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12)
로판 속 공무원 912화(913/945)
도저히 정신을 붙잡을 수가 없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해도 손끝이 미친 듯이 떨렸다.
얼마 만일까. 대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얼마 만인 걸까. 그 녀석들이 죽은 이후로 처음인가? 이렇게 속이 타들어가는 건 그날을 제외하면 처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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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던 감정이다. 살면서 이런 고통을, 이런 비참함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어.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아무래도 아이의 심장 쪽에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장인어른께 상황을 설명 중인 마법사를 바라봤다. 남편인 내가 침묵 상태에 빠져 장인어른에게 설명 중이면서도, 내 눈치를 살피는 마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고 있다. 저 마법사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은 물론, 우리 막내의 병을 빠르게 찾은 공신이라는 건 알고 있다. 막 태어난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병인데, 어찌 그것을 사람의 책임으로 몰까.
하지만 머리로는 마법사의 무고함을 외쳐도 가슴은 뜨겁게 타올랐다. 당장이라도 마법사의 멱살을 잡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한테 화풀이를 하려고 하다니. 이보다 못난 행동도 없지.
“심, 장?”
그리고 마법사의 말에 장인어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심장인가? 다른 곳이 아니고?”
어딘가 절박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라 바닥으로 내려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이상하다. 외손녀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면 당연히 동요할 일이나, 장인어른의 반응은 단순히 걱정과 슬픔만 담겨있지 않았다. 심장이라는 단어에 기겁을 한 것처럼.
“심장…”
심지어 떨리는 손으로 기도를 하던 장모님조차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셨다.
“예. 심장이 맞습니다. 몇 번이나 확인한 것이니 확실합니다.”
마법사의 확답에 장모님이 바닥에 주저앉으셨다.
안 그래도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더욱 어두워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어여쁜 공주님으로 태어난 막내의 병.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동요.
분명 기쁨과 축하로 가득해야 할 날이 순식간에 어두침침하고 절망스러운 날로 변모했다.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아픈 거예요.”
그러한 절망 속에서 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리제에게는 막내의 병을 숨기고 싶었다. 막 출산을 겪은 산모에게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어떻게 전달할까. 출산 직후는 산모의 몸이 가장 약할 시기라 사소한 충격에도 조심해야 하는데, 어미로서 가장 충격적인 소식과 마주하면 리제까지 잘못될 수 있다.
허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출산실에 있던 마법사와 사제, 의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우리 막내를 살폈다. 문밖에서는 대표로 나선 마법사가 우리 가족들에게 한참이나 상황을 설명했지. 이건 리제가 기절하고 있던 게 아닌 이상 숨길 수 없는 일이다.
“저, 어릴 때 심장이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리제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터져 나올 것 같은 탄식을 겨우 참았다. 이 타이밍에 나까지 동요하면 리제를 다독일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겠나.
‘누구보다 고통이 클 텐데.’
스스로의 입으로 자식의 병이 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엄마는 무슨 기분일까. 자신이 어릴 때 겪었던 고통이 핏줄을 타고 자식에게 이어진 걸 본 엄마는 얼마나 참담할까.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리제의 손만 토닥였다. 내 슬픔은 리제를 위해 잠시 억눌러야 할 때다.
“죄송해요. 죄송, 해요, 오라버니…”
하지만 내 위로에도 불구하고 이미 정신이 한계에 몰렸는지, 리제는 눈물을 흘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죄송하다니. 리제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프, 프리드리히는 건강하, 잖아요. 분명 오라버니를 닮아서… 그래서 건강한 거예요. 제, 제가 병을 물려주지 않아서, 그래서…”
“리제.”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기에 단호히 리제의 말을 끊었다.
이 일은 인재가 아닌 천재다. 사람의 죄가 아닌 하늘이 내린 재앙에 가깝다.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일개 필멸자가 아닌 신들을 탓해야 돼.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리제 잘못도, 내 잘못도, 우리 막내가 태어나게 도와준 의료진 잘못도 아니야.”
리제의 손을 강하게 쥐며 강조했다. 동시에 나 스스로를 다독이듯 되뇌었다.
이건 누구의 탓도 할 일이 아니라고. 사람이 모여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할 바에는 신전으로 달려가 항의를 해야 할 일이라고.
‘망할 것들.’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에는 명예 제사장이니 은인이니 했으면서 정작 내 자식한테 이런 병을 줘? 살아있는 성인에게 복을 주지는 못할망정 재앙을 던지고?
차라리 병을 줄 거면 나한테 줬어야지.중병에 걸려도 버틸 체력이 있는 내가 아니라, 왜 저 작은 녀석한테 병을 준 건데. 울다가 지쳐서 잠든 저 아이한테 무슨 죄가 있겠어.
물론 이 또한 뒤틀린 분노이자 의미 없는 원망이다. 이 세상의 신들은 인간이 병을 가진 채 태어나게 하거나, 강력한 체력을 가지고 태어나게 할 만큼 세상만사에 깊숙이 관여할 수 없으니까. 그저 사람들의 신앙을 받으며 대륙을 배경으로 체스를 하는 존재들이니까.
그래서 영원한 푸른 하늘을 찾지 않고 속으로 삭히기만 하는 거지. 항의를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게다가 리제도 병을 이겨냈잖아. 건강하게 태어나는 게 제일이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병이라면 우리가 정성스레 돌보면 돼. 그러면 리제처럼 건강하고 활기찬 아이로 자랄 거야.”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다시 리제를 달랬다.
다행히 이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병에 걸린 건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나, 이겨낼 수 있는 병이라면 그나마 괜찮다. 당장 눈앞의 리제도 어린 시절의 병마를 이겨낸 존재지 않나.
백 번 양보해서 리제가 우리 막내에게 병을 물려준 것이라도, 정녕 리제의 영향을 받았다면 병을 이겨낼 강인함도 물려받았을 거다.
그래, 분명 그럴 거다. 병만 갖고 면역력은 없다면 저주나 마찬가지잖아. 세상이 우리 막내를 미워하는 게 아닌 이상 저주 따위는 받지 않았을 거야.
“…사위.”
“예, 장인어른.”
내 말에 장인어른이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힐다도 리제와 같은 병을 가지고 있었다네.”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나.’
장인어른이 심장이라는 단어에 동요했던 이유. 장모님이 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절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우리 막내의 병은 ‘이겨낼 수 있는 병’이 아니다.
한 명은 살았지만 한 명은 죽게 만든 지독한 병이다.
막내는 잠시 격리되었다. 친모인 리제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아주 철저하게.
솔직히 격리의 필요성과 효율성에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 막내가 면역력이 형편없는 상태도 아니고, 마법의 힘이 있다면 막내와 닿는 모든 것을 깨끗이 정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막내의 건강에 아주 사소한 도움이라도 된다면 기꺼이 격리를 택할 수 있다. 큰 효과가 없을지라도 이 격리 자체에 효능이 있다면, 의료진이 막내의 진단과 치료에 전념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우리 막내. 착하게 자라려고 평생 끼칠 걱정을 몰아서 끼치는 거지?”
정작 친부인 나는 막내가 격리된 방으로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었지만.
살아있는 성인이 아이의 건강을 위해 정성껏 기도하면 천상의 주가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기도로 건강해질 수 있다면 애초에 건강히 태어나게 해주지, 그게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행동이냐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었다. 그나마 그 말을 꺼낸 게 막내를 정성스레 보살필 사제의 말이라 참은 거지.
게다가 신이 내린 힘, 성법의 힘은 강력하다. 외상에 한해서는 즉사만 피한다면 어떤 부상도 고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성법의 힘으로 여러 번 목숨을 건졌지 않았던가.
그러니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는 건 이루지 못했어도, 신의 가호가 있다면 병을 회복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를 품게 된다.
‘크게 걱정하지는 말자.’
곤히 잠든 막내를 보며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
리제는 살았지만 리제의 언니는 죽은 반반 확률의 병. 이것도 결과만 보면 반반인 거지, 실질적으로는 언니의 병을 늦게 알아채서 생긴 참사다. 반면 우리 막내의 병은 태어나자마자 알아냈으니 잘못될 확률은 낮다.
그러니 우리 막내는 건강할 거다. 조만간 의료진들이 ‘꾸준히 치료하고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라는 결론을 내릴 거다. 우리 막내에게 예쁜 이름을 붙이는 건 그때의 기쁨으로 남겨두자.
‘동요하지… 말자.’
억지로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남편으로서, 사위로서, 아빠로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가족의 위기에 가장이 우왕좌왕하는 건 가족 전체를 불안에 빠트리는 일. 가장이 가장 역할을 못한 건 장인어른이 마법사와 대화하게 만든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래도… 이 자리에는 아무도 없잖아. 귀엽고 소중한 막내는 자고 있고, 다른 의료진들도 성인의 기도를 방해할 수 없다며 잠시 물러났잖아.
그러면 지금만큼은 동요해도 괜찮지 않을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주인.”
조금씩 뜨거워지던 눈가를 황급히 매만지며 진정시켰다.
“뭐야. 여긴 왜 왔어?”
용케 문을 열고 들어온 장생이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하여간 저 녀석. 꼴에 성수 아니랄까 봐 덩치는 작은 주제에 문은 용케도 열고 다닌다. 하마터면 저 녀석한테 추한 모습을 보일 뻔했어.
“아니, 그보다 어떻게 온 거야? 복도에 사람들이 안 막았어?”
“다들 약초를 구해야 한다느니, 다른 마법사와 사제들도 불러야 한다느니 정신이 없더군. 몰래 잠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우리 아이들을 상대로 기른 은밀성. 설마 그걸 이런 곳에서 쓸 줄은 몰랐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시 몰래 나가. 여기 있어봤자 할 것도 없어.”
내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장생이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 아이가 새로운 작은 주인인가.”
그러고는 요람에 잠든 막내를 올려다봤다.
“과연. 죽음의 기운이 보이는군.”
“이 개새─”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욕설에 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자고 있는 막내가 깨면 곤란하기도 하고, 어느새 장생이가 요람 위로 도약해버려서 차마 건드릴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과거의 이름을 잃었다지만, 감히 주인 없이 떠도는 부스러기 따위가 내 가족을 해하려 하는가.”
또한 요람 위에 올라선 장생이의 기세가 평소와 다르기도 했다.
“나는 시작이자 끝이고, 생명이자 죽음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의 계기이자 완결일지니. 비록 과거를 잃었으되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뜬구름 잡는 말을 내뱉는 장생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죽음을 놓았으나 생명을 받았다. 생명을 칭하되 죽음과 멀어지지는 않았다. 작은 생명아, 너는 아직 그 진리를 알지 못한다.”
장생이의 머리가 점점 막내에게 기울었다.
“나의 터전에 내 허락 없는 죽음은 없나니. 너는 장생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