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08)
로판 속 공무원 908화(909/945)
멍하니 창문 밖을 내려다봤다.
대문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는 인파들, 분위기에 휩쓸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같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익숙한 광경인데.’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단체로 기도를 하는 기괴한 광경. 놀랍게도 저 광경은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니다.
트릭시가 세쌍둥이를 출산했을 때도 대륙 각지에서 모인 마법사들 덕에 저런 장관이 연출됐었지. 대륙 마법계의 거두이자 선배이며 전설인 트릭시의 출산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러니 트릭시가 세쌍둥이의 동복동생을 낳지 않는 이상 다시는 볼일 없을 광경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나 때문에 재현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번에는 마법사가 아니라 사제들이지만.’
정확히는 사제를 포함한 신실한 신도들이었지만. 마법사들보다 그 숫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집단이 대문 앞에 모여버렸어.
“흐으.”
결국 참지 못하고 실소를 흘렸다.
귀족의 몸에 빙의한 이후로 사용인들의 떠받듦을 받았다. 감찰부장이 된 이후로는 여러 공무원들과 귀족들의 존중을 받았다. 북방을 정벌하고 이런저런 직함을 받기 시작한 이래로는 대륙적 네임드가 되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존중이나 경외를 받는 건 그럭저럭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난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어. 창문 밖을 볼 때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아.
‘어쩌냐 이거.’
이윽고 의자에 대충 주저앉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대륙 각지에 퍼진 여명 교단의 교회들은 통신구와 텔레포트의 힘으로 인해 즉각적이고 강력한 소통, 연계를 자랑한다. 덕분에 신성교국이 각국 주요 대교구에 전달한 시성 소식은 각 대교구들이 휘하 교구로 전달하고, 휘하 교구는 각지의 작은 교회나 예배당에 알리며, 또 각지의 교회 및 예배당들은 신도들에게 전파했다.
이 모든 과정은 이루어지는 데 불과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황제에게 항의 전화를 걸었지만 무시당하고, 여장을 풀고, 황궁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는 사이에 저 광경이 펼쳐진 거다.
‘설마 이렇게 빠를 줄이야.’
곤란한 일이다. 당장 저 흉한 초상화를 반납해야 하는데, 저렇게 인파가 몰려있으면 나가기 애매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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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머무는 장소에서 성인의 초상화를 든 성인이 나온다? 대체 얼마나 열렬한 환호성을 받을지 두려울 지경이다. 혹시 황제가 이 상황을 노린 거라면 정말 지독한 새끼라고밖에─
‘뭐야.’
통신구가 보랏빛으로 빛났다.
보랏빛. 황실을 상징하는 색깔. 통신구가 저런 빛을 낸다면 황실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궁내성의 연락이거나 황족 당사자의 연락일 터.
“타일글레헨 백작입니다.”
정황상 어떤 놈이 걸었을지 뻔한 연락이라 무시하고 싶었으나, 무시하면 더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분노를 억누르며 받았다.
– 성 칼. 어찌하여 제국에 귀국했음에도 이 황제에게 인사조차 오지 않습니까?
‘이 새끼가.’
그리고 존대로 상대를 빡치게 하는 황제를 보자마자 통신구를 내던지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기껏 감정을 가다듬으며 연락을 받았더니 저딴 말부터 하다니. 초상화에 대한 유감 표명부터 하는 게 사람의 도리 아니냐?
…
아.
‘사람이 아니구나.’
성인이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아서 그런 걸까. 보다 널린 마인드와 넓은 시야를 갖추게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딴 짓을, 같은 시야로 황제를 바라보니 문제인 거다. 사람이 아니니까 저러는 거라고 생각하면 모든 기행을 설명할 수 있어.
하긴. 제국의 모든 업무를 최종적으로 처리하는 직책이다. 사람이 아니라 기계나 토템이라고 보는 게 옳겠지. 내가 지금까지 눈이 어두워 이 당연한 걸 모르고 있었다.
– 혹시 초상화를 불태우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거 교국이 보낸 선물이라, 아무리 초상화의 당사자라도 훼손하면 곤란해.
“그런 걸 신하에게 막 보내도 되는 겁니까?”
내가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간 사이, 한 문장 만에 존대를 갖다 버린 황제는 초상화의 안전부터 확인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애초에 자기가 간직하면 되지 않았을까? 왜 남의 저택에 보내서 괜한 걱정을 하는 걸까.
아니, 아니지. 의문을 가지지 말자. 저건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에 불과하니 상식을 기대하는 건 곤란하다.
“초상화는 무사합니다. 본래 초상화를 들고 폐하를 뵈러 가려 했으나, 사정이 생겨 저택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 사정?
대답 대신 창문 쪽으로 다가가 통신구를 들이밀었다. 대문 앞의 인파가 흐릿하게나마 보일 수 있게.
– 저건 또 뭐야.
졸지에 대문 앞에 열린 기습 기도회를 본 황제는 다소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황제도 저 광경을 의도하거나 부추긴 건 아니었구나.
‘아직은 인간 언저리였어.’
제국의 황제는 기계나 토템이 아닌 인간이었다.
비록 보편적인 인간의 범주에서는 좀 벗어난 것 같지만, 그래도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건 가능한 수준이다.
– 백작.
“예, 폐하.”
– 당분간 황태녀는 짐이 돌볼 터이니 그렇게 알아두게.
“폐하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십자군에 포위 당한 듯한 내 저택 꼬락서니에 그 황제조자 기가 질린 듯, 황태녀를 황궁에 붙잡아두겠다고 선언했다.
현명한 판단이다. 황태녀가 우리 저택에 오려면 저 괴랄한 인파를 뚫어야 하지 않나. 설령 텔레포트를 사용해 저택 내부에 온다고 쳐도, 황태녀는 저 인파들의 기도 소리를 듣거나 경건한 자세를 보면서 놀아야 한다.
그건 쾌활하고 위풍당당한 황태녀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지. 당장 우리 저택에 있는 아이들도 타일글레헨 백작령이나 세르베트 공작령으로 대피시킬까 고민 중이니, 황태녀도 한동안은 황궁에 있는 것이 맞다.
– 이거 참. 백작도 고민이 많겠어. 짐이 알기로 3부인의 출산 예정일이 코앞일 터인데, 백작부인이 긴장하지는 않을까 염려되는군.
뒤이은 황제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게 걱정이기는 해.
마르와의 신혼여행과 리제와의 신혼여행 사이에는 제법 긴 텀이 존재했다.
마르 때는 막 태어난 메리가 아빠를 열렬히 찾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두지 못하고 냅다 국내를 떴지만, 리제 때부터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심사숙고하며 일정을 잡았으니까. 약 반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리제와 함께 발크로스 여행을 즐겼었다.
그리고 발크로스 여행 이후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리제가 둘째를 낳을 시기가 임박했다.
“처가로 가는 건 어때?”
그렇기에 아이들과 함께 쿠키를 먹고 있던 리제에게 제안했다.
저택 외부가 소란스러우니 당분간은 고요한 아티니 남작령으로 가자고. 리제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장소보다 친숙하고 편안한 장소로 가자고.
“대문 앞에서 기도만 드리고 돌아가고 있지만, 대륙 곳곳에서 몰려오고 있어서 한동안은 부산스러울 거야. 조금 잠잠해질 때까지는 처가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제도의 신도들, 수도권에 신도들, 제국의 신도들. 더 나아가 대륙의 신도들이 성지 순례를 하는 것처럼 저택으로 집결하고 있다. 신도들이 움직이는 소리만으로도 부산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다행히 자신들이 진짜 성지가 아니라 남의 집에 왔다는 걸 알기에 기도만 드리고 돌아가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한 명의 체류 시간은 짧을지언정 몰려오는 사람이 많다. 회전율이 좋은 식당처럼 끊이지 않고 붐비는 것이 현 저택의 상황.
사실 마음 같아서는 그만 오라고 하고 싶지만, 살아있는 성인이 탄생한 건 내 사례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대문 좀 찍먹하고 가겠다는 걸 통제하면 이래저래 귀찮아질 확률이 높지.
게다가 성인이라는 이름값을 활용하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자비롭고 온화한 성인’의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기도 하고.
“아티니로요?”
내 제안에 리제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들고 있던 쿠키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저야 좋기는 한데…”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 리제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리제의 표정에 깊은 고민과 갈등이 깃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타일글레헨이나 세르베트로 떠나는 상황에서 자기 혼자 아티니로 가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것처럼.
“리제 엄마, 우리랑 딴대로 가?”
“진쨔? 우리 헤애져?”
심지어 아이들도 리제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히이잉… 리제 엄마… 우리랑 가치가면 안대…?”
어느새 몇몇 아이들은 울먹거리기 시작했고, 리제의 친자식인 프리드리히는 리제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슬그머니 치맛자락을 잡았다.
실수했다. 아이들이 없는 장소에서 말했어야 했는데. 이런 분위기가 펼쳐지면 어떻게 아티니로 간다고 하겠어.
“그, 그럼! 엄마는 우리 애들이랑 같이 있을 거야!”
실제로 리제는 아이들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항복─
“다 같이 엄마 집으로 가자!”
?
“리제?”
“엄마 집에서 같이 간식도 먹고, 산책도 하고, 강에서 수영도 할까? 엄마 고향에는 큰 강이 있거든! 다 같이 놀면 좋을 거야!”
“리제야?”
폭주하는 리제를 조심스레 만류하려고 했지만, 한 번 질주한 리제는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큰일이다. 아이들의 눈빛으로 인한 죄책감, 품속의 둘째를 무사히 낳아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귀를 막은 것 같아. 이 상태의 리제는 누구도 못 말려.
‘다 데려가면 어쩌려고.’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기쁘지만, 아이들을 전부 데려가면 자동으로 다른 부인들도 합세해야 한다. 임산부인 리제 혼자 아홉이나 되는 아이를 돌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나와 리제, 모든 부인들과 아이들이 아티니 남작령으로 간다? 셋째 장인, 장모님이 얼마나 기겁을 할까. 아티니 남작령이 속한 트르반 백작령은 얼마나 뒤집어질까.
‘미안합니다.’
속으로 트르반 백작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아티니 남작령이지만, 아티니 남작령의 상위 지역인 트르반 백작령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명목상 셋째 장인어른의 주군인 트르반 백작도 버선발로 달려와 우리를 맞이해야 한다.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선물이라도 넉넉하게 챙겨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