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11)
로판 속 공무원 911화(912/945)
나름 장인어른의 명목상 주군이자 대영주에게 보내는 선물이니, 타일글레헨에서 열심히 업무를 보던 집사장을 전령으로 보냈다.
집사장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출장이라 서글프겠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선물이 본체라고 해도, 내가 직접 가는 게 아닌 이상 전령의 신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단승 백작이나 무영지 백작도 아닌 진짜배기 실세 백작을 상대로 평민이나 기사를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그렇게 현명공에게 받은 선물용 성물에 기도를 좀 하고 트르반 백작에게 보내니,
– 무릎까지 꿇으며 받았습니다. 제가 각하를 대신하여 온 대리자기는 하지만, 설마 백작이 무릎을 꿇을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얼떨떨한 표정의 집사장을 볼 수 있었다.
‘무릎을 꿇어?’
나도 집사장의 보고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일단 나와 트르반 백작은 겉으로나마 동급의 귀족이다.비록 오늘날 제국백이 일반 백작들에 비해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기는 하나, 아무튼 분류상으로는 동일한 백작이다.
그럼에도 트르반 백작은 당사자인 내가 아닌 대리인인 집사장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설령 공작의 대리인이 갔어도 귀족이 무릎을 꿇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 정도로 신실하다고?’
물론 장관 비서가 트르반 백작의 특이사항으로 신실함을 보고하기는 했다. 그러니 일반인을 아득히 초월한 신앙인일 거라 예상했었지. 게다가 밤중에 몰래 내 저택에 방문했을 정도니, 내가 접촉을 시도하면 기뻐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래도 이건 과하다. 보다 높은 작위의 귀족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족하다. 귀족이 무릎을 꿇을 때는 오직 황제와 황제의 대리인을 상대할 때뿐이거늘.
– 아무래도 저를 타일글레헨 백작의 대리인이 아닌 성 칼의 대리인으로 여긴 듯합니다.
“아.”
그러나 집사장의 첨언에 당혹감은 금방 녹아내렸다.
그러네. 귀족이 같은 귀족을 상대로 무릎 꿇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신도가 성인에게 공경을 표하는 건 충분히 가능해.
– 섬기는 분이 살아있는 성인이라 그런가 특이한 경험을 다하는군요. 자작의 몸으로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역사 이래 제가 유일할 겁니다.
이윽고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렀는지, 집사장은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을 건넸다.
동시에 절반의 진담이 느껴졌다. 집사장도 자기 주군이 살아있는 성인이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테니까.
당연히 작년의 나도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나도 교황에게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일이라서. 그것도 여차하면 무릎까지 꿇겠다는 협박도 받았지.
– 헌데 각하.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 부끄럽게도 제가 종교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여, 각하께옵서 트르반 백작에게 보낸 성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돌에 불과한데, 트르반 백작은 바로 알아보고 좋아하더군요.
“아, 그거.”
집사장의 질문에 잠시 턱을 매만졌다.
사실 나도 몰랐다. 성인이기는 하지만 신실한 편도 아니고, 애초에 현명공이 선물용으로 쓰기 딱이라며 랜덤으로 보낸 선물이라.
“강의 신을 모시던 신전의 잔해야. 종교 전쟁 때, 여명 교단이 강의 신을 섬기던 교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면서 다른 교단들보다 우위를 점했다 하더라고. 그 기념으로 보관 중이던 잔해가 성물로 승격한 거지.”
하지만 선물을 보내는 주제에 아무런 지식이 없는 건 곤란한 일. 이거 뭐냐고 현명공에게 물어보니까 남의 교단 대신전의 잔해라는 어마어마한 답변이 돌아왔었다.
– 신젼잔해라서 엄쳥마나! 아마 교단은 백깨두 넘깨 가지고잇슬껄!?
“아니, 왜 여명 교단의 신전도 아니고 남의 교단 신전을 성물로…”
– 전리품 가튼거지 머! 나라들두 전쟹애서 이기면 졍보칸땅을 나너쥬지, 월래 잇떤거 쥬지는 안찬아!
그것도 묘하게 설득력 넘치는 근거와 함께.
우리 신전을 부수고 잔해를 나눠가지는 건 불경하지만, 남의 신전을 부수고 챙기는 건 정당한 전리품 분배다. 에넨이 다른 신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증거기도 하니 마땅히 성물로 삼은 것이다.
확실히 이런 일화를 보면 여명 교단의 어마어마한 호전성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나마 종교 전쟁에서 승리하고 순한맛이 돼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호전적인 교단이 대륙의 주류 종교가 될 뻔했어. 그렇게 된다면 그 여파로 대륙인들의 평균이 바이킹 같은 전사 수준이 됐을 터.
‘바이킹이 넘쳐나는 대륙이라.’
상상만 해도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런 대륙은 존재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튼 뭐, 트르반 백작이 기뻐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 집사장도 수고 많았어.”
– 크라시우스의 가신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수고라는 말을 듣기도 민망합니다.
살며시 고개를 숙인 집사장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급히 고개를 들었다.
– 그러고 보니 트르반 백작이 각하께 직접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했습니다.
“직접?”
– 예. 하지만 지금은 부인의 출산을 앞두고 잠시 처가에 오신 것이니, 각하께서 제도로 복귀하시면 그때 오라고 말해두었습니다.
훌륭한 대처라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티니 남작령에 온 것은 저택 대문 앞에서 펼쳐진 성지 순례를 피하기 위함이지만, 동시에 출산을 앞둔 리제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 상황에서 장인어른의 상사가 찾아오면 피곤하기만 해.
하지만 출산 이후에 제도로 오는 거라면 얼마든지 맞이해줄 수 있다. 내가 먼저 트르반 백작령에 쳐들어왔고, 대리인을 보내 선물을 보냈으니 대면 정도는 해야지.
‘여차하면 트르반 백작을 수문장으로 삼는 거고.’
이 제국에 신실한 귀족이 트르반 백작뿐일 리는 없다. 트르반 백작이 나와 대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너도 나도 눈치를 보며 조금씩 모여들 것이 뻔하다.
그때 1차 거름망 역할을 수행할 수문장으로 트르반 백작을 동원하는 거다. 나한테 성물을 받은 인물이자, 장인어른이라는 접점으로 그럭저럭 연을 만들 수 있는 귀족. 도움을 받기에는 딱이지 않나.
감찰성이 공무원 칼, 북방 대영주들이 귀족 칼의 파벌이라면 트르반 백작은 성 칼의 파벌이 되는 거다.
‘성 칼의 파벌…’
내가 떠올리고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다.
성스럽고 존귀한 성인이 사사롭게 파벌을 만들다니. 살아있는 사람이 성인이 되니까 이런 일도 다 생기는구나.
뭔가 성인들 망신은 내가 다 시키고 죽을 것 같은 미래가 보인다.
도시에서 보내는 생활과 시골에서 보내는 생활은 다른 법. 비록 아티니 남작령이 개발에 개발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나, 대륙의 중심인 제도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시골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물질적 평온이 아닌 정신적 평온은 가족이 터를 잡은 시골에서 느낄 수 있다. 반드시 그냥 시골이 아닌 가족이 터를 잡은 시골이어야 한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해.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들어가면 셀프 유배 생활밖에 더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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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성 정원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장모님을 바라보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무런 기반이 없는 시골에서 생활하라고 하면 이래저래 고생만 하지만, 이미 가족이 자리 잡은 곳이라면 마음 편히 몸만 갔다가 자연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오길 잘 했어.’
다소 즉흥적인 선택이었지만 다 같이 아티니 남작령에 온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시골의 정취, 자연의 기쁨을 느끼겠나.
심지어 아티니 남작령의 개발 속도를 생각하면 몇 년 후에는 이 자연이 다소 누그러들 터. 딱 알맞은 타이밍에 놀러 왔다. 어떻게 보면 하늘이 도운 여행이야.
“사위.”
“아, 장인어른.”
막 자선 위에 올라탄 페디를 구경하던 중, 장인어른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어이쿠, 우리 페디는 사슴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원래는 옆에 있던 망아지도 자주 탑니다. 한 녀석만 계속 타면 다른 한쪽이 섭섭해하는지라, 저렇게 번갈아 가면서 타고 있지요.”
“그런가? 벌써부터 신하들의 감정을 헤아린다니. 훌륭한 제국백이 되겠어.”
장인어른의 웃음 섞인 칭찬에 나도 웃음을 흘렸다.
장인어른의 말이 옳다. 내 아들이라 하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 페디는 참 사려 깊고 리더십 있는 아이지. 저 어린 나이에 아이들의 맏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고, 사용인들의 예쁨도 듬뿍 받고 있고, 황태녀의 사랑도,
‘아.’
나도 눈을 감고 말았다. 애써 억누르고 있던 시름이 갑작스레 튀어나왔어.
“사위? 왜 그러나?”
“아, 그, 작던 페디가 어느새 저렇게 듬직해진 것을 보니, 너무 기특해서 말입니다.”
“이런. 벌써 그러면 어떡하나. 저기서 배는 더 커질 텐데.”
“하하, 그건 그렇지요.”
최대한 적당한 핑계를 대자 장인어른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장하다, 내 두뇌. 위기 속에서도 그럭저럭 제구실은 하는구나.
“고맙네, 사위.”
“예?”
“이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와줘서 말이야. 이 성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씁쓸함이 깃든 목소리인지라 이번에는 적절한 대답을 출력하지 못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리제가 큰 이후로는 저렇게 해맑은 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으나, 나이어드 가문의 비극을 알고 있기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건 리제의 언니를 말하는 거라고.
리제의 언니가 허망히 죽고 리제가 트라우마를 가졌을 때. 그때 이후로 남작성에는 아무 근심 없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지 못했겠지. 아무리 리제가 밝은 척 노력을 해도,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슬픔을 이기고자 노력했어도.
“정말 고맙네. 우리 가문에 사위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야.”
“저도 리제를 만나게 돼서 두 분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러자 장인어른은 말없이 내 어깨를 토닥이셨다.
역시 아티니 남작령에 온 건 훌륭한 선택이 맞았─
“남작 각하! 백작 각하!”
“음? 무슨 일인가?”
“아, 아가씨께서! 백작부인께서 산통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였다.
워낙 우렁찬 목소리여서 그런지,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던 장모님도 황급히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조금 방심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겪는 여덟 번째 출산이자 리제의 두 번째 출산이다. 그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이제 나는 에넨의 살아있는 성인이 되었다. 이번 출산도 리제의 고통만 제외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우리한테는 최고의 의료진이 있으니까. 무려 신들의 가호가 있으니까.
애석하게도 건방지기 짝이 없는 교만이었다.
“가, 각하. 아무래도 정밀하게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확인을, 한다고?”
“다행히 산모는 문제가 없으나, 아이의 건강에 이상이 있을 수…”
장인어른과 마법사의 대화가 이어졌지만 들리지 않았다.
수 시간에 걸친 인내 끝에 태어난 우리 막내. 허나 막내의 울음소리가 들림에도 굳게 닫혀있던 출산실의 문이 조심스레 열리더니, 막내의 건강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마법사.
‘왜?’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살아있는 성인인데. 신의 가호를 받는 사람인데,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기는 거지?
당연히 우리 아이들도 건강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