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18)
로판 속 공무원 918화(919/945)
두 모녀가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황태녀의 나이도 어느덧 6살. 나는 황태녀가 막 태어났을 때부터,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을 때부터 봐왔으니 황태녀의 6살 인생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만큼 황태녀와 놀아준 적도 많고, 이렇게 황태녀를 맞이한 적도 많다. 새삼스레 긴장할 것도 없지.
내가 비록 대부지만 아비는 아비. 이 세상 어느 아비가 딸이 놀러 오는데 두려워하겠는가.
‘여기 있네.’
놀랍게도 그 어느 아비가 나다. 황태녀가 오는 것이 이토록 두려울 수가 없어.
황태녀가 페디에게 심상치 않은 감정을 품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최대한 둘의 만남을 피해왔다. 처음에는 약간 의도한 것도 있으나, 어느 순간부터 시성식이나 아티니 원정 등이 겹치며 내 계획보다 길게 둘의 만남을 차단하게 됐다.
실로 곤란한 일이었다. 적절한 거리 두기는 감정을 식게 만드나, 과도한 억압은 도리어 뜨겁게 타오르는 법. 괜히 밥을 지을 때도 공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겠냐고.
‘만약 오늘도 불발됐다면.’
뒤늦게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황제를 무능한 아비라고 욕했지만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황후가 ‘페디의 아빠’인 나를 보러 가는데 황태녀는 황궁에 남는다? 황태녀가 분노와 설움으로 가득 찬 오열을 쏟아냈을 터.
미안하다, 누렁이. 너도 너 나름대로 가불기에 걸린 상태였구나.
그래도 무능하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정말 유능했으면 가불기가 올 상황을 안 만들었어.
‘부르길 잘 했다.’
이윽고 타일글레헨 백작성으로 급히 호출한 페디를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가 황태녀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페디와 티티를 급히 성으로 불렀다. 황태녀는 페디를 볼 생각에 희희낙락하며 올 텐데, 작고 귀여운 페디 대신 크고 안 귀여운 대부만 덩그러니 있는 상황. 황태녀 입장에서는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지.
뭔가 아들을 도구로 써먹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황태녀의 분노보다는 페디를 조금 귀찮게 하는 편이 훨씬 이로워…
‘이게 맞는 건가.’
안도감에 이어 착잡함이 몰려왔다. 황제의 분노를 생각하면 페디와 황태녀를 분리해야 하지만, 정작 과도하게 분리하면 오열하는 황태녀가 황제마저 뒤엎는 재앙이 된다. 이 무슨 끔찍한 양자택일이란 말인가.
“때부!”
그렇게 씁쓸히 황태녀를 보고 있으니, 코앞까지 다가온 황태녀가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때부! 오랜만이야! 놀러갓서 따면서?”
“예? 아, 예. 그렇습니다.”
“나만 빼고 치사해! 때부가 업써서 동생들두 못만낫서!”
팔을 파닥이며 성을 내는 황태녀의 모습에 확신했다.
페디를 부르지 않았다면 무조건 난리 났다. 백작성 복도를 등으로 쓸고 다니는 황태녀를 봤을 거야.
“죄송합니다, 전하.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진쨔?”
“물론이지요. 이 대부가 전하께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사실 몇 번 정도는 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없다. 그렇다면 황태녀에게 배신감을 준 사건은 없었다는 뜻.
실제로 황태녀 기억 속에도 나는 신뢰의 상징이었는지, 밝은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만족스러운 결과라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갑작스러운 변수가 생겨 황태녀가 페디와 떨어져야 할 일이 생겨도 안심할 수 있다.
황태녀의 원망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대부가 아닌, 옆에서 배나 긁적이던 황제에게 향할 테니까. 이런 식으로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야 앞날이 편하지 않겠나.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황제가 원흉이기는 해. 아이들의 감정은 어쩔 수 없는 순리지만, 내가 이렇게 눈치를 보고 빌빌거리는 건 황제의 분노 때문이잖아. 그놈이 허허 웃어넘겼으면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었어.
그러니 일이 터진다면 네가 감수해라. 그게 친부가 짊어져야 할 업보일 테니.
“후후, 오랜만에 봐도 황태녀는 대부를 잘 따르는군요.”
“아, 폐하.”
슬며시 입을 여는 황후를 향해 즉시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총애가 감격스러워 감히 황후 폐하께 인사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송구하옵나이다.”
“괜찮습니다. 어른들의 예법보다는 아이의 반가움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작게 웃음을 흘린 황후는 황태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게다가 오늘은 황후로서 귀족들을 보러 온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신도로서 성 칼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온 것입니다.”
나긋나긋한 어조로 비수를 내던졌다.
신도로서 성인의 예배를 듣기 위한 방문. 충분히 예상한 명분이지만 막상 황후의 입으로 들으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저는 참으로 행복한 신도입니다. 이 대륙의 그 누가 성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교황 성하조차 이런 호사는 누리지 못했을 테지요.”
“부족한 놈이 폐하의 귀를 더럽히지는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내 우려에도 황후는 그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덕분에 부담감이 솟구쳤다. 적당히 성서만 읽으려고 했는데, 더 성의 있게 해야 하나…?
“때부, 때부!”
“예, 전하.”
“여기도 때부 집이라며! 뻬디도 여깃써!?”
황태녀의 직설적인 질문,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겨우 미소를 지었다.
“페디랑 티티가 전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다른 동생들은 제도에 있지만, 다음에 볼 수 있으니 괜찮겠지요?”
“웅! 갠차나!”
순간 페디가 아니라 다른 동생이었어도 괜찮다는 말이 나왔을까─ 라는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 황태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감정에 너무나 솔직하구나. 조금 나이가 찬 상태라면 예의상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같은 반응은 보였을 텐데.
‘차라리 어려서 다행인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황태녀가 보다 성숙한 상태로, 감정 제어에 능숙한 상태로 페디를 마음에 품었다면 어른들의 대처도 힘들었을 거다. 아무도 황태녀의 마음을 몰랐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깜짝 고백 공격을 겪었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차라리 지금 이 난리를 겪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야.
“아, 전하.”
“웅?”
“다른 동생들은 없지만 테레사는 있습니다.”
“떼레사두?”
내 말에 황태녀가 두 눈을 반짝였다.
다행이다. 혹시 페디와 단둘이 있는 걸 방해받았다고 토라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로 무거운 감정을 가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참, 테레사를 보는 건 오랜만이지요?”
“우웅! 오랜만이야!”
“그럼 테레사도 전하를 반길 겁니다. 언니로서 잘 놀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웅! 나 미더!”
황태녀의 고개가 격하게 끄덕여졌다.
동생. 황태녀의 투지를 급속도로 솟구치게 만드는 만능의 단어. 솔직히 항렬로 따지면 나와 같은 라인인 테레사가 황태녀, 페디보다 위기는 하다만, 나이 앞에서 항렬이 무슨 의미야.
자기보다 어린 고모 같은 건 어린아이들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다 같은 놀이 상대에 불과하지.
페디와 황태녀, 테레사, 티티로 이루어진 4인 파티.
넷 중 하나는 짐승이나 티티는 사람의 지능과 눈치를 가졌기에, 아무튼 4인 파티를 결성한 아이들은 백작성 이곳저곳을 누볐다.
오랜만에 고모와 누나를 봐서 기쁜 페디, 페디와 재회해서 좋은 황태녀, 페디보다 더더욱 오랜만에 황태녀를 만난 테레사, 그저 해맑은 티티까지 아주 활기차기 그지없더라.
“초대 교황께서는 이교도의 손에 심장을 찔리고 주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허나 주의 곁으로 가기 전, 자신의 심장을 찌른 이교도를 끌어안으며 말했지요. 그대가 찌른 것은 언젠가는 벗어던질 껍데기요, 내 혼은 변하지 않았나니. 그대의 죄도 언젠가는 벗어던질 수 있는 껍데기에 불과할지다.”
물론 아이들이 활기차든 말든 어른들은 조용히 예배를 드리기 바빴지만.
“인간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변하고 사라질 것들이며, 영원하지 않고 찰나 동안 존재할 것들입니다. 초대 교황께서는 자신의 죽음도, 이교도의 죄악도 영원한 낙인이 아닌 잠깐의 흔적으로 여기신 겁니다.”
그 고요한 현장 속에서 적당히 성서를 보며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초대 교황의 자비는 유명하다. 인간의 필멸성과 주의 불멸성을 언급하였고, 이를 죄인을 향한 자비와 관용으로 연결한 것은 지옥 같았던 종교 전쟁 시절에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자신이 마음을 먹는다면 변할 수 있다. 죽음으로 생이 끝나더라도 그 뒤에 더욱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는 사후에 대한 공포와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양심을 외면했던 자들에게 무엇보다 아름다운 말이었지.
실제로 초대 교황을 죽인 이교도는 교황의 유언에 따라 처단되지 않았고, 도리어 회개하고 전향하여 여명 교단의 사도이자 성인으로서 순교했다. 정말 아름다운 일화야.
‘난 저렇게 못 하겠지만.’
종교의 창시자라 그런지 대범하기 짝이 없는 양반이다. 난 내 심장을 찌른 새끼가 있으면 대륙 끝까지라도 추격해서 복수하라고 했을 테니까.
“이 일화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통은 자비와 관용, 용서와 회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허나 지금의 나는 살아있는 성인. 세속에 찌든 개인적 판단이 아닌, 철저히 종교적인 발언만을 해야 한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초대 교황께서 보인 아름다운 최후, 이교도 암살자에서 순교한 사도이자 성인이 된 성 리탄. 자비, 관용, 용서, 회개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이니까요.”
잠시 헛기침을 한 후 경건한 자세로 앉아있는 황후, 제국백 가문 부인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저는 다른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께서는 세상을 굽어살피시되, 세상을 주무르는 분이 아니라는 것. 바로 그 점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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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아주 미약한 동요가 퍼졌다.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 신이라니. 에넨이 존재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을 섬기는 교단을 통해 나름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그것을 두고도 ‘세상을 주무르지 않는다.’ 라고 하는 건 양심이 없는 표현.
그럼에도 내가 그런 말을 꺼낸 이유는 간단하다.
“주께서는 초대 교황의 죽음을 막을 능력이 있습니다. 동시에 성 리탄을 처음부터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할 능력도 있으시지요. 그럼에도 초대 교황은 순교하고, 성 리탄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에넨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는 주께서 신도들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기를 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해진 길을 억지로 안내하는 것이 아닌, 인간들이 알아서 나아가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렇게 말한 후 성호를 그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그럴싸하게 말을 이어갔다.
“주께서는 천상에서 굽어살피심이나, 저희가 주께 이르는 방법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주께서 저희를 언제 어디서나 지켜보심을 잊지 말되, 자기 자신도 돌아보며…?”
말을 잇던 중, 등 뒤쪽으로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를 보던 황후와 부인들도 놀란 눈으로 내 뒤를 쳐다봤다.
‘뭔데.’
불안한 마음을 가지며 슬며시 뒤를 돌아보자,
‘아.’
벽에 걸어둔 십자가가 반짝거렸다.
이 망할 신이. 내가 언제 어디서나 지켜본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증명할 필요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