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06)
로판 속 공무원 906화(907/945)
리시우코 추기경과 신앙교리성 성장의 (강제)대면 이후로 상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현 교황의 은퇴 의지는 확고하며,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던 신앙교리성 성장은 차기 교황으로 적절한 인재를 확보했다. 게다가 차기 성자인 타니안은 교황의 은퇴를 지지하고 있지.
교단의 명실상부한 수장과 교황의 정적이라 불릴 정도의 거물, 그리고 상징적 존재가 일제히 뜻을 모았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면 교황의 은퇴를 진심으로 만류하고 싶은 사람들도 뜻을 거둘 수밖에 없다.
“교황 성하의 인품과 별개로 적지 않은 추기경들이 성하의 행보에 지쳐 있었습니다. 전대 교황께서도 상당히 급진적인 분이라 연로하신 현 교황 성하를 선출한 것인데, 설마 전대 교황보다 더한 분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심지어 추기경들 입장에서는 명분과 별개로 교황의 은퇴를 반길 실질적 사유도 존재했다.
전대 교황은 교단 역사에 길이 남을 진보파이자 개혁가였다. 덕분에 전대 교황의 파격적인 행보에 지쳐 있었던 당대 추기경들은 ‘이번 교황은 좀 쉬어가자.’ 라는 공통된 의견을 내세웠고, 당시로도 나이가 많은 편이었던 현 교황을 교황으로 올렸다.
헌데 타니안의 말처럼 누가 알았을까. 연로했던 추기경이 교황의 좌에 오르자마자 회춘한 것처럼 정력적인 활동을 보일 줄은. 쉬어가기 위해 뽑았던 징검다리 교황이 전대보다 더한 개혁가였을 줄은.
“아마 당시 추기경들은 배신당한 기분이었겠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이미 자신들 손으로 옹립한 교황을 끌어내릴 수도 없지요.”
“게다가 끌어내릴 명분도 없으니 더더욱 속이 탔겠군요.”
“맞습니다. 현 성하께서 실정을 저지르거나 탐욕스럽다면 모를까, 교단의 개혁과 영광을 위해 일 좀 더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린 타니안의 모습에 어색히 마주 미소를 지었다.
타니안은 젊고 실무와도 거리가 머니 당시 추기경들의 심정을 모를 거다. 수십 년 동안 유능하고 성실한 상사 밑에서 시달리다가, 이제야 겨우 게으른 상사를 만날 줄 알았더니 더욱 성실한 상사를 만났을 때의 절망을. 그러니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지.
아무튼 타니안의 태평함, 당대 추기경들의 절망과 별개로 현 교황은 정력적인 행보를 보였다. 사실 다른 행보를 볼 거 없이 공의회 개최 하나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업적이잖아. 괜히 교단에서 공의회 개최를 기적과 동급의 사건으로 보는 게 아니야.
그리고 교황은 공의회’만’ 개최한 지도자가 아닌 공의회’도’ 개최한 지도자다. 교황으로 군림한 수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정치력을 소모하며, 얼마나 많은 추기경과 사제들을 갈아 넣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제국도 비슷하니까.’
상황 시절, 망해가던 제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측정 불가능한 귀족들과 공무원들이 갈렸다고 한다. 그 기조는 제국이 정상궤도에 오른 오늘날에도 어째서인지 변함이 없고.
그래서 추기경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업무 지옥에서 탈출한 기분일 텐데 얼마나 기쁘겠어. 다들 입으로는 교황의 은퇴를 말렸지만, 막상 차기 교황 후보자의 윤곽이 드러났으니 입꼬리가 씰룩거릴 터.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다.’
어느새 어색했던 미소는 훈훈하고 자연스러운 미소로 변하였다.
현 교황은 교단과 대륙 역사에 짙은 발자취를 남기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신앙교리성 성장은 자신의 야망은 포기하되, 교단의 대의를 이어갈 적절한 후보를 찾았다. 다른 추기경과 사제들은 2연속 워커홀릭 교황 치세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결말이다.
난데없이 차기 교황이 될 리시우코 추기경? 교황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하나의 상징이자 권위기에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유감스럽지만 그게 현실이야.
“참, 그러고 보니 그거 들으셨습니까?”
“무얼 말입니까?”
속으로 리시우코 추기경(인간)에서 새 시대의 교황(토템)으로 변할 누군가에게 애도를 표하던 중, 타니안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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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교황 교체가 임박한 상태라 모든 관심이 그쪽으로 쏠린 상태다. 타니안의 관심을 끌만한 추가적인 주제가 생기지는 않을 텐─
“신앙교리성 성장께서도 새 교황 성하가 즉위하시면 물러날 예정이라고 합니다.”
‘아.’
생겼다. 그것도 타니안뿐만 아니라 교단 전체가 술렁거릴 주제가.
하지만 거대한 주제일 뿐이지 의외의 주제인 것은 아니다. 신앙교리성 성장은 교황의 정적이자 보수파의 수장인 거물이지 않나. 그런 양반이 새로운 교황의 즉위 이후에도 굳건하게 버티고 있으면 새 교황의 행보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
게다가 리시우코 추기경은 제국과 더불어 보수파의 지지로 즉위할 예정이다. 대륙 각국이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추기경을 교황으로 미는 건 전통이나 마찬가지지만, 진보파 추기경이 보수파의 지지를 받는 건 좀 그렇지.
그렇기에 성장은 은퇴를 서두르는 거다. 보수파의 수장인 자신이 사라지면 보수파도 한동안 우왕좌왕할 테고, 그사이에 새로운 교황은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다. 다행히 현 보수파도 확고한 2인자가 없는 3인자의 난립이라 입지를 다질 시간도 제법 길겠지.
‘그 시간 동안 입지를 다지지 못하면 자기 팔자인 거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미안하지만, 상대 파벌의 머리가 스스로 물러난 절호의 기회도 받아먹지 못한다면 허수아비 교황으로 지내는 게 교단을 위해서도 좋다. 추기경들이 그토록 원하던 ‘일 안 하는 징검다리 교황’이 되겠어.
“교단의 두 거목이 동시에 물러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이렇게 느끼게 되는군요.”
물론 리시우코 추기경이 징검다리 교황이 되든 제3의 워커홀릭 교황이 되든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 그저 교황과 성장의 연이은 은퇴에 소소한 유감만 표하면 그만이다.
“태양 아래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두 분께서는 후배들의 박수를 받으며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으니, 분명 천상의 주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리고 두 분께서도 만족스레 노후를 보내실 테고요.”
“하하, 부디 그러셨으면 좋겠군요.”
다시 웃음을 흘린 타니안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도 고개를 돌리자 방을 뽈뽈뽈 돌아다니는 티티와 피에트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열정적으로 꼬리를 흔드는 티티, 눈을 반짝이며 옹알이를 하는 피에트로가.
흐으으음.
“이거 제가 귀국하게 되면 피에트로가 많이 서운해하겠군요.”
“사실 그게 걱정이기는 합니다. 새로운 재미에 눈을 뜬 피에트로가 과연 인형으로 만족할는지.”
걱정이 가득 담긴 타니안의 목소리에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진짜 어쩌지.’
뒤이어 나도 타니안처럼 피에트로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었다.
원래 없던 거라면 부족함을 모르나, 있다가 사라지면 그보다 상실감을 느낄 수 없다. 이미 티티라는 놀이 상대를 만난 피에트로가 고작 인형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내가 티티를 데려온 건 타니안의 육아법에 독을 푼 게 아닐까?
책임감과 미안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피에트로는 국경 밖에 있어서 티티를 자주 보기도 힘든데.
“제가 형제님께 괜한 짐을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몇 년 정도만 버티면 티티를 닮은 귀여운 아이가 저희 품으로 올 텐데, 짐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그 몇 년 동안 고난의 행군을 찍을 게 뻔하니까 하는 말이잖아.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이번 일의 원흉은 누가 뭐래도 티티를 데려온 나니까.
여명 교단 172대 교황, 발트사크 37세의 은퇴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발트사크 37세는 교단의 수장이 아닌 한때 교황이었던 원로가 되었고, 교황 등극 이전의 이름을 되찾았다.
“성하께서 남기신 업적은 실로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원히 성실하고도 선량한 교황인 발트사크 37세를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선배. 누구보다 성실하고도 선량한 선배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물론 되찾은 것과 사용할 수 있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이미 수십 년 동안 발트사크 37세라 불리었고,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업적을 쌓은 교황이다. 그런 사람이 교황의 이름이 아닌 인간의 이름을 되찾는 건 솔직히 어려운 일이지. 아마 발트사크 37세 본인도 자신의 옛 이름은 까먹었을 거야.
‘상황도 비슷하지.’
황궁 구석에서 두덕리 온라인을 즐기는 상황도 에이만카 16세로 기억에 남지, 코르부스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런데 이건 감히 황제의 본명을 찍찍 부를 놈이 없으니까 예외기는 해. 상황을 본명으로 기억하는 놈이 있다면 그거 더 수상한 놈이야.
“성스러운 분께 교단이 많은 걸 받았습니다.”
그렇게 교황과 상황의 공통된 운명을 떠올리며 홀로 입꼬리를 올리는 사이, 예비 은퇴자인 신앙교리성 성장이 다가왔다.
“성스러운 분께서 도움을 주시지 않았다면 교단은 아직도 우왕좌왕했을 겁니다. 성스러운 분 덕에, 황제 폐하 덕에 혼란을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지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마땅한 분이 계신 건 주의 은총이고, 그러한 분을 찾은 건 예하의 공로입니다. 그것을 어찌 저와 폐하의 덕이라 하겠습니까.”
성장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차기 교황 후보를 찾아낸 것은 성장의 공로고, 제국이 한 건 단순히 숟가락을 얹은 것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우리가 힘 좀 썼죠.’ 라고 으스대겠나.
다만 성장 정도 되는 사람이 가볍게 은혜 운운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은퇴 예정이라고 편하게 말하네.’
어차피 곧 물러날 사람이라 공수표를 뿌리는 거라 생각하면 된다. 야인이 은혜를 잊든 말든 교단에는 큰 지장이 없으니.
“아. 성스러운 분의 시성 소식은 콘클라베 직전에 발표할 예정입니다. 늦어도 닷새 안에는 이루어질 테니, 그동안 성 칼이 아닌 칼로서의 삶을 즐기시지요.”
“명심하겠습니다.”
미묘하게 와닿는 조언이라 엄숙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 칼이 아닌 칼의 삶. 확실히 내가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말이다.
***
고개를 끄덕이는 성스러운 분을 보며 미약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분은 제국으로 가서 살아있는 성인으로 지내겠지. 제국과 아우스엔 대교구가 얼마나 소란스러워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동안 소란스러울 제국으로 나까지 가게 됐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을 수 없다.
‘성하. 어찌 저에게 이러십니까.’
공식적으로 은퇴 상태가 된 성하께서 비밀리에 마지막으로 내린 명령.
신앙교리성 성장인 나를 아우스엔 대교구 대교구장으로 임명하겠다는 인사이동 명령.
‘성하…’
저는 당신처럼 은퇴를 하고 싶었는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