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17)
로판 속 공무원 917화(918/945)
새삼스럽지만 황제와 제국백의 관계는 끈끈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제국 건국 이래로 제국백은 황제의 직속 봉신이자 검이며, 황실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로 활약했다. 이는 에이만카 대제 시절부터 이어진 전통이었고, 에이만카 2세 시절에 공식화된 관계지. 단순한 봉신 관계보다는 운명 공동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관계는 제국 건국 직후, ‘급격히 불어난 영토 및 그와 비례해 늘어난 세력가들을 통제하느라 벅찼던 황제’와 ‘새롭게 작위를 받거나 승작하여 뒷배가 없는 귀족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발생한 일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암군 시절에도 제국백들은 황가를 수호했지.’
무려 리브노만 직계의 흉흉한 암군 라인 시절에도 손절하지 않은 두터운 관계. 이 어마어마한 충성심 입증으로 인해 의심 많던 상황조차 제국백들에게는 유한 모습을 보였다. 제국백들이 황실에게 헌신하는 만큼, 황실도 제국백 가문은 자비롭게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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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제국백 안주인들의 모임에 ‘제국백들의 주인’인 황실의 안주인이 강림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제국백 가문의 일은 황실의 일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고, 제국백 안주인들의 기도 좀 살려주는 행위. 일석이조 아니던가.
이는 상황의 재위 기간에도 이루어진 공존이었다. 그 애실론 가문 출신 황후마저 제국백 가문의 안주인들을 살뜰히 챙겼을 정도로.
정작 가문의 주인인 제국백들은 황후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황제에게만 충성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 명확한 충성 덕에 상황이 제국백들을 더 아낀 것 같기는 해.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다.’
아무튼 황후의 강림이 당연한 일임에도 잠깐 당황한 이유는 단순했다.
현 황제의 황태자 책봉 이후로 상황 시절의 황후는 어떠한 대외 활동도 하지 못했으니까. 현 황제 즉위 이후로는 제국백들이 단체로 모임을 가진 적이 없어서 황후가 올 일이 없었으니까. 거의 10년 가까이 없었던 일이 생겼으니 동요할 수밖에.
어떻게 보면 현 황후와 제국백 안주인들의 공식적 회합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그 기념비적인 회합을 이끌어 낸 계기가 됐어.
‘토템 맞구나.’
점점 내 정체성이 짙어지고 있다. 이건 남이 부정해도 나 자신이 스스로를 토템이라고 여겨야 할 단계가 아닐까.
하긴. 성 칼이면 인간이 아니라 토템이 맞지. 어떻게 사람 이름이 성 칼이야.
“황후 폐하께옵선 과한 의전보다는 진심 어린 환영을 반기시는 분이지. 준비를 소홀히 하라는 건 아니지만, 딱 원칙대로만 준비하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잠시 동요했던 마음을 가다듬고 집사장에게 답변했다.
말로는 예배에 참석할 수 있겠느냐는 문의였으나, 그것이 참석하겠다는 통보나 마찬가지라는 건 나도 알고 집사장도 알고 있다. 이 세상 어느 귀족이 황후께서 강림하신다는데 ‘아뇨. 오시면 안 되는데요.’ 같은 말을 하겠나.
그렇기에 황후가 오는 걸 전제로 두되 너무 과도하게 준비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황후의 성품은 공작가 출신치고는 소탈하며, 황후라는 직책을 생각하면 더더욱 너그러운 편이니.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 황후 폐하께서는 제국백 가문의 부인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신도로서 오시는 걸 텐데, 과하게 맞이하는 건 오히려 곤란해. ”
같은 신도로 오면 그나마 편하게 대할 수 있으나, 화려하게 대접하면 신도가 아닌 명확한 상급자로 대해야 한다는 말. 그 설명에 집사장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납득하지 못했어도 상관없다. 현재 제국에서 황후의 가족인 뉘렌 공작가, 황실을 제외하면 나와 에리가 황후와 가장 가까운 존재다. 전문가가 그렇다는데 집사장이 하극상까지 하며 난색을 표할 필요는 없다.
“아, 그리고 각하.”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집사장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면 황태녀 전하께서도 같이 오신다고 합니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걸음이 멈췄다.
***
백작이 타일글레헨 백작성에서 예배를 진행한다고 한다.
‘예배는 무슨.’
몇 년 동안 백작을 가까이서 구경한 결과, 딱히 신앙심이 투철한 편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주제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조금 우습기는 하다.
그래도 살아있는 성인이 우호 관계를 유지 중인 귀족가를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건 당연한 일. 웃긴 것과 별개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황후가 백작이 진행하는 예배에 참석한다고 한다.
‘황후도 제국백 가문과 우애를 쌓을 때가 됐지.’
이 또한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용납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권장할 만한 사안이다.
제국백들은 황제의 심복이다. 이들에 대한 충성은 황제인 내가 이끌어낼 수 있지만, 사교계에서 활약할 안주인들은 다르다. 사교계와 귀부인들의 전장은 황제인 나조차 쉽게 제어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기에.
그렇다고 안주인들에 대한 접촉을 소홀히 할 수도 없다. 괜히 안주인이 안’주인’이라 불리겠나. 가문 내부에서는 주인에 준하는 입지와 권한이 있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하여, 황후가 제국백 가문 안주인들의 회합에 발을 들이는 건 기꺼운 일이나.
“황후. 지금, 뭐라고 하였소?”
“황태녀도 같이 갈 생각입니다. 황태녀는 훗날 제국백들을 이끌어 가야 할 존재고, 가문의 안주인들과 마음이 통할 아이 아닙니까. 그러니 어릴 때부터 자주 보는 게 좋겠지요.”
황후의 말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황태녀가 내 뒤를 이어 에이만카 18세가 된다면 황제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제국백 가문을 휘어잡아야 한다. 존귀한 황제로서 제국백 당사자들을 이끌고, 여성으로서 안주인들과 소통해야 한다. 이는 국서가 있어도 같은 여성인 황태녀만이…
“그르르륵…”
“폐하. 흉합니다.”
국서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나도 안다. 내 모습이 흉하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황태녀의 미래, 제국백 가문, 백작, 국서라는 단어가 결합되니 절로 속이 끓어오르는 걸 어떡하나.
‘조금은 가라앉은 줄 알았는데.’
백작이 교국으로 도피하여 시성을 받는 동안, 백작의 저택 앞으로 모인 인파를 피해 처가에 있는 동안 그럭저럭 분노가 가라앉은 줄 알았다. 어린 황태녀가 내 품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과잉 반응을 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는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분노했던 거였다. 이성과 분노가 공존할 수 있는 단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황태녀가 백작과 접촉한다는 사실에, 황태녀가 페디와 만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다시금 머리가 뜨거워지는 걸 보면 확실하다.
“폐하.”
“말, 하시오, 황후.”
“황태녀가 동생들을 못 본 지도 제법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까지는 백작이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갔다는 말로 다독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막을 수 없습니다.”
황후의 말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백작이 떠나있는 동안 내 분노가 일시적으로 가라앉았으나, 이는 황태녀가 백작의 저택에 놀러 가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행히 착하고 착한 황태녀기에 나와 황후의 다독임에 수긍하기는 했다. 곧 백작이 돌아오고, 페디를 비롯한 동생들과 놀 수 있다는 말에 얌전히 황궁에서 황자, 황녀와 놀았지.
그러나 황후의 말처럼 이제는 한계다. 더 이상 황태녀를 황궁에 묶어두는 건 불가능할 수준에 이르렀어.
“폐하. 황태녀의 원망과 미움을 받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그건.”
“만약 그걸 각오하셨더라도, 그렇게 해서 얻는 건 무엇인지요.”
도저히 반론할 수 없는 지적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 상황이 밉다. 황태녀를 위험한 곳으로 보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미워.
“…황후. 나도 같이 예배에─”
“폐하.”
“미안하오. 실언을 했소.”
미소를 지었으나 단호히 고개를 젓는 황후의 모습에 단념했다.
‘대제시여.’
이윽고 속으로 대제께 기도를 올렸다.
대제시여. 위대한 제국의 시조시여. 상대가 에넨의 성인이기에 대제께 부탁드립니다.
부디 당신의 말예를 보우하소서. 훗날 제국을 이끌어 갈 우리 딸이 무사할 수 있도록 보우하소서.
제발 여러 의미로 무사할 수 있도록.
***
제국백 가문의 현직 안주인, 혹은 대부인들이 하나둘 타일글레헨 백작성으로 모였다.
“어서 오십시오. 귀한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현 타일글레헨 백작으로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직접 응대했다.
내가 작위 귀족이기는 하나 지금 오는 손님들은 나와 동급인 귀족들의 부인, 혹은 모친이다. 편히 앉아서 맞이하기에는 부담이 좀 크지. 애초에 나는 제국백 중에서 막내 라인이기도 하고.
‘에리히도 부를 걸 그랬나.’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제국의회에서 제국백들과 우정을 쌓는 건 에리히인데, 그냥 에리히한테 응대를 맡길 걸 그랬나? 나는 그냥 예배만 드리고. 제법 괜찮은 발상 같은데.
좋아.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에리히부터 부르자. 형을 대리한다면 이런 것도 대신하는 게 옳지, 아무렴.
“귀한 걸음이라니요. 저야말로 귀한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인데요.”
“하하, 이거 부인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예배를 해야겠군요.”
그 와중에 모르고아 가문의 부인은 내 환대에 마주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목례를 했다.
민망하다. 차라리 아예 연이 없는 귀족들이 이러면 모를까, 제국백 가문끼리는 그럭저럭 왕래를 하는 편이다. 사교계의 히키코모리이자 환상의 포켓몬인 나조차 제국백 가문의 주요 인물이라면 안면을 텄다.
몇 년 전까지는 내가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하던 사람들이 나한테 상호 존대를 넘어 공경을 표하는 상황. 아마 평생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겠지.
‘아.’
그렇게 모르고아 가문의 부인을 안으로 들여보낸 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익숙한 인형이 보여 침통히 눈을 감았다.
찬란한 은발을 지닌 두 모녀. 서로 손을 잡고 사이좋게 걸어오는 모녀. 그 뒤를 따르는 적지 않은 숫자의 시녀들.
‘왔구나.’
솔직히 황제가 막아주었으면 했던 손님이 찾아오고 말았다.
‘무능한 놈.’
내가 황후가 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제국백 가문의 행사니 황후가 오는 걸 두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
그래도 황태녀가 오는 건 막을 수 있었잖아. 아비로서 딸하고 열심히 놀아주면 가능했잖아.
‘무능한 아비.’
이 십 남매의 아비는 삼 남매 아비에게 실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