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15)
로판 속 공무원 915화(916/945)
아티니 남작령에 갈 때는 리제의 품속에 있던 플로렌스였지만, 저택으로 복귀할 때는 품에 안긴 채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주 정도 아티니 남작령에서 시간을 보냈음에도 저택 앞 성지 순례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탈주했을 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아.
‘더 버틸 걸 그랬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못된 생각을 털어냈다.
우리 가족의 평온을 위해서라면 아티니 남작령에서 농성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장인어른과 장모님, 더 나아가 나이어드 남작가의 사용인들을 생각한다면 과도한 장기 숙박은 지양해야 한다.플로렌스의 탄생으로 인해 우리 가족이 아티니 남작령에서 숙박 중이라는 사실이 퍼지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성지 순례객들은 ‘성인의 저택’이라는 점 때문에 모이는 것이었고, 내가 매일 같은 시간에 저택으로 텔레포트를 하여 손을 흔들어주니 아티니 남작령으로 달려오지는 않았다. 반면 애석하게도, 귀족들은 성지 순례객들과 다른 패턴을 선보였다.
‘귀족들은 손님으로 방문할 자격이 있지.’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신도나 사제들은 감히 살아있는 성인과 만나고자 할 수 없으나, 제국의 귀족들은 나에게 ‘언제 한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라는 약속을 신청할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며칠 전부터는 아티니 남작령으로 서신이 날아오더라.
다행히 귀족들도 염치와 이성, 눈치가 있는 사람들이기에 내가 저택으로 복귀한 후를 전제로 서신을 보냈으나, 아티니 남작령 체류가 길어지면 다짜고짜 아티니에 찾아올 수도 있다. 그건 곤란한 일이지.
그래서 아직 순례객들로 북적거리는 저택으로 복귀했다. 리제도 출산을 마친 상태니, 이 정도 소란스러움은 괜찮을 거라는 믿음과 함께.
“그, 혹시 타일글레헨에서 작게 예배를 드릴 수는 없겠니?”
“네?”
다만 저택으로 복귀하자마자 깜짝 이벤트가 반겨줄 줄은 몰랐다.
“예배요?”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어머니께 되물었다.
새로운 손녀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저택으로 달려오신 어머니, 플로렌스를 보고 활짝 미소를 지었던 어머니를 향해.
‘요즘 기가 허해졌나.’
아무래도 플로렌스의 병으로 마음고생을 했던 여파가 뒤늦게 찾아온 모양이다.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어머니 말조차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면 많이 허해진 모양이야.
어머니. 제가 잘못 들은 게 맞겠죠? 저희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훈훈한 3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잖아요. 손녀를 보고 기뻐하는 할머니와 그 광경에 미소 짓는 아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광경이었잖아요.
그런데 그 훈훈함에 예배를 끼얹다니. 대체 무슨 일이야.
“그게…”
어머니도 내 복잡한 심정을 읽으신 듯,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머뭇거리셨다.
아들의 심정을 헤아려주는 감사한 행동. 그러나 저 행동은 내가 들은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무엇보다도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근래 제국백 가문의 안주인들에게서 서신이 오고 있단다. 설마 살면서 생전 시성이라는 경이로운 업적을 보게 될 줄은 몰랐고, 그 대상이 제국백일 줄은 더더욱 물랐다더구나.”
“저도 제가 성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진심 가득한 말에 어머니가 더욱 움츠러드셨다.
아들이 복자로 시복된 것도 경이로운 일인데, 무려 성인이 되는 기적이 벌어졌다. 어머니로서 자랑스럽고 놀랍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허나 자랑스럽고도 놀라운 생전 시성으로 인해 아들이 고통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그래. 당사자조차 예상하지 못한 경사라, 다른 사람들은 더욱 놀랍고 자랑스럽지 않겠니? 그래서 성인이 참석한 예배는 얼마나 고귀하고 성스러울까… 궁금하다는 서신이 조금씩 오고 있단다…”
말이 길어질수록 어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안타까운 광경이다. 아들의 눈치를 살피는 어머니라. 이 얼마나 패륜적이고 통탄스러운 광경이란 말인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어머니의 행동은 실로 타당했다. 가족에게 ‘교회 같이 갈래?’ 라는 말을 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거늘, 같이 가는 수준을 넘어 교회의 아이돌이 되라고 한다. 이건 말을 꺼내는 어머니도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어.
‘오죽하셨으면.’
그래도 어머니도 얼마나 시달리셨기에 저런 말을 꺼내시겠나. 저 말을 꺼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짐작할 수 있기에 어머니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제국백은 권위와 권력과 별개로 제국 귀족 사회에서도 다소 붕 뜬 감이 없잖아 있는지라, 서른밖에 없는 제국백 가문끼리 으쌰 으쌰 우애를 쌓는 경우가 많다. 당장 아버지도 어린 시절부터 우애를 쌓은 제국백 친우들이 많지 않던가.
이는 제국백 가문의 살림을 담당하는 부인들도 다르지 않다. 비록 현 크라시우스 가문의 안주인은 마르지만, 긴 시간 동안 어머니가 쌓아온 인맥은 여전히 굳건하지. 덕분에 어머니 쪽으로 제국백 가문 안주인들의 연락이 쏟아진 모양이다.
‘곤란하네 이거.’
나도 모르게 턱을 매만지며 고심에 빠졌다.
제국백은 황제의 직속 봉신으로서 황실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요, 적을 처단하는 강력한 검이다. 이는 제국에 우환이 생길 때마다 제국백들이 앞장서서 종군한다는 뜻. 실제로 지난 두 차례의 북방 전쟁과 약 30년 전의 동방 전쟁에서 제국백들의 참전율은 상당했다.
그리고 남편, 혹은 아버지, 혹은 아들이 전쟁에 나서면 남겨진 여인들은 기도 메타에 돌입하게 된다. 부디 우리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신께서 우리 가족을 보우해 달라고.
그런데 같은 제국백 가문에서 성인이 나왔어? 그것도 여러 번 종군 경험이 있고, 꼬장꼬장한 노인이 아닌 40대 어머니를 둔 젊은이다?
‘나였어도 부탁했겠네.’
철저히 제3자의 시선에서 보고 나니 안주인들의 부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나였어도 은근슬쩍 부탁했을 거야.
“제가 과분하게도 성인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만, 신앙심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예배 절차에 대해서도 모르고요. 그래도 상관없다면 함께 기도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짧은 고민 끝에 어머니의 말을 조건부 승낙했다.
내가 제국의 실세로서 불로불사할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페디가 나를 대신하여 제국백이 되어야 한다. 좋든 싫든 크라시우스 가문은 다른 제국백 가문과의 우애에 신경 써야 하는 입장이다.
헌데 성인으로 시성 되자마자 제국백 가문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건 외교적 참사나 마찬가지. 크라시우스 가문이 제국백 가문이 아니라 황가여도 있을 수 없는 만행이다.
‘후손들한테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나는 성인이지만 ‘살아있는’ 성인이다. 죽어서 공경만 받으면 되는 존재가 아닌, 언행 하나하나를 주목받는 성인이지. 오히려 시성 이전보다 언행에 주의해야 한다.
그렇기에 다소 얼떨떨한 부탁을 수용했다. 이 수용으로 인해 제국백 가문들과의 우호도가 상승한다면 그럭저럭 남는 장사니까.
“괜찮겠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단다. 내가 다른 부인들에게도 잘 설명할 수 있어.”
“괜찮습니다. 어차피 평생 귀족들을 만나지 않고 지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럴 거면 제국백 동포들을 먼저 만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디 산골짜기에 은거하거나 외딴 교회에서 일생을 보낼 생각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귀족들의 무수한 악수 요청에 응해야 할 터.
그럴 거면 트르반 백작을 내 수문장으로 내정한 것처럼 제국백들을 포섭해 방패막이로 쓰는 것이 편하다. 어디 나한테 접근하려면 트르반 백작과 제국백부터 뚫어보라지.
“고맙구나.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덕분에 이 어미도 면목이 서겠어.”
그제야 어머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셨다.
제국백 가문들의 부탁과 아들을 향한 미안함. 그 사이에 껴서 우왕좌왕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럼 중요한 얘기도 끝났으니.”
그런 어머니를 보다가 요람에 있던 플로렌스를 안아올렸다.
“다시 플로렌스하고 놀아주시죠. 우리 막내도 할머니 품에 있으면 좋아할 겁니다.”
이윽고 플로렌스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다소 우울한 분위기는 거대한 귀여움으로 풀면 그만. 어머니의 시름은 플로렌스로 날려버리자.
“아- 우-”
플로렌스도 할머니의 품에 안기자 작게 꼬물거리기만 할 뿐, 꺼려 하거나 칭얼거리지 않았다.
역시 아이들은 자신에게 무해하고 착한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야. 할머니 품이니 순하기 짝이 없잖아.
***
낚시를 하던 중, 옆에 있던 게오르크가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헌금 받을 생각 있나?”
“뭐?”
너무도 기이한 말이라 절로 반문이 나왔다.
헌금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이놈이 백수로 지내다 보니 정신이 나간 건가?
“조만간 자네 아드님인 성 칼께서 제국백 부인들과 함께 예배를 올린다고 하더군. 제국백 가문의 우애는 물론, 마음의 평화를 위해 성인께서 헌신하는 거지 않나. 전직 제국백으로서 성인을 위해 헌금이라도 내야지.”
낄낄거리는 게오르크를 보며 낚싯대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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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라.’
처음 듣는 얘기다. 오늘 부인이 새로 태어난 손녀를 보러 제도로 가기는 했는데, 설마 그때 예배 얘기를 꺼낸 건가?
실로 어마어마한 추진력이다. 부인이 제도로 간 것이 불과 2시간 전이거늘. 그사이에 제국백 가문의 회합 아닌 회합을 이루어냈다. 아무리 제국백 당사자가 아닌 부인들의 모임이라지만 경이로운 일.
‘이놈은 그걸 어떻게.’
더욱 놀라운 건 부인의 남편이자 칼의 아비인 나조차 모르는 걸, 게오르크 이놈이 벌써 알고 있다는 것이다.
“흐흐, 은퇴 생활은 내가 자네보다 길어. 여기저기 눈과 귀가 뻗어있지.”
내 눈에서 의문을 읽은 듯, 게오르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은퇴 기간 동안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기만 했다는 걸 잘도 포장해서 말하는군.”
“그게 귀족의 소양 아니겠나.”
맞는 말인지라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보잘것없는 문장이라도 보기 좋게 꾸미는 것이 귀족의 도리지.
“아무튼 헌금 받을 생각 없다면 나도 예배에 좀 끼워주게. 요즘 할 것도 없는데, 성인의 예배나 들으면 죽어서 천국 갈 것 같아.”
“남의 아들을 천국 가는 열쇠로 취급하는 건가?”
“어허! 성 칼께서는 자네 아들이기 이전에 모두의 성인이시다!”
순간 이놈을 호수에 밀어 넣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