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16)
로판 속 공무원 916화(917/945)
졸지에 성 칼의 기습 예배가 결정되었다.
물론 예배라고 해봤자 거창하게 진행할 생각은 없다. 적당히 모여서 기도나 드리고, 찬송가도 좀 부르고, 성서도 읽다 보면 그게 예배지 않겠나. 전문가 없이 지인들끼리 모인 소규모 예배라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애초에 제국백 가문의 안주인들도 살아있는 성인을 보고 싶은 거지,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고 싶은 건 아닐 테니까. 어차피 웅장하고 경건한 예배는 영지 내에 있는 교회에 가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어. 중요한 건 성인의 참석 여부야.
‘토템이 된 기분이다.’
복잡한 심정으로 십자가 형태의 목걸이를 매만졌다.
감찰성에서는 출근 안 하는 장관으로서 토템 비슷한 존재로 지냈는데, 이제는 살아있는 성인으로서 진짜 종교 토템이 되었다. 교회 근처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신도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토템이.
어째 내 팔자는 평생 토템으로 지낼 팔자인 것 같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이러고 지내는 걸 보면 확실해.
‘토템도 은퇴가 가능하나?’
순간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안 그래도 은퇴 난이도가 하늘에 닿은 나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 불가능한 토템적 성향마저 갖추고 있다니, 이제 은퇴라는 단어 자체가 사전에서 지워진 것 같은데.
일이 이렇게 되면 늙어서 골골거리는 상황이 찾아와도 ‘존재 자체로도 큰 도움이 되니 관직만 유지해라.’ 같은 명령을 들을 수도 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그리 어렵냐고 은퇴 신청을 기각당할 수도 있고.
상당히 그럴듯한 미래라 십자가를 쥔 손이 떨렸다. 내가 당한 건 시성이 아니라 낙인이 아니었나 싶다.
‘교회를 불태우면 시성도 취소되겠지?’
잠깐 정신 나간 생각이 치솟았지만 금방 털어냈다.
살아있는 성인이 부담스럽다고 살아있는 아펠스가 되는 건 미친 짓이지. 난 말년의 아펠스와 사왕처럼 다섯 번의 종소리를 당하고 싶지 않다.
…
‘사왕이라.’
사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요람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플로렌스와 그 옆에서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리시안느. 마치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게 준비 중인 하인을 보는 것 같았다.
“한 번 자면 몇 시간은 자니까 쉬고 있어. 옆에서 기다리지 말고.”
“아니요! 자는 도중에도 불편한 점이 생길 수 있으니! 옆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너무 지극정성인 광경이라 슬쩍 휴식을 종용해도 리시안느의 태도는 굳건했다.
얘가 아티니 남작령에 있을 때부터 이러기는 했다. 정확히는 장생이가 플로렌스의 병을 치료한 이후부터 이랬지. 마치 장생이의 축복을 받은 플로렌스를 성녀로 여기는 것처럼.
‘넌 사도잖아.’
허나 내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장생이는 리시안느를 사도라고 불렀다. 리시안느도 자신이 장생이의 사도라며 어깨를 으쓱였고. 물론 우리 아이들 입장에서는 사도고 나발이고 귀여운 인형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장생이의 개인 비서나 마찬가지인 사도가… 성녀를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모실 필요가 있나? 친밀감을 느낄지언정 상전을 대하듯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일단 여명 교단에서는 사도의 존재가 교황, 성자, 성녀, 성인 등보다 위다. 여명 교단식으로 해석하면 플로렌스보다 리시안느가 상급자인 거다.
‘장생이 쪽 교단은 여명 교단의 체계랑 달랐나?’
그렇다면 그럭저럭 이해할 수는 있다. 확실히 모든 교단이 같은 체계라는 법은 없으니.
“우으…”
“아.”
“보세요! 이렇게 언제 깨어나실지 모르잖아요!”
때마침 플로렌스가 꼬물거리며 눈을 떴다.
황급히 요람 위로 기어 올라가 플로렌스를 다독이는 리시안느를 보니, 차마 ‘네가 큰 소리를 내지만 않았으면 애초에 깨지도 않았다.’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쟤도 나름대로 호의를 가진 채 정성으로 플로렌스를 돌보는 중이니까. 의욕이 넘쳐서 한 실수를 맹렬히 지적할 수는 없지.
“우리 아가씨, 다시 코오- 잘까요?”
“우…”
게다가 플로렌스도 리시안느에게 미묘한 친밀감을 느끼는지, 다른 사람이 다독일 때보다 리시안느가 다독일 때 더 효과가 좋았다.
아무래도 장생이의 기운 때문인 것 같다. 아직 어리지만 어떤 기운이 자신을 살렸고, 그 기운이 어디에 깃든 건지 느끼는 모양이야.
‘너도 토템이구나.’
플로렌스보다도 작은 주제에 열심히 이불을 토닥이는 리시안느를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너는 우리 막내의 토템이 된 거야. 옆에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토템.
그래도 플로렌스만 일방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관계가 아닌, 리시안느도 좋아서 이루어지는 관계니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오.’
얼마 지나지 않아 플로렌스의 눈이 다시 감겼다.
대단하다 리시안느. 앞으로 네가 우리 플로렌스의 미니 유모다.
성 칼배 예배가 결정되고 사흘 후. 구체적인 예배 날짜와 장소까지 정해졌다.
아무리 먼저 요청받은 것이라지만 생각 이상으로 진행 속도가 빨랐다. 백수가 아닌 이상 귀족들은 모이고 싶다고 즉석으로 모일 수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조율을 거쳐야 겨우 한자리에 모이는 법이니까. 이 정도면 내가 수락을 하기 전부터 모일 준비를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왕 진행하기로 한 예배니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면 오히려 좋다. 괜히 질질 끌기만 하면 귀찮기만 하지.
“옵빠!”
“우리 테레사, 잘 지냈어?”
“웅!”
그렇게 타일글레헨 백작성이 제국백 가문 안주인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분주한 사이, 나도 미리 백작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아이들의 아빠이자 소중한 여동생의 오빠기도 하니까. 여유가 생길 때마다 여동생하고 놀아주는 건 오빠로서 당연한 행동이지.
“뿡요도 안녕!”
“응. 안녕.”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 테레사는 내 옆에 있던 풍요에게도 양팔을 휘휘 흔들었다.
그러고는 복슬복슬한 풍요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히히, 뿡요 부드러워서 죠아!”
양털에 파묻힌 테레사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풍요 털이 많이 부드럽기는 하지.
저거 밀어다가 옷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털은 다시 자라잖아.
“주, 주인? 왜 그런 눈으로…”
“그냥. 테레사랑 잘 놀아주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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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빛에서 욕망을 읽어냈는지, 불안한 듯 몸을 떠는 풍요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런데 내가 뭐 꼬리나 발굽을 자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털 정도는 밀어도 괜찮지 않나? 얘가 탈모가 있어서 털의 유무에 민감한 편도 아니잖아.
그러나 당사자가 싫어하는 걸 강행한다면 깊은 원망을 살 터. 대충 수염을 공들여서 기르는 중년 남성이라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어차피 자라는 털’이 아니라 ‘애지중지하는 털’로 이해할 수 있으니.
– 아, 은인 인간! 은인 인간이다!
– 은인 인간! 은인 인간!
‘아.’
테레사가 풍요의 위로 올라타자 복도 너머에서 형형색색의 정령들이 스멀스멀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째 볼 때마다 숫자, 종류, 덩치가 커지는 것 같다. 얘네가 세계수 근처에서만 놀다가 다른 곳으로 놀러 올 수 있으니, 아주 거침없이 오는구나.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근처랑 국립묘지도 정령들의 놀이터가 다 됐다고 했지. 다행히 정령은 유해생물이나 해충이 아닌 상서로운 존재로 여겨지기에 다들 반기고 있지만.
– 은인 인간, 어서 와!
– 반가워! 자주 와!
“너희가 우리 집으로 오면 되지 않아?”
– 은인 인간 집! 인기 많아! 순서 정해서 가고 있어!
– 맞아! 우리 차례! 멀었어!
“그렇구나.”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라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냥 정령들이 가고 싶으면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하는 줄 알았는데, 나름 질서와 규칙이 있었다.
하긴. 정말로 막 넘어오는 중이라면 우리 저택도, 타일글레헨 백작성도 난리가 났겠지. 어느 정도 선은 조절해야 정령과 인간이 공존하지 않겠나.
– 그치만 여기도 좋아! 넓은 곳도! 돌 많은 곳도 좋아!
– 맞아! 다 좋아! 세계수도 좋지만 다른 곳도 좋아!
재잘재잘 떠들던 정령들은 어느새 내 어깨에 착륙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몇몇은 테레사에게 착륙하며 테레사의 질투를 조기에 차단했다.
‘현명하네.’
덕분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얘네 우리 성에 자주 놀러 온 애들이기는 하구나. 테레사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
“각하!”
“아, 집사장.”
허나 정령들의 수다는 급하게 달려온 집사장의 등장으로 인해 강제 종료되었다.
아직 어른들하고는 낯을 가리는 편인지, 집사장이 나타나자 정령들이 자연스레 날아갔으니까.
“미리 각하를 맞이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일하느라 바쁜 건데 뭘. 신경 쓸 필요 없어.”
빠르게 고개를 숙이는 집사장에게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처리해야 할 영지 업무를 대신 수행하고 있는 집사장이다. 그런 집사장이 일하느라 늦은 건데, 그걸로 언짢아하면 미친놈 아니겠나.
솔직히 집사장에게 염치없는 놈이라고 욕을 먹으면 할 말이 없지만 미친놈이 될 생각은 없다.
***
테레사 아가씨와 나란히 걷는 각하를 보니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와서, 막냇동생을 봐서 웃고 있는 각하다. 얼마 전에는 기념비적인 열 번째 자식까지 봐서 기쁨이 극에 이르렀을 각하다.
그런 각하의 행복을 방해할 만한 소식을, 과연 보고하는 것이 옳은가?
물론 보고 자체는 당연히 해야 한다. 그래도 지금보다 좋은 시기에 할 방법은 없을까?
‘없다.’
몇 번이나 머리를 굴렸음에도 결론은 하나였다.
이건 시기를 따져야 하는 보고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빨리 말해야 하는 보고다. 내 이성은 그렇게 외치고 있다. 타일글레헨 백작령의 집사장으로서 쌓아온 경험이 맹렬히 울부짖고 있어.
“각하.”
그렇기에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마침 테레사 아가씨에게 초콜릿을 건네준 각하께서 나에게 시선을 돌리셨다.
“이번 예배 말입니다만.”
아주 잠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었고,
“아무래도 각하께옵서 성인이 되신 이후로 처음 다른 귀족들과 모이는 일정이기도 하고, 제국백 가문의 안주인들이 집결하는 자리라─ 소문이 다소 빠르게 퍼졌습니다.”
“그 정도야 감수해야지. 아티니에 다녀온 걸 제외하면 첫 사교 활동이니까.”
“황후 폐하께서도 예배에 참석할 수 있겠느냐고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각하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상하다. 분명 내 잘못이 아님에도 송구스럽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