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19)
로판 속 공무원 919화(920/945)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뒤에 같이 점심을 먹는 건 일종의 국룰이다. 그 국룰은 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다르게 말한다면, 나는 십자가 발광 사태를 겪었음에도 도망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예배의 중심이자 백작성의 주인이 예배를 마치자마자 탈주한다? 뒤에서 온갖 욕을 먹기 딱이잖아. 저거 저거 젊어서 출세했더니 아주 막 나간다고.
그런데 살아있는 성인 겸 예배 중에 신이 응답한 사람이라면 막 나가도 되지 않을까? 오히려 황후와 부인들에게 신비주의 컨셉을 심지 않았을까?
애석하다. 차라리 예배가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었다면 자연스레 넘어갔을 텐데. 지금은 늦었지.
‘인생…’
기계적으로 나이프를 움직이며 씁쓸히 스테이크를 바라봤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설마 마르와의 결혼식 때 겪었던 십자가 발광 사태를 다시 겪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나와 마르가 살아있는 복자로 시복되었던 결정적 계기인 그 사건. 그 경이로운 기적이 다시 터질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일단 난 아니다. 당연히 마르도 아니고. 높은 확률로 황제나 교황조차 몰랐을 터.
‘이거 노린 거 아닌가.’
깔끔하게 잘린 스테이크 조각을 보며 합리적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하필 내가 첫 예배를 했을 때. 하필 마무리 인사도 아닌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또 하필 황후와 제국백 안주인들의 시선이 전부 쏠려있을 때 십자가를 발광 십자가로 만들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묘한 상황이었다.
대체 왜 그런 거지? 내가 되는대로 내뱉었던 말이 의외로 에넨의 마음에 들었었나? 아니면 살아있는 성인은 에넨이 보기에도 신기해서 데뷔 기념 서프라이즈 파티를 연 건가?
‘플로렌스에 대한 사과인가?’
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플로렌스가 아프게 태어난 것, 그런 플로렌스를 자신이 아닌 장생이가 나서서 고친 것에 대한 일종의 사과가 아닐까─ 라고.
정작 내 입장에서는 사과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빅엿이었으나, 에넨이 장수종조차 넘보지 못할 세월을 살아온 신적 존재라는 걸 고려하면 그럭저럭 이해할 수는 있다.
에넨 입장에서는 명예를 추구하고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자주 봐왔을 거다. 인간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 기뻐하는지 나름의 빅 데이터가 쌓였겠지. 사실 내가 아닌 다른 사제가 이런 일을 겪었다면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을 테니 틀린 데이터도 아니고.
문제는 내가 에넨의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성 칼.”
그 사소한 차이로 인해 이런 참사가 터졌다.
황후가 나를 대부도, 백작도, 장관도 아닌 성 칼이라 부르는 미친 참사가.
“…예, 황후 폐하.”
일단 상석에 있던 황후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황후가 나를 신하가 아닌 성인으로 대하는 중이라고 해도, 나조차 황후를 일개 신도로 대하면 제국 족보가 개같이 꼬이니까.
“오늘 있었던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주를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도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것. 천상의 주를 바라보되 모든 걸 의지하지 않는 것. 실로 중요한 가르침이었지요.”
옅게 미소를 지은 황후는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주께서 성 칼의 가르침에 친히 응하셨나니. 저희는 성인의 가르침과 주의 긍정을 동시에 듣는 영광을 겪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제국 역사 300년은 물론, 대륙 역사 수천, 수만 년 동안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앞으로 이어질 수만 년 동안에도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저희만 겪은 영광입니다.”
그러자 부인들도 황후의 말에 화답하듯 잔을 들어 올렸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사람이 강렬한 충격과 마주하면 오히려 말이 없어지더라. 십자가 발광 사태를 본 부인들은 흥분하여 나에게 달려들기는커녕, 이 상황을 최대한 이해하려는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성인의 예배에 주가 응답한 건 과하게 강렬한 자극이기는 했지.
그 침묵도 황후로 인해 깨지고 말았지만.
“주께서 성 칼을 통해 내리신 새로운 가르침을 위하여. 주와 저희를 잇는 통로가 되어 새로운 빛을 밝힌 성 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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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르침과 성 칼을 위하여!”””
황후의 선창과 부인들의 호응. 성서에 나올 만큼 경건하고도 웅장한 광경에 침통히 눈을 감고 말았다.
최소한 나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인 부인들이 나를 위해 건배를 하는 것. 도저히 맨 정신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새로운 가르침과 주의 자비를 위하여.”
더욱 미칠 것 같은 점은 나도 저 외침에 화답해야 한다는 것.
속이 쓰리다. 내 배를 가르면 반짝이는 십자가 대신 뜨겁게 타오르는 심장을 볼 수 있을 거야.
성 칼이 황후와 제국백 가문 안주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예배를 진행하던 중, 천상의 주가 응답하여 예배실을 광명으로 채웠다.
라는 소문은 빠른 속도로 제국 전역에 퍼졌다. 그 과정에서 촛불 정도 밝기로 빛났던 십자가가 장님도 눈을 뜨게 만들 태양빛 수준으로 진화하기는 했으나, 중요한 건 에넨이 예배에 개입했다는 점이지. 놀랍게도 핵심 내용에 대해서는 어떠한 가감이나 왜곡 없이 퍼지더라.
마치 누군가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것처럼.
– 당연히 짐일세. 제국에서 그런 공작이 가능한 건 짐밖에 없지 않나.
그리고 범인은 숨길 생각도 없이 당당히 말했다.
네가 겪은 기적, 내가 잘 써먹었다고.
‘개새끼.’
치가 떨렸다. 나는 에넨의 기습 공격 때문에 저택 앞 인파가 배로 늘어나는 기적을 목도 중이거늘. 심지어 안면이 있는 귀족들은 통신구로 ‘혹시 우리 영지에서 예배 좀 드려줄 수 있음?’ 같은 부탁을 하고 있다고.
대외적으로는 아직 감찰성 장관인 나한테 먼저 연락을 걸며 이런 부탁을 한다? 점점 내 대외적 이미지가 차가운 제도의 감찰성 장관에서 따뜻하고 온화한 성인이 되어간다는 의미다.
그게 아니라면 감찰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이겨낼 정도로 성인의 축복이 탐났다거나. 여기에 주의 은총까지 곁들어졌으니 완벽하네.
– 어차피 짐이 아니었어도 금방 퍼질 소문이었으니 그렇게 보지 말게. 목격자가 한둘인 것도 아니고, 부인들이 친정이나 사용인들에게 말했다면 얼마나 빠르게 퍼졌겠나. 예상치 못한 속도로 퍼지는 것보다는 짐이 통제하는 게 백작에게도 이득이야.
그 와중에 맞는 말이라 분했다.
이번 일은 나에게 있어서 재앙이나 마찬가지였어도, 객관적으로 보면 딱히 함구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각 제국백 가문의 부인들은 예배 중 있었던 기적을 여기저기 떠들며 다녔을 거고, 소문이 퍼지는 속도와 범위는 제각각이었을 터. 통제할 수 없는 소문에 얻어맞을 바에는 소문을 주도하는 것이 이롭기는 하다.
그래도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건 별개야. 아주 개 같애.
– 그건 그렇고 백작.
“예, 폐하.”
– 막내도 신의 은혜로 인해 병마를 이겨냈거늘, 이제는 신께서 백작의 예배도 지켜보시는군. 실로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그렇게 말한 황제는 잠시 웃음을 흘리더니,
– 백작이 교국으로 도망쳤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말이야.
어깨가 절로 떨릴만할 말을 내뱉었다.
황제가 황태녀에 관한 일로 눈이 뒤집혔을 때, 기적적으로 교황의 부름을 받아 신성교국으로 대피할 수 있었지. 설마 이 치졸한 놈이 그 일을 굳이 언급할 줄이야.
– 백작.
“하명, 하소서.”
– 타일글레헨에서 돌아온 황태녀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나? 그간 백작의 저택에 가지 못하여 우울해했는데, 그동안 어두웠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활짝 웃었어.
“참으로… 다행인 일입니다.”
– 그래, 다행이지. 타일글레헨에는 페디만 있다고 해서, 더 쳐줘야 백작의 막냇동생만 있다고 해서 걱정했으니까.
겉으로만 보면 진심으로 안도하는 아비의 모습이었지만 속내는 무엇보다 명확했다.
황태녀가 페디를 다시 본 것에 기뻐했고, 페디와 함께 논 것에 기뻐했다. 다른 동생들을 보지 못한 것에는 약간의 아쉬움을 표할지언정 서운함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이는 페디를 향한 황태녀의 마음이 확고하다는 걸 황제가 확인한 것이나 마찬가지. 겨우 가라앉았던 황제의 분노가 다시 타오르기에 충분한 일이다.
– 조만간 황태녀를 저택에도 보내겠네. 그때는 다른 동생들과도 놀아야지.
“예?”
– 음? 왜 그런 반응인가? 그럼 황태녀에게 페디하고만 놀라거나, 백작의 아이들을 황궁으로 보낼 생각인가?
“아, 아닙니다. 전하께서 오신다면 저야 기쁜 일이지요.”
예상외의 말이라 놀라고 말았다.
그동안의 패턴상 이어질 반응은 황제의 분노와 압박이어야 한다. 헌데 이렇게 느슨하고 온화한 반응이라니.
‘신의… 축복인가?’
발광 십자가 따위보다는 황제를 분노조절잘해로 만든 것이 더 축복이기는 하다. 나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축복이야.
‘고맙습니다, 에넨.’
속으로 에넨에게 진심의 기도를 올렸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살아있는 성인이 되어 제국의 명예를 드높였고, 열기가 가라앉기도 전에 화려한 후속타까지 날렸다. 내 조국인 제국, 내가 섬기는 황실, 내 주군인 황제의 명성과 권위도 덩달아 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황제도 강경한 분노 대신 온화한 인내를 택한 거겠지. 딸을 향한 아비의 마음은 무엇보다 무거우나, 내가 가져다 바친 영광은 보다 거대하고 전무후무한 것이기에.
‘에넨은 주류 신이 맞다.’
사람의 마음을 조금 모르면 뭐 어떤가. 결국 돌고 돌아서 이렇게 됐는데.
플로렌스를 아픈 상태로 태어나게 한 것은 섭섭하지만, 그래도 에넨이 죽음 시절 장생이를 완전히 없애지 않고 봉인으로 끝낸 덕에 플로렌스의 완치로 이어졌다. 이 또한 에넨의 안배일 터.
그렇게 생각하니 신앙심이 소폭 상승하는 기분이다.
***
백작은 신들의 가호를 받는 놈이 맞다.
어떻게 공격 좀 하려고 준비를 하면, 기다렸다는 듯 황제인 나조차 도저히 뚫을 엄두가 나지 않는 방패를 가지고 오는 건지. 이제는 어이가 없는 수준을 넘어 실소만 나온다.
‘나도 하늘에 맡겨야겠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백작을 공격하는 건 내가 주도할 일이 아니다. 하늘께서 적절한 시기, 적절한 명분을 하사하실 때 치고 들어가자.
언젠가는 그날이 반드시 온다. 백작이 온갖 소란의 중심이 서는 걸 고려하면 안 올 리가 없다.
‘합법적으로 까주마.’
성인과 축복의 열기가 가라앉을 때. 명분상 완벽한 공격 사유가 들어올 때.
오직 그날을 위해 인내하자. 아비의 복수는 10년, 20년이 걸려도 부족하지 않으니.
“…참, 백작.”
– 예, 폐하.
– 며칠 뒤면 신임 아우스엔 대교구장이 온다더군. 입국과 동시에 황궁으로 온다고 하니, 그때 짐과 함께 얼굴이나 보세나.
옛날이라면 굳이 백작을 대동할 필요가 없으나, 현재 백작은 살아있는 성인. 새로운 대교구장이 온다면 인사를 나누는 것이 도리다.
게다가 백작의 성인 등극을 축하할 예배는 신임 대교구장이 진행할 예정이다. 주인공끼리 서로 얼굴이라도 익혀야 하지 않겠나.
‘대체 누가 오는 거지.’
그보다 아직까지도 신임 대교구장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 의아할 따름이다.
제국 역사상 이렇게까지 후임자 발표가 늦은 적이 없었는데. 콘클라베가 겹쳐서 교국도 정신이 없는 건가?
뭐, 교국이 알아서 적당한 사람을 보냈겠지. 너무 신경 쓰지는 말자.