넘어가면 표만 분산될 뿐이잖아. 오죽하면 이대로 콘클라베가 진행될 경우, 신앙교리성 성장의 당선 가능성이 제일 높다는 추측이 나오겠나.
“해서, 성스러운 분이시자 제국의 귀족이신 분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교단과 대륙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차기 교황. 제국의 힘으로 만들어보지 않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은 굉장히 많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밤중에 기습 연락을 받은 황제는 한동안 미간을 짚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 백작.
“예, 폐하.”
– 짐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폐하의 귀와 마종공의 마법. 어느 것을 더 신뢰하십니까?”
– 망할. 제대로 들었군.
통신구를 통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해한다. 나도 신앙교리성 성장의 말에 정신이 나갈 뻔했으니까. 성장의 표정, 손짓, 억양을 그대로 느낀 나조차 혼란스러웠는데, 한 다리 건너서 전해 듣는 황제는 어떻겠나.
– 제국의 힘으로 차기 교황을 세운다라.
그것도 교단의 중역이 제국의 간섭을 용인하는 말이라면 더더욱.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지금 상황이면 몇 주가 아니라 몇 달이 지나도 진보파의 총의를 짊어질 후보가 나오지 않습니다. 콘클라베는 수 차례, 수십 차례의 부결을 겪겠지요.”
“교단의 역사를 보면 추기경들이 대성당에 감금된 적이 있었습니다. 1년 동안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니, 참다못한 에네스티예의 시민들이 추기경들을 가두어 빨리 교황을 만들어 오라고 한 것이지요.”
“저희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진보파가 나아갈 길에 보수의 영향력을 묻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국입니다. 제국이 후보 한 명을 은근히 지지한다면, 그 후보가 압도적이지는 않더라도 후보 중 제일가는 지지를 받을 겁니다.”
“그때 저희 보수파도 그 후보와 협상하는 시늉을 하겠습니다. 마치 차기 교황 내정자를 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장의 말을 떠올리니 내 머리도 다시 지끈거렸다.
보수파가 처음부터 특정 후보를 지지하면 보수파가 세운 교황이 된다. 그러나 제국이 은근슬쩍 특정 후보를 지원하고, 보수파가 슬그머니 손을 보태면 ‘그럭저럭’ 진보파 중에 두각을 드러낸 인재로 포장할 수 있다.
‘…좋게 생각하자.’
그래,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떻게 보면 교황 즉위 이전부터 제국과 보수파를 휘어잡은, 대륙 초강대국과 교단 내 대립 파벌의 지지를 받는 위대한 교황이라 볼 수 있지 않겠나.
“개인적으로 리시우코 추기경이 후보로 적당할 것 같습니다만, 성스러운 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심지어 그 위대한 교황이 제국과 우호적일 수밖에 없는 아우스엔 대교구 대주교다?이는 제국에 둘도 없을 홍복이다.
– 교국도 참, 복잡하게 돌아가는군.
그저 이 모든 판을 보수파의 수장이 마련했다는 게 아이러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